2014.01.21 14:24

펌)시간의 경제학-10년 동안 프로그래밍 배우기

예전에 피터 노빅의 글을 보고 썼던 zdnet 컬럼이다. 원래의 링크는 사라졌다.

무슨 일을 하던지 10년은 걸린다는 내용인데 사실이기도 하다.

이글은 번역본을 조금 고치고 싶을 정도다.

아무튼 내가 나의 글을 가지고 있지않고 항상 검색을 한다는게 언제나 황당하기만 하다.


시간의 경제학-10년 동안 프로그래밍 배우기(출처 : ZDNet Korea IT 비지니스)  FreeBoard 

2007/10/05 18:05

복사http://blog.naver.com/virusabum/90022975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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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요즘 프로그래밍을 다시 배우고 있다. 어떤 광고 문구에 나오는 것처럼 그동안 2% 부족하다고 느끼던 부분들을 손대기 위해서다. 완벽한 것은 없지만 중요하다고 느끼던 부분들이다. 프로그래머 생활을 한 사람으로 컴퓨터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에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표현능력의 부족은 코딩 스타일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과정에 문제가 있거나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생각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일의 발단은 10년 전에 LOGO로 프로그래밍하면서 느꼈던 기묘한 궁금증들을 나중에 생각해보니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메시지를 보내는 여러 객체들의 역할을 다루는 actor model과 message passing의 문제였으며 일부는 lambda 함수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까다로운 문제다. 다시 붙잡고 보아도 과거보다 이해력이 좋아졌다는 증거는 없었다. 누구나 오래 생각해보던 문제들은 있는 법이다. 필자의 경우는 예전에 만들어보고 싶어 했던 어떤 에이전트를 표현할 수 없던 표현력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수학도 그렇고 코딩을 하는 것도 그랬다. 그런데 10년 동안 전혀 변화가 없었다. 

많은 시간을 들인 일이 답 없이 끝날 수 있고 필요한 시간은 1년이 아니라 몇 년이 될 수도 있으며 그동안 많은 일들을 못할 뿐만 아니라 별로 생산성을 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머리는 자꾸만 더 나빠질 것이 확실하다. 비관적인 결론을 내리면 어떤 문제의 일반화는 1년이 아니라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다른 중요한 선택들처럼 판돈이 큰 도박이다. 그리고 기다라는 보상은 대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다. 어느 정도 좋아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이 정도의 스트레스를 느낄 정도라면 현장에 있는 프로그래머나 관리자의 시간적인 압박은 상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현장은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 안에서 고민하는 것이라 압박의 성질이 다르다. 현장은 것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할 수 없으면 포기하거나 운에 따르는 수밖에 없는 곳이다. 현장에서는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이며 이번에 못한 일이라면 다음에 잘 하는 수밖에 없다. 프로젝트만 놓고 보자면 이번에 잘한 팀이 훨씬 유리해지는 게임이다. 물론 생각이나 공부는 그 프로젝트의 시간 안에서 일어난다. (예전의 학생에서 이제는 교수가 된 친구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가 있다. 시험을 통과하지 않은 공부는 흔들린다는 것이다. 수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험 기간 동안 쌓이는 집중이 기본기를 만든다는 것이다. 다 수긍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이 사실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실에서는 더 무서운 시험인 현장의 프로젝트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해도 사람들마다 그 안에서 무언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주제는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없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바빴던 것이 틀림없다. 몇 번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나면 보통 몇 년의 세월이 흐른다. 하던 일들은 대체로 비슷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어떤 걸림돌 같은 부분이 있다. 개선이나 변혁을 기다리는 요소들이다. 성공적인 프로젝트를 오랜 기간 진행하고 나서도 경험곡선을 상승시킬 그 무엇이 없었다면 역시 무엇인가가 부족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실패한 프로젝트는 원래 배울 것이 많은 것이니 말할 필요도 없다. 성공을 하건 실패를 하건 시간은 흘러간다. 

피터 노빅은 왜 10년이라 했을까?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자 첫 번째로 떠오르는 생각이 피터 노빅의 글이었다. 노빅은 작년까지 구글의 Search Quality의 책임자였다가 요즘은 연구 책임자로 있다. 구글에 오기 전까지는 NASA AMES의 컴퓨터분과 책임자로 있었다.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분야에서 잘 나가는 연구자이기도 했다. 피터 노빅의 글중에 10년동안 프로그래밍 배우기(Teach Yourself Programming in Ten Years)라는 유명한 에세이가 있다. 우선 제목을 잘 붙였다. “10년 동안 프로그래밍 배우기” 아니면 책방의 책들처럼 “프로그래밍 10년 완성”. 인상적인 제목이다.

10년이면 상당히 긴 세월이다. 단 몇 줄을 읽고 싶지 않아 건너뛰기도 하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에게 10년이면 거의 영원에 가까운 세월이다. 그러나 10년은 돌이켜 보면 금방 흐르는 세월이다. 프로그래밍이나 전자공학의 흐름에서 10년은 아주 긴 것 같으면서(많이 변한다.) 덧없이 금방 흘러버리고 마는 시간이다. 만약 이 10년이라는 시간이 잘 사용할 수 있으면, 그리고 성취의 흐름을 10년 정도로 잡는다면 그렇게 조급해 하지는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만약 시간의 흐름을 1년이나 3년 정도로 잡는다면 약간 조급해 질지도 모른다. 1달이나 몇 개월의 흐름으로 잡는다면 조급해져서 복잡한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월이 아무리 빨리 흘러도 일들의 진행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프로그래밍을 소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밥을 소화하는 데에도 몇 시간이 필요하다. 필자 역시 조급해져서 하던 일을 중간에 팽개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에 10년이라는 척도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정말 긴 시간이기는 하지만 어떤 일의 마스터링에는 대략 10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 노빅의 주장이다. 

글의 시작은 서점에 들어서면 “자바 7일 완성 (Teach Yourself JAVA in 7 days)” 과 비슷한 제목의 인터넷, 윈도우, 비주얼 베이직에 대한 책들이 끝없이 늘어선 것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아마존을 검색해보면 이런 서적이 대부분 컴퓨터분야에 몰려있다는 것이다. 노빅은 이 검색의 결론을 컴퓨터를 배우려는 사람들의 엄청난 붐이 있거나 컴퓨터를 배우는 일이 너무나 쉽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리학이나 베토벤에 대해서는 당연히 며칠 만에 배우기가 없으며 개의 손질법마저도 몇 일만에 배우는 책은 없다고 했다. 이를테면 “3일 동안 Pascal 배우기” 같은 책이 알려줄 수 있는 것은 Pascal과 비슷한 그 무엇이다. 비슷한 언어를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 동안에 배울 수 있는 것은 문법정도라는 것이다. 3일이나 일주일 동안에 일어날 수 있는 변화는 그것뿐이다. 인생이 바뀌지도 않는다고 한다.

노빅이 제시한 것은 “10년”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을 잡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보통 한 분야에서 정통하거나 대가가 되기까지 일반적으로 10년 정도의 세월이 걸린다는 연구 결과를 인용한 것이다. 체스, 음악 작곡, 미술, 피아노, 수영, 테니스, 정신심리학, 위상 수학 기타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십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 정설이라는 것이다. 지름길이나 단축코스가 없었다고 한다. 

신동이라 불린 모짜르트도 최고의 음악을 만들기까지 13년 이상이 걸렸다. 비틀즈 역시 비교적 빨리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훨씬 이전인 1957년부터 작은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결정적인 작품들은 10년 정도 지난 1967년 Sgt. Peppers에 이르러서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사람들 역시 목표의 눈높이는 낮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 정통해지기 까지는 당연히 세월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부단히 개선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당연한 글을 쓴 것이다. 

노빅의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방법
노빅이 제시한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가져보고 정말 재미가 있다고 생각해야 10년 정도를 기꺼이 쏟아 부을 수 있다(필자의 생각에 이것은 당연한 것 같다.). 

- 다른 사람의 프로그램을 읽어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어떤 책이나 교육과정보다 중요하다(다른 사람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으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읽힐 작품을 쓸 수 없다.).

- 가장 좋은 배우기는 실제로 해보면서 배우는 것이고 이 방법을 더 적극적으로 체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성취는 오랜 기간 경험을 쌓으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노련한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끊임없는 개선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이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버전업과 점진적인 발전 앞에는 장사가 없다.).

- 컴퓨터 학과가 가르쳐주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일을 하면서 배울 수도 있다. 

-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해보면서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최고의 프로그래머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리드하고 비전을 제시해 보기도 하고 어떤 프로젝트에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도 받을 필요가 있다(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보는 것이 최고의 학습이라는 말이 있다.).

- 다른 사람이 이끄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의 프로그램을 이해한 후 원래의 작성자가 놓친 부분을 고쳐보기도 하고 자기의 프로그램을 관리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작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작성하기도 해야 한다(작가의 표현력은 여러 번 고쳐 써 보면서 증가한다고 한다.최고의 글쓰기는 다시 써보기라는 말도 있다.). 

- 다양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워라(여러가지의 패러다임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있다. 

읽다보면 10년 정도의 기간으로 부족할 것 같기도 하다. 10년 동안 이렇게 배우는 것은 10년을 열심히 살라는 이야기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써보고 가르치고 배우고 참여하여 몸으로 체득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되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은 스스로 인지하는 과정에서 배운다
노빅의 주장 가운데에는 몇 가지의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책이나 문서라는 것은 스스로 배우거나 사람들에게 배우는 것보다 훨씬 약하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책이나 문서를 읽는 것 보다 그냥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 안에 빠져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일들은 일 그 자체를 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배우는 과정이라는 사실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책이나 문서라는 것은 이 과정을 배우는 데 필요한 하나의 주석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은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인지과정이다. 다른 분야와 다를 것도 없다. 10년이라는 것은 소모되는 세월이기도 하지만 변화에 투입되는 기본적인 자원이다. 

글의 뒷부분에는 노빅 자신의 이야기가 나온다. 노빅은 첫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 수없이 많은 "How to.."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는 초보자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30 개월이 지나 둘째가 태어날 무렵 노빅은 책을 새로 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믿기로 했다. 그러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 전문가가 쓴 수 천 페이지의 책보다 유용하고 더 확실한 것이었다고 한다. 차라리 프로그래머에게 How To가 아니라 How Not To를 가르치는 편이 어떨까하고 이야기한다. 스스로 배운다는 것은 HowTo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잘 할 수 있는 일과 함께 하는 경우에 커다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소질을 타고나는 경우도 있다. . 

노빅은 글의 끝머리에서 책방에 가서 책을 사서 읽으면 어떤 유용한 가르침을 줄지는 모르지만 그 것이 며칠이나 몇 달 안에 인생을 변화시키지도 않을 것이고 통달을 가르쳐 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필자의 생각은 책의 제목이 Teach Yourself XXX in Ten Years 라고 쓰여 있다고 해도 답은 종잇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에게 속해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각하고 풀어보고 시간을 들여서 답을 만드는 사람 자체가 답이며 문제들과 함께 변한다. 꼭 정신수양의 과정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들을 잘 엮어서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필자 스스로의 변화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기대가 없으면 행동은 나오지 않는다. 

필자의 생각에 이 게임에서 10년 동안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은 바로 자신(Yourself)이다

 

 

출처 : ZDNet Korea IT 비지니스

글쓴이 : 안윤호(아마추어 커널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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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9 07:37

펌)깨진 꿈, 자유롭고 평등한 인터넷 세상-① 네트워크 장악한 절대자들

상당히 재미있는 기사다.

패권은 아마 오래 갈 것이다.


   
깨진 꿈, 자유롭고 평등한 인터넷 세상
Cover Story ● ① 네트워크 장악한 절대자들
[44호] 2013년 12월 01일 (일)마르크 슈발리에  economyinsight@hani.co.kr
  
 

인터넷은 초기 개척자들이 꿈꾸었던 것과 같은 ‘개방된 자유 공간’이 아니다. 오늘날 디지털 경제 영토는 구글·아마존·애플·페이스북 등 미국 거대 기업들이 독점한 텃밭이 됐고 이런 구조는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 인터넷이 미국에 경제적·전략적 이익을 몰아주는 상황에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국가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다. _편집자

구글·아마존·페이스북, 네트워크 효과로 시장 선점 뒤 ‘슈퍼갑’ 부상… 유럽은 속수무책

오늘날 인터넷은 전지전능한 집행자이자 사람 속마음까지 꿰뚫는 감시자가 됐다. 특히 미국의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은 디지털 생태계에서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독재자로 군림한다. 유럽에는 이렇다 할 인터넷 강자가 없다. 미국의 인터넷 독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3의 디지털 혁명’ 과정에서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나올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마르크 슈발리에 Marc Chevalier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기자

20여년 전 웹브라우저의 선구자 격에 해당하는 ‘넷스케이프’가 널리 전파되면서 인터넷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당시 신경제를 둘러싸고 수많은 장밋빛 신화가 난무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앞으로 인터넷이 발전하면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직거래가 활성화되면서 중간상이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예견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은 중간상의 종말을 가져오기는커녕 오히려 덩치 큰 슈퍼 중간상들의 출현만 낳고 말았다. 가령 구글·애플·아마존·페이스북 등 ‘정보중개자’(Infomediary)로 불리는 기업들이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의미에서 진정한 ‘창조적 파괴’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유럽의 방송통신 전문 시장조사 업체인 IDATE(방송통신연구소)가 지적한 것처럼, 창조적 파괴 과정은 기존 업무 방식이나 유통 방식, 주도권 양상, 가치 배분 구조 등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있다. 그만큼 국가적 차원을 넘어 유럽, 더 나아가 세계적 차원에서 정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인터넷은 세계경제 지형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다. 그나마 이것도 전초전에 불과할 뿐이다. 프랑스 재무감찰총국(IGF, 각 정부 부처를 감찰·감독하기 위한 재정경제부 산하 기구로, 경제·재무·행정적 문제와 관련해 감독·감찰·자문·평가 임무를 맡고 있다 -편집자)에 따르면, 정보통신기술(ICT) 업체들(통신사업자, 정보기술(IT) 서비스업체, 설비업체, 온라인 사이트 등)로 구성된 가장 핵심적인 디지털 분야는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의 5%를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요즘에는 더 많은 분야들이 디지털화 과정을 겪고 있다. 디지털 경제의 비율은 프랑스 전체 생산의 약 4분의 3에 이를 정도다.

디지털화 현상은 크게 두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먼저 ICT를 도입해 생산력을 향상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많은 기업들이 주문·결제·생산 관리 등을 전산화해 효율성 높이기에 나서고 있다. 가치사슬(기업이 원재료·노동력·자본 등의 생산요소를 결합해 부가가치를 높이는 과정이나 체계 -편집자)의 대부분을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함으로써 완전한 디지털화를 꾀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광고·관광·문화 산업 등은 오늘날 차례차례 디지털화 과정을 거치며 업무 방식이나 경제모델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조각난 환상, 중개상 없는 인터넷 직거래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면, 오늘날 온라인 광고가 등장하면서 기존 전통적인 광고매체에 비해 10분의 1의 비용만 들이고도 타깃층을 더 정확하게 공략하거나 광고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에 따라 기존의 전통적인 광고매체(여기에 종이 언론이 속한다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나 해당 매체에서 활동하는 많은 광고업체들은 오로지 글로벌 기업 구글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점차 가치가 이동(Value Migration)하는 현상에 직면해 있다. 사실상 구글은 인터넷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스폰서 링크 서비스를 기반으로 광고매체와 광고회사의 역할을 동시에 겸하고 있다.

최초의 웹브라우저 개발자 마크 앤드리센이 표현한 대로 디지털이 각 분야를 ‘집어삼키는’ 원리는 언제나 대동소이하다. 인터넷의 야만족들은 “가치사슬의 가장 핵심적인 부위에 끼어들어 사용자와 직접적으로 접촉한다. 그리고 자사 서비스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동 축적되는 정보를 토대로 시장점유율을 점차 확대해나가며, 종국에는 자신들에게로 이윤이 옮겨오도록 만든다.”

2013년 정부에 제출한 ‘디지털 부문 조세제도에 관한 보고서’에서 프랑스 참사원(프랑스 정부의 행정 및 입법 자문기관을 겸하는 최고 행정법원 -편집자) 소속 피에르 콜랭과 IGF 소속 니콜라 콜랭은 이처럼 지적했다.

가령 아마존은 인터넷 사용자의 행동 양태를 면밀하게 분석한 자료를 기반으로 추천 시스템을 구축하고 공격적인 가격정책을 펼치며, 문화상품 시장에 대한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반면 골목서점에서 대형 체인서점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오프라인 상점들은 줄줄이 문을 닫는 신세가 됐다. 가장 최근에는 버진메가스토어(Virgin Megastore)가 희생됐다. 프랑스에 26개 점포를 운영 중이던 이 체인점은 2013년 6월 공식 파산을 선언했다. 그 전에도 미국 내 500개 매장을 두고 2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리던 보더스(Border’s) 서점이 2011년 폐업했다.

애플은 고객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케 해주는 디지털 미디어 플레이어 ‘아이튠즈’와 ‘아이팟’이 벌이는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에 힘입어 온라인 음악 시장을 석권했다(미국에서만 시장의 3분의 2를 점유했다). 심지어 자사가 원하는 음원이나 음반 가격을 음반회사에 강제할 수 있을 정도로 애플의 위세는 하늘로 치솟았다. 아이폰·아이팟의 성공과 함께 이 미국 기업은 이제 동영상, 언론매체 등 다른 콘텐츠 제작 산업으로까지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인터넷은 초기 개척자들이 예견했던 완전경쟁 시장이라는 이상을 구현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대한 독점 구조만 낳고 말았다. 소수의 공룡기업들이 다양한 시장에 걸쳐 독점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 형태의 경쟁만 허용하고 있을 뿐이다.

  
▲ 구글의 에릭 슈미트 회장이 지난 11월 홍콩에서 ‘커넥팅 위드 더 월드’(세계와 연결하기)라는 주제로 열린 대학생 간담회에서 ‘인터넷 자유’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왼쪽).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전화를 거는 상황을 시연한 휴대전화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로고를 보여주는 태블릿PC의 화면을 합성한 일러스트레이션. 미국이 우방국 정부의 최고 지도자들의 통화를 도·감청해온 사실이 최근 들통났다(오른쪽). REUTERS

경쟁도 규제도 없는 독점 체제 구축

디지털 세계가 이토록 경쟁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네트워크 효과’라고 불리는 디지털 세계 고유의 법칙 때문이다. 당장은 수익성이 없더라도 일정 수 이상의 이용자가 자사 상품을 이용하게 만든 기업은 해당 시장에서 지배적이거나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요컨대 ‘The winner takes all’, 즉 ‘승자가 판돈을 모두 싹쓸이해가는 것’이다.

구글은 온라인 검색에서, 페이스북은 소셜네트워크에서, 애플은 온라인 음악 부문에서 거둔 것이 바로 이런 네트워크 효과다. 물론 아마존도 예외는 아니다. 아마존은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1995~2003년 거의 30억달러(약 3조2천억원)의 자금을 쏟아부었다. 본격적으로 수익을 올리기 전까지 자기자본에서 상당 금액을 빼쓰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 인터넷 시장이 대부분 미국 공룡기업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은 비단 실리콘밸리 출신의 이 기업들이 특유의 혁신 정신을 발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금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가령 1998년 이후 미국의 벤처캐피털은 3개월에 1개꼴로 훗날 10억달러 이상의 가치를 지니게 될 디지털 기업을 지원했다.

하지만 디지털 공룡의 독점 행태에 대해 공정거래 관련 기구들은 그저 속수무책일 뿐이다. 다국적기업의 조세회피 행태를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하는 각국 정부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는 온라인 사업의 경쟁 구조나 사업모델이 기존 시장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정보중개자들은 무료 서비스를 기반으로 지금의 지배적 위치에 올라섰다. 가령 구글의 검색엔진이나 애플의 아이튠즈 프로그램, 페이스북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모두 이용자에게 무료로 제공되고 있다. 이 공룡기업들은 서비스 이용자로부터 직접 수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윤을 창출한다. 이를테면 구글과 페이스북은 자사가 수집한 방대한 정보를 기반으로 광고 매출을 올린다. 애플은 아이튠즈의 폐쇄적 성격을 이용해 독점적인 콘텐츠 판매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 기업들이 내놓는 상품이나 사업모델은 소프트웨어와 IT 장비가 복잡하게 결합돼 있는데다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규제 기구는 적시에 규제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번번이 진땀만 빼며 뒷북을 치기 일쑤다. 가령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경쟁자 넷스케이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지 12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MS가 자사의 검색 프로그램인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기본으로 탑재하지 못하도록 금지할 수 있었다.

오늘날 디지털 혁명의 성격이 변화하는 시점에서 규제의 공백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먼저 스마트폰, 태블릿PC를 필두로 한 모바일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디지털 혁명의 성격이 변하고 있다. 벤처캐피털 KPCB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세계 웹 트래픽의 15%는 이제 모바일을 통해 이뤄진다. 또한 중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스마트폰이 데스크톱컴퓨터를 제치고 가장 주된 인터넷 접속 수단으로 부상했다.

사실상 모바일 인터넷 접속은 단말기와 운영체제(OS)가 긴밀히 결합된 생태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현재는 두 업체의 운영체제가 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먼저 구글이 개발한 운영체제(안드로이드)다. 구글은 이 운영체제를 휴대전화 제조업체에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애플이 개발한 운영체제(iOS 시리즈)도 있다. 이 운영체제는 오로지 아이폰에만 탑재된다.

현재 두 운영체제는 아주 영리하게 개방성과 폐쇄성을 적절히 혼용해가며 번영을 누리고 있다. 가령 자사 운영체제 플랫폼에서 내려받을 수 있는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스마트폰의 기능을 풍요롭게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것은 대개 외부 독립업체들이다. 이는 구글과 애플이 나름대로 자사 밖에서 이뤄진 혁신을 자신들의 것으로 소화하는 방식이다.

그럼에도 이 기업들은 타 기업의 혁신이 자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가령 지난 4월 애플이 자사 앱스토어에서 앱그래티스(AppGratis)를 퇴출시키기로 한 결정이 대표적인 예다. 프랑스 벤처기업이 개발한 이 애플리케이션은 유료 서비스를 무료로 시범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며 애플의 앱스토어와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결국 모바일 인터넷으로의 전환과 함께 인터넷이 극소수 사업자의 이익을 위해 전유될 위험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매우 우려스럽기 그지없다. 인터넷이 아직 디지털화의 영향이 적은 분야로 점차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터넷은 대인 간 통신에 그쳤지만 앞으로는 사물 간 통신을 통해 사물들을 ‘인공지능화’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가령 인터넷 TV, 인공지능 컴퓨터, 무인 자동차, 건강 수치 측정을 위한 의류 부착 센서(Quantified Self) 등은 한창 개발 중인 사물인터넷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사물인터넷의 발달은 앞으로 에너지·자동차·의료·도시 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 디지털화된 분야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디지털 공룡들은 이 새로운 시장에서도 자기 몫의 파이를 챙기려 안달할 것이다.

  
▲ 인터넷 검색엔진의 양대 강자인 구글과 야후의 로고를 랜케이블로 연결한 모습. 이들은 검색 과정에서 수집한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빅브러더’가 됐다. REUTERS

미국의 독재에 굴복하는 유럽

가령 구글이 ‘구글카’(인터넷 연결 자동차) 개발에 얼마나 목매는지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구글의 목표는 자동차 제조업체들을 설비업체, 즉 흔해빠진 저부가가치 상품을 제공하는 납품업체로 전락시키고 자신들이 미래 자동차 주문 시스템의 주역으로 우뚝 서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 디지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챔피언 기업이 없는 유럽으로서는 유럽 경제 전체가 미국의 이익에 종속될 위험이 크다.

물론 혹자는 끝없는 혁신으로 쉴 새 없이 판이 바뀌는 디지털 경제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다고 말한다. 가령 알타비스타·넷스케이프·마이스페이스 등 수많은 과거의 강자들이 오늘날 새로운 신예들에게 떠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의 인터넷 강자들이 대부분 인터넷 거품이 형성되기 이전에 탄생한, 막대한 자금력을 보유한 ‘희대의’ 기업들이라는 점이다. 이 기업들은 현재 연구·개발, 마케팅, 벤처기업 인수, 클라우드를 비롯한 인프라 구축에 무차별적으로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러니 이미 1·2차 디지털 혁명의 기회를 놓친 유럽은 모든 수단(공정거래 관련 규제, 조세제도, 산업정책 등)을 동원해 앞으로 일어날 제3차 디지털 혁명의 주역들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을 계속 다져놓아야만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유럽은 영영 기회를 잃고 말지도 모른다. 다행히 프랑스 정부는 이런 사안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제 남은 문제는 프랑스의 생각에 얼마나 다른 유럽 국가들이 동조해줄 것이냐는 점이다.

ⓒ Alternatives Economiques 2013년 11월호(제329호) L’age des monopoles 번역 허보미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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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4 20:02

펌) 왜 사회주의인가

너무 좋은 글이라 공유한다. 


왜 사회주의인가

 

앨버트 아인슈타인 (by Albert Einstein)

 

이 글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1949년 5월 미국의 독립계 좌파 월간지 <먼슬리 리뷰> 창간호에 쓴 것이며, 이 잡지는 창간특집호에 이 글을 종종 다시 싣습니다.

 


 

 

경제나 사회 문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사회주의에 대한 견해를 표현해도 되는 걸까? 나는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고 믿는다.

 

먼저 과학적 지식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방법론상으로 천문학과 경제학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두 분야의 학자들은 모두 많은 현상들의 관계를 가능한 한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현상들의 일반적인 법칙을 찾으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방법론 차이가 분명히 있다. 경제학에서 일반 법칙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따로 떼어내서 정확하게 평가하기 어려운 많은 요인들이 경제 현상들에 종종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른바 인류의 문명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은, 잘 알려진 대로 본질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원인의 영향을 받았고 또 이것의 제약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역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정복 덕분에 존재했다. 정복하는 이들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점령지에서 특권층이 됐다. 그들은 땅 소유권을 독점했고 자기 계급 사람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교육을 통제한 성직자들은 계급 구별을 영원한 제도로 정착시켰고 사람들이 사회행동을 할 때 (상당 부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되는 가치체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말하자면 역사적 전통은 과거의 이야기다. 토르스테인 베블린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라고 부른 것을 우리는 진정으로 넘어서지 못했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경제적 사실들은 이 단계에 속한다. 또 여기서 추출한 법칙을 다른 단계에 적용할 수도 없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인간 발전의 약탈 단계를 극복하고 전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 단계 경제학은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빛을 제시하기 어렵다.

 

둘째로, 사회주의는 사회윤리적 목적을 향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목적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을 사람에게 주입시키는 것은 더군다나 못한다. 기껏해야 과학은 이런 목적을 이루는 도구를 제시할 뿐이다. 목적을 인식하는 것은 높은 윤리적 이상을 갖춘 사람들이며, 이 목표가 사산한 것이 아니라 활력 있는 것이라면 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것은 사회의 점진적인 진화를 결정하는 많은 사람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 문제에 관한 한 과학과 과학적 방법을 과대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또 우리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전문가들뿐이라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인간 사회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안정성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수없이 많다. 개인들이 크든 작든 자신 스스로가 소속된 집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 이런 상황의 특징이다. 내가 말하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한다. 나는 최근에 지식인이며 인격자인 사람과 또 다른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다시 전쟁이 난다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돼, 초국가 조직만이 이런 위험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내 손님은 냉철하게 말했다. "인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반대하십니까?"

 

한 세기 전만 해도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이들이 없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발언은 자신의 평정을 찾는 데 실패하고 성공에 대한 희망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통스런 고독과 고립의 표현인데, 요즘 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원인이 뭘까? 탈출구는 있는가?

 

이런 질문을 제기하기는 쉽지만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볼 작정이다. 물론 나는 우리의 감정과 시도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모호하며 그래서 쉽고 간단한 수식으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언제나 고독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사람은 자신과 자기 주변 인물들의 존재를 지키려고 하고, 개인적인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며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려고 한다. 사회적 존재로서는, 주변 인물들에게서 평가받고 사랑을 받으려 하며 그들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려고 한다. 종종 모순적인 이런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만이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또 사람의 심리적 평정은 이 두 가지 유형의 노력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이 노력은 사회의 복지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고독한 존재라는 측면과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 가운데 어느 면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느냐는 주로 유전에 의해 결정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발현되는 인간의 개성은 대개 그가 자란 환경과 사회 구조, 그 사회의 전통, 그리고 특정 행위들에 대한 그 사회의 평가에 따라 형성된다. 개인에게 "사회"의 추상적 개념은, 자신의 동시대인 및 이전 세대 사람 전체와 맺는 직접, 간접적인 관계의 합이다. 개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노력하고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물질적이고 지적이며 감성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또한 많은 부분을 사회에 의존한다. 그래서 사회의 틀 밖에서 사람을 생각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에게 음식, 옷, 집, 도구, 언어, 생각의 형태, 생각의 내용 대부분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사회"이다. 사람이 생을 유지하는 것은 "사회"라는 간단한 단어 뒤에 숨어있는 현재와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이 한 일과 성과 덕분이다.

 

그래서 명백한 사실은, 개인이 사회에 의존하는 것이 개미나 벌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 없는 본성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개미와 벌의 삶 전체가 세세한 부분까지 유전적 본능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달리, 인간 사회의 형태와 상호관계는 아주 다양하며 변화할 수 있다. 기억, 새로운 조합을 할 수 있는 능력, 언어라는 선물이, 사람에게 생물적 요구와 무관한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발전은 전통, 조직, 문학, 과학기술적 성과, 예술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고 이 과정에 의식적인 생각과 요구가 개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해준다.

 

사람은 유전을 통해 태어날 때 생물학적 특성을 갖춘다. 여기에는 인류를 특징짓는 자연적인 요청도 포함되는데, 우리는 이를 고정되고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게다가 사람은 사는 동안 의사소통을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사회가 제시하는 문화적 특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문화적 특성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수 있는 것인 동시에, 상당한 정도까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이다. 현대 인류학의 원시문화 비교연구 덕분에 우리는 사람의 사회적 행위가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유형, 조직 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됐다. 사람의 운명을 개선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은 인류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에 서로를 멸망시키거나 잔인한 자기 파괴적인 운명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저주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을 만족스럽게 하기 위해 사회구조와 문화적 태도를 어떻게 바꿔야하는가 하고 자문할 때는, 사람이 바꿀 수 없는 특정한 조건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학적 본성은 바꿀 수 없다. 게다가 지난 몇 세기동안 이룩한 기술적, 인류통계적 발전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조건들을 만들어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기 때문에, 노동과 고도로 중앙집중적인 생산 설비의 극단적인 분리는 전적으로 피할 수 없다. 개인이나 작은 집단이 자급자족할 수 있던 목가적인 시대는 영원히 사라졌다. 인류가 생산과 소비의 지구촌을 구성했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된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이제 우리 시대 위기의 본질을 간략하게 지적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사회에 의존한다는 점을 어느 때보다 더 잘 인식하게 됐다. 그러나 개인은 이 의존성을 긍정적인 자산이며 유기적 연관이며 보호해주는 힘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연적인 권리, 한 걸음 더 나아가 경제적 생존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다. 게다가, 개인적인 욕구는 갈수록 강조되는 반면 원래 이보다 약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욕구는 갈수록 황폐해지는 상황이다.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모든 사람은 이런 황폐화에 시달리고 있다. 이기주의의 포로가 된 인간은 불안해지고 외로우며, 순진하고 단순하며 세련되지 못한 삶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다. 사람이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사회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비록 이 의미가 짧고 위험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의 경제적 무정부 상태가 악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앞에는 큰 생산자 집단이 존재한다. 이들은 총체적인 노동의 과실을 강제가 아니라 법적으로 확립된 규칙에 충실해서 빼앗아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산 수단 곧 추가적인 자본재 뿐 아니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총체적인 생산능력은 대부분 합법적으로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단순화를 위해 앞으로 나는 생산수단을 나눠 갖지 못한 이들을 "노동자"라고 부르겠다. 이것이 일반적인 용어사용법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은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위치에 있다. 생산수단을 사용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재산이 될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핵심이 되는 점은 실질 가치로 따진 상품과 임금의 관계다. 노동계약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한, 노동자가 받는 것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실질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최소한의 필요와 자본가의 노동력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데, 이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 숫자와 관련된다. 이론적으로도 임금은 생산한 것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이해해야 한다. (자유 경쟁시장에서는 임금도 일반적인 상품가격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된다는 뜻: 번역자)

 

사적인 자본은 소수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자본가들의 경쟁 때문이다. 부분적으로는 갈수록 심해지는 노동의 분리와 기술개발이 적은 비용으로도 더 많은 생산단위를 만들도록 유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발전의 결과는 사적 자본의 과두정치(독재정치)다. 이는 민주적인 정치사회에서조차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이다. 실질적인 목적 때문에 유권자를 입법부에서 분리시킨 사적 자본가들의 재정지원을 받거나 영향을 받는 정당이 의회를 구성하게 된 이래로 이는 명백한 진실이다. 이 결과는 시민의 대표가 특권 없는 다수의 이해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현재의 조건에서는 사적 자본가들이 피치 못하게 주요 정보원(언론, 라디오, 교육 등)을 직접, 간접적으로 지배한다. 그래서 시민 각자가 객관적인 결론을 얻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현명하게 활용하기는 너무나 어렵고,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다.

 

자본의 사적인 소유에 기초한 경제가 지배하는 상황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첫째로 생산수단(자본)을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며 소유자는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처분한다. 둘째로, 노동계약은 자유롭게 이뤄진다. 물론 이런 관점에서 완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없다. 특히 오랜 힘겨운 정치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조금은 개선된 "자유 노동계약"을 특정한 노동자 집단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현재 경제는 "순수한" 자본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생산은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익을 내기 위해 이뤄진다. 일할 능력이 있고 의사도 있는 사람이 모두 일자리를 얻는 장치는 없다. "실업자 군대"는 언제나 존재한다. 노동자는 상시적으로 실업을 걱정한다. 실업자나 저임 노동자는 이익을 내는 시장을 형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비재 생산은 제한되고 그 결과는 엄청난 곤궁이다. (물건을 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자본가는 생산을 줄이고, 이는 또 다시 가난한 이들이 물건을 사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 번역자) 기술 진보는 노동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업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종종 낳는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연관된 이윤 동기야말로, 자본 축적과 활용의 불안정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심각한 경기 침체의 원흉이다. 무한 경쟁은 노동의 엄청난 낭비를 유발하며, 내가 위에서 언급한 개인들의 사회의식을 불구로 만든다.

 

개인을 불구로 만드는 것은 내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최대 악이다. 이 악 때문에 우리의 교육체계 전반이 고통을 겪고 있다. 과장된 경쟁을 벌이는 태도가 학생들에게 주입됐고, 그래서 학생들은 미래 직업을 위한 성공을 숭배하게 됐다.

 

이런 악을 제거하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은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교육체계를 동반한 이른바 사회주의 경제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런 경제에서는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가 소유하며 계획된 방식으로 이를 활용한다. 생산을 사회의 필요에 맞추는 계획경제는 일감을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분배할 것이고 모든 사람(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에게 생활을 보장할 것이다. 개인의 교육은, 현재 우리 사회의 힘과 성공을 칭송하는 대신에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신장하고 동료들에 대한 책임감을 자신 속에 심으려 시도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 경제가 아직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식의 계획경제는 개인을 완전히 노예화함으로써도 달성할 수 있다.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면 아주 극도로 어려운 사회-정치적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 문제란, 정치, 경제적 힘의 광범한 중앙집중화를 고려할 때, 관료들이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자만해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 개인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관료의 권력에 맞서는 민주적인 평형추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회주의의 목표와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지금 이행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자유롭고 허심탄회한 토론이 강력한 금기사항 아래 억압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기 때문에, 이 잡지(먼슬리리뷰 = 옮긴이)의 창간은 공공에 대한 중요한 서비스라고 나는 생각한다.

 

 

원문은 먼슬리리뷰 (www.monthlyreview.org/598einst.htm) 에 있습니다.

번역: 신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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