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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16 오디오 이야기+ 앞으로 사고 싶은 차종에 대해서
  2. 2013.08.05 오랜만의 파이선 프로그래밍- 랭턴 루프
  3. 2013.07.29 펌)평론이라는 것 (1)
  4. 2013.07.09 펌)개미의 푸가
  5. 2013.07.04 펌)PARC 이전의 컴퓨터 업계
  6. 2013.06.28 v펌)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7. 2013.06.23 펌)빌 조이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8. 2013.06.23 펌)순화원ㆍ순화병원 터順化院·順化病院址
  9. 2013.06.12 펌)상상력 증폭기와 앨런 케이
  10. 2013.06.10 아주 긴 이야기 텐세그리티 (1)
2013.08.16 01:55

오디오 이야기+ 앞으로 사고 싶은 차종에 대해서

오디오 이야기 3:


지금 생각해보면 자동차 컬럼에 오디오 이야기를 적었더라는 ..

예전의 글이다. 


사실은 오디오 평론가들도 오디오 회로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도 한다. 

자동차 평론가들이 차를 오버홀해본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는 둘다 알기는 하지만 유명하지는 않다. 그래도 다 해보기는 해보았다.


예전의 글을 조금 고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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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이야기 - 앞으로 사고 싶은 새로운 차종에 대해서

 

2011년은 필자에게 다사다난한 해였다. 온갖 일들이 발생했다. 아주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작은 일들이 마구 엉키고 흐트러지고 꼬인 해였다. 아직도 남은 일들을 해결하고 있으니 골치 아픈 해는 분명했다. 자동차는 고사하고 오디오를 들을 시간도 없었던 이상한 한해였다. 자금난에 시달린 것 같은데 회계사는 매출이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좋아하던 책도 몇 권 제대로 읽지도 못했고 앰프는 100개 정도 생산해 보려 했으나 실제로는 프로토타입 하나도 더 만들어 보지도 못했다. 프로토타입은 올해 완전히 새로운 토폴로지로  만들었다. 프로토타입은 하나가 추가되었다. 쓰려고 했던 책은 구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튼 이상한 한해였다.

 

차는 별로 몰아보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서 글렌굴드가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 같은 것을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이럴 때는 좋은 앰프가 필요했다. 좋은 앰프는 물론 좋은 소리를 내주는 앰프다.

 

좋은 앰프의 정의에 대해 필자처럼 오랜 세월 장난감들을 만진 사람에게는 일종의 중요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앰프의 주관적인 즐거움이다. 듣는 즐거움인 것이다. 좋은 앰프라는 것은 측정기에서 몇 %의 왜율이 나온다던가 주파수 특성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된다. 가격도 브랜드도 아니다. (싸구려 앰프중에도 좋은 앰프가 있다.) 차라리 앰프를 처음 테스트한 날 그 소리에 빠져 하루 밤을 꼬박 들었다고 한다면 상당히 좋은 앰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앰프들은 몇 종류만 기억에 남는다.

 

좋은 앰프를 찾았다 해도 듣기가 복잡하면 문제가 된다. 예전의 캐리라는 진공관 오디오를 들을 때에는 예열 시간이 필요했고 패스의 알레프도 상당한 예열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간단한 앰프들은 소리가 좋지 않은 경우도 있었고 어떤 앰프는 너무 부피가 컸다. 간단하며 소리가 상당히 좋은 오디오는 몇 종류가 되지 않았다. 첫 번째 테스트인 하루 밤 동안 듣기 테스트가 끝나면 긴 세월 동안 비슷한 성향의 몇가지 앰프들과의 경쟁이 남아있다. 물론 이들은 모두 좋은 앰프에 속한다.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그중에 하나를 열심히 듣게 된다.

 

가끔은 차에 대해서도 이런 기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관적인 즐거움이 제일 중요하다. 사람들이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차라는 것이 몇 년이 지나면 갈아 주어야하는 타고다니는 무엇이 되었고 오래된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비싼 취미라는 것을 일부 사람들은 알기 시작한 것 같다. (차를 바꿀 여유가 없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차들은 차를 몰 때 주관적인 즐거움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주관적인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키워드이며 차의 존재이유다. 예전에는 명차라는 딱지가 붙은 차들이 있었고 가격이 비싸지 않더라도 분명 특별한 차들이었다.

 

오디오를 생각해보면 일본에 있는 어떤 오디오 샵이 생각난다. 계측기로 가득찬 방에서 일본의 장인은 자기가 오디오를 고쳐주기는 하겠지만 시간과 돈이 많이 들며 고쳐지는 시간은 때로 기약이 없을 수도 있다고 홈페이지에 적고 있다. 예전에 뮤지컬 피델리티 A1-X 를 고치기 위한 자료를 모으면서 필자는 이 가게의 홈 페이지를 방문했다. ( http://amp8.com 또는 http://amp8.com/english/index.htm ) 주인은 Amp Repair Studio 라고 가게를 소개한다. 자기가 좋아하던 앰프를 고치기 위해 가게를 들러 맞기고 수리할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분명히 이 가게는 오랜 세월 영업하고 있다. 그것도 수리한 앰프들의 사진을 차트처럼 올리면서 글을 적어가면서. 잘 듣다가 문제가 생긴 앰프 , 회사의 AS 라인에서도 빠져버린 앰프 그리고 남들이 고치지 못한 앰프. 이들을 수리하는 장인만큼이나 맡기는 사람들도 신기했다. 수리하는 앰프중에는 그다지 비싸지 않은 앰프들도 꽤 많이 있다. 하지만 주인에게는 중요한 장비다. 집착인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런 장사가 가능하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꼭 그 앰프의 소리를 오래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야 가능한 장사이고 적어도 진정한 마니아들이 기종마다 몇 명은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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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신이 없는 상황이지만 오디오를 만들고 듣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 오디오뿐만 아니라 “만들기”의 주제로 많은 일들을 되돌리고 있다. (미국의 makezine처럼 “안윤호의 만들기” 라는 책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필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전자광이었다. ) 요즘 만드는 오디오들은 거의 10W 정도의 앰프들이다. 10W 정도에서 높은 해상도를 갖는 앰프를 만들고 있다. 해상도를 높이려면 많은 경우 클래스 A 라고 하는 높은 바이어스 전류를 흘리는 앰프가 되고 만다. 아날로그중의 아날로그인 리니어 회로의 세계다. 트랜지스터나 진공관 몇 개의 구성으로 회로구성을 해결한다. 효율은 별로 좋지 않아서 2CH 10W를 만들려면 소비전력 100W가 필요한 식이다. 크렐(Krell)처럼 100W의 클래스 A 출력을 내는 앰프는

 

취향이 변한 상태에서 마음 편하게 들으려면 10W 나 20W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소리의 질을 따지지 않으면 클래스 A 앰프의 토폴로지들은 의미가 없다. (일반적인 앰프들은 클래스 B 나 AB 라고 부르는 더 적은 바이어스 회로다.) 10W 가 작은 출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아파트 같으면 밑에 집에서 뛰어 올라올지도 모르는 소리다. 한국처럼 좁은 나라에서 집단 거주 형태를 취한다면 앰프에 붙어있는 100W 나 300W 같은 것은 불필요한 수치다. 이런 상황에서 출력의 경쟁보다는 소리의 품질에 더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필자의 생각은 그렇다. 작고 소비전력도 적당하고 무엇보다 소리가 좋아야 한다. 예전과 바뀐 점이다. 운여에 무리가 없고 편하려면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스펙에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10W 급의 섬세한 앰프를 만드는 오디오 회사는 없다. 20W 앰프 역시 별로 없다. 사람들도 이런 오디오를 찾지 않는다. Sugden 이나 뮤지컬 피델리티 같은 회사의 제품군중에 몇 개가 해당된다. 가격이 싸지도 않다. 진공관 시절에는 출력을 낼 수가 없어서 앰프의 소리가 작았고 회로나 부품들도 별로라서 10W 정도의 출력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금은 1KW 도 낼 수 있지만 이 소리는 웬만한 집에서는 들을 수 없는 크기다. 현실이나 일상은 항상 제한을 건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앰프들을 만들어 보게 되었다. 만들다보나 8W 출력의 히라가 몬스터 같은 앰프를 만든 적도 있다.

 

자동차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예전의 40마력이나 50마력의 차들이 주종이었던 시절이나 200마력도 작게 느껴지는 지금이나 도로의 주행은 별로 바뀌는 것이 없다. 요즘의 차들은 예전의 레이싱 카보다 더 스펙이 좋지만 주행은 변한 것이 없다. 도로에서 빠르게 달리지도 못한다.

 

전기비와 주거의 제한 때문에 앰프에서 10W정도로 만족해야 한다면 실제의 연료비(요즘 동네 주유소는 가솔린이 리터당 2300원대가 적혀있다.)나 주거 공간을 생각해서 자동차들의 진화를 생각하게 된다. 필자가 몇 년 전에 적었던 고연비 디젤들의 출현은 요즘 필연적 현실이 되어가고 있지만 필자는 한번을 더 생각하게 된다. 차들의 출력이나 사이즈가 지금보다 더 착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경제의 불안정성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낙관적이지 않다면 분명히 한 번의 진화경로를 더 만나게 된다. 고연비와 다운사이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주행의 질과 차의 특별한 그 무엇을 같이 생각해야 하는 시기가 된 것 같다. 경제적이되 주행의 즐거움도 커야 한다.

 

제한이 늘면 선택의 폭은 제한된다. 제한이라고 할 수 있는 고정 지출 비용이 늘어나자 소득이 늘어나도 예전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차에 대한 지출이라고 할 수 있는 연료비 같은 것은 차의 크기나 무게 같은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요즘은 기름을 많이 먹는 SUV 나 밴같은 차들의 인기가 없다. 커다란 세단도 돈을 거리낌없이 쓸 수 있는 사람들에게나 관심의 대상이다. 프리미엄 차량이라고 해도 좋은 연비를 광고해야 한다. 300C 같은 차들도 연비가 18Km 대라고 광고하는 것을 보게된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소비자들은 고연비 차량이 무엇인지 배워가고 있다. 매스컴에서 몇 년동안 터보 디젤 소형차량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이 학습하고 있다. 기대하는 연비는 얼마 후 리터당 10Km 대가 아니라 20Km 대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행의 감각은 좋아야 한다. 디자인도 중요하다. Fun 의 감각도 있어야 한다. 편리하기도 해야 한다. 효율이 높ㅇ은 DSG 같은 것은 기본이며 구름저항이 적은 타이어의 장착도 기본이며 지금처럼 폭이 무턱대고 넓고 편평비가 큰 타이어들은 사치가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기본기가 튼튼해야 한다. (어쩌면 일본의 회사들이 이런 차들을 출시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차들은 깊은 내공이 있다.)

 

사실 이런 차가 있으면 한 대 사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필자의 생각도 예전의 랠리카 같은 차들을 타고 시내주행 연비가 5km 대인 때가 있었는데 요즘은 20Km에 근접하는 재미있는 차가 있으면 한 대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변한 것이다. (가솔린의 연료비가 1000원대 초반에서 2300원대까지 오른 것이 중요한 변화다.) 도로에서 재미있고 주관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필자의 자동차 고아원을 조금 더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더 떠오르곤 한다. 이제 출력에는 별로 연연하지 않을 것 같으니 변화의 세월인지도 모른다. 이제 달리기가 아니라 주행이라는 목적에 충실한 운전자가 되어 가는 것 같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대치동 언덕들을 최고 가속으로 올라가는 일은 점차 줄어들 것 같다.

 

다시 오디오와 매치 시켜본다면 새로운 앰프들이 필자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과거의 장비들은 몇 개만 기억 비슷한 것으로 남겨놓고 처분할 것이 틀림없다. 그러면 필자의 창고에 있는 야마하나 Grundig 같은 앰프들은 모두 없어진다. 메이커가 매니아가 아닌 사람들에게 고연비 + Fun 을 납득시킬 수만 있으면 수요는 많을 것이고 어쩌면 우리는 이런 트렌드 위에 있는 지도 모른다. 40마력이나 50마력이라도 아니면 타협을 해서 100마력 이하라도 만족하게 된다면 미니멀리즘의 차들이 돌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경제 사정이 조금만 더 나빠진다면 사람들의 욕구와 경제성과의 근본적인 타협이 나올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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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18:44

오랜만의 파이선 프로그래밍- 랭턴 루프

이번에는 0.1로 올라간다. 글을 조금 고쳤다.

이글은 버전 0.0이다.


요즘은 블로그 보다는 페이스 북에서 논다. 

원래 페이스북에다 마구 낙서를 하면 안되지만 페이스북에 도배를 하고 있다.  내 페이스북 계정은 https://www.facebook.com/yunho.an.5 다.


크리스 랭턴이라는 미국의 학자가 있었다. 

상당히 괴짜였던 사람으로 베트남전 당시 병역거부의 전력도 있고 33세의 나이에 대학원에 진학하여 거의 10년간 대학원생으로 지냈다. 

랭턴은 애플 II를 가지고 세포자동자를 연구했다. 

랭턴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폰 노이만의 오토마타 , 스스로 증식하는 오토마타였다.

랭턴의 루프라는 것은 "자가 증식 가능한 최소한의 오토마타"라는 것으로 폰노이만과 codd의 계보를 잇는 매우 중요한 성과다.

인공생명학회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랭턴의 세포자동자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명백한 오토마타다. 

랭턴에 대해서는 스티븐 레비의 인공생명이라는 훌륭한 책이 있다. 


요즘 책을 읽다가 보니 동작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간도 없고 해서 원래는 인공생명 코딩을 golly에서 구경만 하기로 했다.   10여년 이상 넘게 개발된 패키지다.


그런데 코드를 만들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아 cage를 보기로 했다. cage는 파이선으로 만든 패키지다. 

cage는 다 좋은데 하나의 문제가 ncurse 라이브러리를 쓰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텍스트는 조금 갑갑한 것이고 익숙하지 않다. 


뒤지다 보니 일본 사이트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http://aidiary.hatenablog.com/entry/20120121/1327144080


설명이 잘되어 있다기 보다는 깔끔한 사이트다.  여기에는 몇개의 예제가 있다. http://aidiary.hatenablog.com/entry/20080507/1269694935 에 있는 내용의 일부다.


여기서는 pygame으로 그래픽으로 그림을 그린다.  


pygame을 사용하는 것은 일본 친구들이 하는 것을 따라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은 http://aidiary.hatenablog.com/entry/20080503/1275693559 에 있는 내용을 따라해본 것이다.



먼저  pygame을 설치해보자. 

pygame은 http://www.pygame.org/ 에 있다.

아무래도 그림만 보는 파이선 보다는 이게 더 재미있을 것이다.


 pygmae 문서화는 잘 되어 있는 것 같다. http://www.pygame.org/docs/


우선 파이게임을 다운로드 한다. http://www.pygame.org/download.shtml

파이선 버전별로 있어서 조금 혼돈스럽기도 .. 안드로이드 버전도 있다. 소스코드도 있다.


opengl 설치의 문서는 조금 다르다.  사이트에서 설명한 것처험 

ezsetup.py로 pipy에서 다운 로드 받는 방법이 맞다. 조금 와일드한 명령이라고 본다.


사이트의 설명에 나오는 glut의 마지막 업데이트 시기는 2001년이다, 별 문제 없이 쓸 수 있었다.


pyopengl은 그냥 다운 로드 받으면 된다.http://sourceforge.net/projects/pyopengl/files/


이 스크립트를 이용하면 게임창 하나를 만들 수 있다. 빙고..http://aidiary.hatenablog.com/entry/20080503/1275694192

헬로월드 프로그램도 잘 된다.http://aidiary.hatenablog.com/entry/20080504/1275694644


잠깐 쉬고 

점심을 먹고와서 랭턴의 코드를 pygame을 이용해서 돌려볼 수 있었다.
라이프 게임보다 랭턴루프는 훨씬 복잡한 편이다. 

pygame이 아주 훌륭한 프로그램은 아니고 pygame이 시스템에 주는 부하도 높은 편이지만 이걸로 게임 비슷한 것을 만들수도 있다는 점은 대단히 기쁘다. 

아까 오전에 끄적거렸던 pygame 위에서 프로그램을 돌렸다.

http://aidiary.hatenablog.com/entry/20120121/1327144080


이제 코드가 돌아간다. 

코드의 분석은 평이하니 다음번에 .. 오히려 오토마타가 더 어렵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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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9 03:55

펌)평론이라는 것


예전에 쓴 글이다. 제목은 평론이라는 것


평론이라는 것<1>
'명기'라는 족보 붙으면 기계의 운명 바뀌어
2009년 07월 16일 (목)의사신문  webmaster@doctorstimes.com

필자는 한때 오디오에 빠져 산적이 있었다. 많은 오디오들을 사고 바꾸고 만들기도 했다. 그중에는 한때 명기라고 부르는 것들도 있었다. 명기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우선 명기라는 족보가 붙으면 기계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다. 대부분의 기계와 마찬가지로 오디오들의 운명은 거의 대부분 버려지는 것이다. 앰프나 CDP는 전자기계로 폐기되거나 스피커처럼 생활쓰레기로 파기되는 것이 운명이다.

일반적인 기계들에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명기라는 족보가 붙어버리면 수명은 아주 길어진다. 그리고 기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면 오랫동안 장터에서 소중하게 거래되기도 한다. 차량도 마찬가지지만 오디오는 종류와 범위가 더 다양하다. 평가의 잣대도 더 제멋대로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도 힘들다. 

몇 주전부터인가 그동안 모았던 기계들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사놓고 듣지를 않는다는 것이고(제일 많이 음악을 듣는 기계는 여전히 PC에 물려있는 싸구려 Britz 스피커다) 그 다음은 장소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이고 그 다음의 이유는 DIY AUDIO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예전에 기계들을 다양하게 모았던 이유는 비교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모으기 시작한 이유는 누군가가 이 기계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 좋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누군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보고 구한 것보다는 인터넷의 평론을 참조한 것이 더 많았다. 오디오 잡지와 숍들이 고전하는 경우는 거래와 소개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들을 많이 닫고 말았다. 

고생해서(사러 아주 멀리까지 간 적도 있고 무거운 스피커를 옮긴 적도 있다) 모았던 물건들을 체계적으로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거래는 하나씩 마지막으로 평가하고 버려야 했다. 그 중에 하나는 마샬전자의 M-124라는 스피커였는데 없애야 할 것인지를 놓고 한참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명기 리스트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 스피커지만 이 싸구려 스피커가 내는 소리는 정말 특이했다. 국악과 가요를 듣고 있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내는 스피커였다. 고음은 약간 째째거리고 저음은 쿵쿵 울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급스피커와는 거리가 먼 소리를 내는 스피커라고 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스피커의 가격은 정말 싸다. 다만 구하기가 어렵고 상태가 좋은 것은 더 그렇다. 

내치기는 싫었지만 다른 스피커를 들을 시간과 공간도 만들어야 했고 무엇보다 모든 스피커와 앰프를 다 들을 수도 없다. 정말이지 하루에 느긋하게 오디오를 켜놓고 1∼2시간 음악을 들을 여유는 큰 사치에 속한다. 애들이 있으면 큰 소리로 들을 수도 없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M-124를 없앨 무렵에는 정말 기묘한 거래들을 많이 했다. 바로 전에는 MD-2200이라는 인켈의 파워앰프(저렴한 명기에 속하는 앰프)와 PRO-10이라는 스피커를 처분했다. 가격은 역시 착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든 몇 안 되는 걸작들이다. 이들도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보관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다른 사람이 이 골동품을 들을 기회도 주어야 한다. 아무튼 M-124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조여지는 소리를 낸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 튜닝한 소리로 알려져 있었다. 

이 스피커를 없애면서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가져가기만을 바랬다. 무엇보다도 잘 듣지 않지만 이 이상한 기계의 좋은 주인을 찾아주고 싶었다. 이 스피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 

가격은 거의 거저에 가까운 값으로 정했다. 설명은 일부러 약간 시큰둥하게 적었다. 그래야 아는 사람이 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터에 올리자마자 멀리 아산에서 누군가 사겠다고 바로 연락이 왔다. 그 스피커를 잘 아는 사람인 듯 했다. 유닛은 완벽하지만 통은 약간의 수리를 요하며 잘 아는 사람이 구매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바로 다음날 올라오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약간 열정이 지나친 편이다. 

다음날이 되자 구매자는 아산에서 출발했다. 만나서 스피커를 보여주자 스피커의 콘지 재질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의 유저가 아닌 듯 했다. 이 작은 콘지는 세라믹이며 다른 기종 M-165는 파이오니어의 콘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스피커는 정말 꽉 조여지는 소리로 튜닝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구매자는 유명한 오디오 평론가였던 김종룡 님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김종룡 님은 책도 몇 권 썼는데 최근의 유명한 오디오 책은 `HIFI 명기백선'이라는 책이다(책소개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1428575). 오디오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책에 나오는 오디오들을 다 들어보고 나서 사진과 설명을 적었다. 회심의 역작이기도 하다. `카오디오 길라잡이'라는 책도 썼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세기의 명차'라는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오디오 회사의 고문을 두루 거쳤다. 안 들어본 오디오도 별로 없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젊었을 때 개발팀으로 참여했던 스피커, 20년도 넘은 낡고 허름한 스피커 소리를 듣고 싶어 멀리서 달려온 것이었다. 희한한 인연으로 스피커는 정말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마샬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스피커 개발회사였고 경영상태가 좋았다면 지금은 명기에 준하는 스피커들을 만들고도 남을 회사였을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대화의 일부다. 

- 이 스피커는 어떻게 튜닝했는가? 왜 이 스피커를 명기라고 생각하는가? 

-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한 개발의 노력이다. 콘지나 코일은 이런 특성을 내기 위해 다른 스피커의 유닛들을 분해해 보기도 하고 더 개선해 보려고 노력했다. 튜닝을 위한 특별한 기계는 없다. 사람의 귀가 최후의 판정을 내린다. 이번에 사려는 기계는 그 노력의 최고라인에 속하는 몇 개의 스피커 중의 하나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무 것도 없던 것에서 무엇을 만들어내야 했던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일본이 유럽의 스피커들을 벤치마킹 했던 노력 이상으로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하이파이 시장은 성장을 거듭하는 중요한 시장이었다. 정말 필사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독자적인 소리를 만들었던 이 상황은 타고난 글재주를 가진 김종룡 님의 표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이 변한다. 필자의 둔탁한 표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평론가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마샬의 스피커 사운드 기술력은 주로 외국산 유명 스피커와 스피커 시스템을 분석해 모방하면서 그 기술적 결과들이 쌓여져 만들어진 것이지만, 당시 마샬 내의 음향 엔지니어들의 뼈를 깍는 고통의 연구 개발 노력으로 진정한 한국적 감성의 사운드가 만들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분 좋은 탄력의 맛좋은 사운드, 우수한 고음의 감칠맛 나는 살랑거림과 두텁고 안정된 톤의 호소력 넘치는 중역감 그리고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끈적끈적한 찰기를 가지는 탄력적 저음의 매력, 바로 이러한 것들이 과거 마샬 사운드의 핵심이자 특징이었습니다. 이 때의 마샬 사운드는 분명 한국인의 가슴을 가장 잘 파고드는 한국적 감성의 한국의 스피커 사운드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마샬 하이파이 사운드의 최고의 정점은 모니터 시리즈의 완성작인 4웨이 스피커 시스템인 M165시스템에 모두 담겨져 이룩된 바 있으며, M124, M104의 4웨이 시스템 라인 업 역시 과거 한국 최고의 사운드라 하겠습니다…. 세계 유수의 브랜드가 난립되어 어지러운 하이파이 스피커 사운드의 세계에서 한국 스피커 사운드의 존재와 위상은 대단히 위축된 감이 많습니다만, 또한 신세대 새로운 한국의 스피커 브랜드들이 그저 유명 외산 고가 유닛을 무분별 수입하여 졸속의 하이엔드 스피커 사운드를 너무도 손쉽게 만들어내는 요즘의 세태이지만, 한 번쯤 진정 한국인의 숨결을 담고 한국인만의 끈끈한 질감을 담은 명실상부한 한국 스피커 사운드의 존재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잠시 동안의 청음을 같이하고 대화를 나눈 후 다시 떠나는 이 신비로운 구매자에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많이 떠들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작업실로 찾아 더 배우고 싶노라고 인사를 한 후 잠시 생각을 했다. 좋다는 오디오를 다 들어본 평론가가 소장하고 싶어 바로 서울로 올라올 만한 스피커가 이런 저렴한 기종이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출력이나 수치는 그야말로 수치에 불과하다. 가격은 나중에 크게 올라갈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 이상한 스피커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를 싫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법에 가까운 소리를 들려준다. 듣고 싶어하는 소리는 분명 따로 존재한다. 약간 째째거리는 소리 속에 꽉 찬 느낌 그리고 강한 저음을 듣고 있노라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필자는 그 느낌이 두렵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오디오이고 어떻게 보면 나쁜 오디오다.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계측기조차 별로 쓸만한 것이 없던 시절 귀와 몸으로 튜닝했던 당시의 스피커들 가운데 몇 개는 감성이라는 것이 유일한 계측기라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강한 바이어스를 심어주는 평론가는 특별한 존재다. 평론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스피커를 판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을 정도다. 

자동차에 대해서도 평론가들의 강한 입김이 존재한다. 이들의 설명을 듣고 역사를 듣고 있으면 그 일부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해 보이는 차에 대해서도 좋은 설명을 듣다보면 강한 바이어스가 되고 나중에는 고객 충성도로 변하며 일부는 평생 소장하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중에는 정말 특별한 것들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감성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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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9 10:29

펌)개미의 푸가

오늘도 또 퍼온다. 

10년전 내가 쓴글을 또 퍼다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벼로 10년 동안 좋아진 것이 없다는..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 아마추어 커널 해커 )   2004/05/06 

'푸가'란 둔주곡이라고도 불리는 독립적인 여러 개의 곡으로 구성된 음악을 말한다. 단편 <개미의 푸가>는 푸가를 전체구조로 들어야할지 부분의 합으로 들어야 할지에 대한 게와 개미핥기, 거북이의 논쟁을 통해, 시스템 내의 계급집단의 형성과 변동에 대한 논리를 펼쳐 나간다. 너무 생물학적 이야기같은가? 그러나 생물학과의 퓨전 현상은 컴퓨터 역사의 초기부터 시작된 해묵은 주제였다.
필자는 2번에 걸쳐 「루시퍼 원리」와 「집단정신의 진화」와 같은 책들의 예를 들어 집단적인 질서가 일어나는 사례를 들어 보았다. 사실 누군가의 기획이나 설계가 없이 무작위적인 힘을 바탕으로 질서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도처에서 보면서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어디엔가 모든 것을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는 주장과 그런 존재는 없다는 주장의 충돌과 같은 것이다. 절충적인 의견으로 창조자는 있기는 해도 초기 조건인 창조의 단서와 법칙만을 제공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른바 무책임한 신으로서의 존재이다.

필자가 소개했던 이 두 권의 책은 자기조직형 발전의 원리를 다룬다. 집단의 자기조직과 발전의 원동력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학과 역사를 넘나드는 저자 하워드 블룸은 선동적인 문체와 놀라운 편집력으로 많은 문헌들을 짜깁기로 꿰어 맞추는 예를 들어가며 자신의 논리를 요약하는 ‘묘기’를 보여 주었다.

간단한 오토마타처럼 움직이는 작은 개체들로부터 만들어지는 조직의 집단적 정신활동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것이며 밖에서 볼 때 폭력적으로 비추어지는가에 대해서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작은 화두를 제공했다면, 필자의 엉성한 짜깁기 역시 일정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너무 생물학적인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컴퓨터와 전자공학의 역사에서 생물학과의 퓨전 현상은 컴퓨터 역사의 초기부터 시작된 해묵은 주제였다.

사이버네틱스 
만약 독자들이 기회가 되어 「사이버네틱스와 사회」라는 노버트 위너의 기념비적인 글을 읽게 된다면 필자가 말하는 것보다 더 사회적이고 생물학적인 주제의 글을 읽게 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60년 전에 발표된 위너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개념에서 요즘은 사이버(cyber)라는 접두어만 남아 사람들이 사이버라는 단어를 컴퓨터와 연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이버라는 단어는 조정(control)이나 키잡이(steer)와 같은 의미를 갖는 그리스어로부터 노버트 위너가 만들어 낸 것이다. 사이버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그리스어의 Kubernetes라고 한다)이며, 정치적인 장치를 말하는 정부(government) 같은 단어들이 아직도 쓰이고 있다.

하나의 통신체계로서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위너 자신이 현대 통신이론과 정보이론의 창시자라는 당시의 역할과도 통한다. 위너는 사이버네틱스의 적용을 간단한 기계 시스템부터 사회의 정치문화 체계에까지 밀고 나갔는데 그의 예측은 당시로서는 사람들이 실감할 수 없는 내용이 많았다.

위너는 말년에 「신과 골렘」이라는 책을 통해 로봇에 대한 어두운 견해들을 적기도 하였다(골렘은 동유럽에 전해 내려오는 유태인들의 전설로 어느 랍비가 진흙에 생명을 불어 넣어 만든 일종의 로봇이다). 뿐만 아니라 위너는 그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던 메멕스(memex)라는 기계가 나오면 거대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예측을 포함하여 기계 대체에 의해 노동력이 남아도는 잉여현상에 대해서까지 사회와 기술의 연계에 대해 중립적이지만 서슴없는 발언을 했다.

메멕스는 배너바 부시가 고안한 기계로 몇 명의 몽상가들의 계보를 거쳐 오늘날의 으로 발전했다. 웹을 만든 팀 버너스리 역시 자신이 부시의 메멕스와 하이퍼링크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필자가 이전의 컬럼에서 다루기도 했던 더글라스 엥겔바트나 앨런 케이 역시 부시의 메멕스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메멕스는 사람들의 기억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부시는 말했다. 오늘날 메멕스의 후손인 웹 역시 사람들의 기억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메멕스의 핵심은 기억과 자료의 공유이다. 그리고 기억의 교환은 곧 통신이기도 하다.

집단적 기억과 집단적 무의식의 공유 같은 것들이 무엇인가 사람들의 능력을 강화해 줄 것이라는 것이 부시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나면 남는 것은 기억 밖에 없기 때문에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바로 정보처리의 핵심이다. 불필요하거나 미약한 정보는 기억에 남지 않는다. 개인이나 집단의 자기 정체성이라든가 보복행위, 그리고 집단적인 행동을 위한 시그널과 공통된 신호전략은 기억과 기억의 자기복제에 의해 만들어진다.

기억이 없다면 이런 행동들은 아예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독자들 중 컴퓨터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기억이라는 것이 작은 딜레이 라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컴퓨터 역사에서도 작은 수은을 이용한 몇 백 바이트의 딜레이 라인이 개발되어 과거의 상태를 보존할 수 있게 되면서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 회로가 구현되기 시작했다. 이 장치를 처음으로 구비한 EDSAC이라는 컴퓨터를 최초의 프로그램 내장식 컴퓨터로 보는 것은 최초의 컴퓨터인 애니악(ENIAC)이 현재의 상태를 보관하기에는 너무 작은 기억(memory)밖에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뒤를 이은 초창기의 컴퓨터에 사용된 오토마타 회로들은 1비트에 진공관을 2개 정도 사용하는 플립플롭이나 자석으로 만든 작은 코어에 저장되어 이전의 정보인 과거를 기억하면서 현재의 정보를 이용하여 그 다음 상태로 이동한다. 얼마 후 SRAM과 DRAM이 개발되었다.

테이프에 기억된 기억을 이용하는 가상의 튜링 머신이든 종이테이프에 1바이트씩 저장하는 방식이든 요즘처럼 RAM이나 디스크에 몇 GB를 이용하든 그 본질은 변함이 없다. 디지털 이전의 아날로그 장치에서도 딜레이 라인은 중요한 장치였다. 아날로그 회로의 샘플 앤 홀드(SH : Sample & Hold)도 딜레이 라인에 속한다. SH는 신호처리에서는 나오고 또 나오는 장치이다.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주제는 시스템의 연구였다. 사회나 기계장치를 막론하고 하나의 시스템은 메시지의 교환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연구함으로써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위너의 의견이었다. 기억이든 액튜에이터(actuator)든, 아니면 정치 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이든 이런 것들을 모두 다 사이버네틱스의 기치 하에 통합해 보려던 위너는 생전에 자기 주위에 많은 연구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MIT와 국방성의 지원 하에, 그리고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인 위너 자신의 명성으로 많은 걸출한 사람들이 결집했다. 도대체 사이버네틱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모를 만큼 다양한 연구팀이 만들어지고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으나 위너는 얼마 후 타계했다.

위너의 사후에 사이버네틱스라는 이름을 달고 연구하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는 하였으나 생물학이나 생리학과 전자기술을 접목하고 실제로 이를 비교 연구하던 자료와 전통은 없어지지 않았다. 사이버네틱스가 인공지능(AI)이나인공생명(AL)의 영역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더라도 많은 통찰과 비유가 사이버네틱스의 초기 멤버들 사이에서 탄생하였다.

사이버네틱스팀이 처음에 힌트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생물이었다. 제어공학이나 다른 엔지니어링 영역에서 수많은 수식과 이론들로 뒤덮여 버린 복잡한 이론들은 많은 부분이 생물학적 영역의 간단한 관찰에서 출발했다. 초기의 사이버네틱스에서 발전하고 나중에 로봇 연구의 중요한 부분이 된 서보나 목표추적 장치 같은 것도 초기에는 생물의 모방에서 출발했다. 이들로부터 현대의 전자공학과 컴퓨터 응용의 중요한 유전자가 형성되었다.

실제 세계에서는 정보만 처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정보를 위한 센서와 처리 그리고 정보를 현실에 보여주기 위한 수단인 액튜에이터는 바로 생물의 행동을 따온 것이다. 위너는 강연이나 저술에서 피드백 제어장치의 동작을 새끼 고양이가 공을 잡는 동작에 비유하곤 했다. 로봇이나 제어공학의 초기에 가장 중요한 주제였던 서보 제어기라든가 피드백 제어 이론 같은 것이 1950년대에 국방성이나 업계의 후원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생물학과의 컨버전스 
최근의 와이어드(www.wired.com) 잡지를 보면 IT 산업이 추구하려는 변화 같은 것이 보인다. 와이어드 12월호를 보면 미국 IT 산업의 새로운 인력이 인도로부터 지속적으로 유입된다는 소식과 나름대로 많은 분량을 들여 생물학의 컨버전스를 추구하는 영역이 하나의 비즈니스로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에 대해 적고 있다.

12월호에서는 일종의 작은 특종으로 생물학과의 새로운 컨버전스를 찾고 있다. 몇 명의 필자들이 적은 기사에서 첫 번째 부분은 바이올로지 분야와의 급격한 유사성으로 새로운 시장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시스템의 특징을 적고 있다. 필자의 글을 읽은 독자들은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들었던 내용들인데 창발(emergence), 자기조직성(self-organization), 재생산 또는 번식(reproduction), 그리고 공진화(coevolution)에 관한 내용이다.

두 번째 부분은 NASA에서 새로운 형태의 안테나를 리눅스 32대를 이용한 유전자 알고리즘으로 설계했는데 기존의 안테나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매우 좋은 성능을 갖는 안테나를 만들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이 시스템은 안테나를 만드는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유전자형(genoype)을 생성하고 유전자형을 표현하는 부분인 안테나의 디자인에 해당되는 표현형(phenoype)을 각기 구현하고 설계했으며 실제로 새로운 위성에 적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스팸 메일을 걸러내는 유전자 알고리즘 적용의 스팸 필터와 아예 보안을 위해 운영체제에 면역 체계의 개념을 일부 도입한 리눅스의 변종인 NITIX에 대한 예를 들었다. 혁신적인 차량 설계에 에이전트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예도 소개했다. 짧은 분량이기는 하나 어쩌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업계의 사람들을 자극하는 기사라고 할 수 있겠다.

컴퓨터와 생물공학 기술이 모두 빠른 속도로 발전하자 이들은 서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사들은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몽상가들의 머리 속에만 있던 내용들이 점차 실제의 생활에 도입되게 될 것이다.

수억 년간 협동과 진화를 통해 만들어진 생물체의 놀라운 성능과 적응력은 엔지니어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아예 바이오미메틱스(biomimetics)라는 생물체 따라하기의 분야가 있을 만큼 생물들은 배울 점이 많다. 생물체로부터 기계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자는 시도이다. 사이버네틱스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고 할 수 있는 로보틱스의 일부 분야에서도 생물의 모방이나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필자가 최근에 정말 재미있게 읽었던 「로보사피엔스(Robospaiens)」라는 책은 최근의 유명한 로봇 연구자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책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강렬하게 끌었던 부분은 생체모방 로봇(biomimetics robot)이었다. 과거에는 거의 사이비 과학에 가깝다고 보았던 바이오미메틱스는 요즘에야 사람들이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중에서도 간단한 곤충이나 작은 파충류 수준의 로봇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다. 무엇인가를 발전시키려면 비교적 단순한 형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런 로봇들은 아직은 쓸데가 없겠지만 만지작거리다 보면 많은 것을 알려줄 것처럼 보였다.

미생물이나 곤충은 사실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최종적 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움직이는 센서라든가 보안 장치이기도 하고 가장 저렴한 비용과 에너지 소모를 갖는 거의 최적의 형태이다. 또 주위 환경 네트워크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런 곤충을 닮은 장난감 같은 로봇들이 헐리우드 SF 영화에 많이 나오다 보니 신비로운 느낌이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곤충을 닮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임베디드 장비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이다.

방구석을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는 고도의 정보처리 장치가 없어도 장애물을 피하며 몸집에 비해 정말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바퀴벌레는 컴퓨터와 모터가 없지만 수백 개의 작은 근육과 스프링과 같은 발로 엄청난 제어능력을 발휘한다. 탄성이 있는 다리 그 자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는 제어기인 셈이다.

간단하지만 내장되어 있는 작은 기능을 이용하여 기계적인 제어를 일으키고 다른 신경 부분은 별로 관여할 필요가 없으며, 성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적당한 동작을 그때마다 일으킬 수 있다. 바퀴벌레는 적은 수의 신경절을 이용하여 장애물을 통과한다. 발걸음 하나마다 거대한 산수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이런 간단한 디자인 개념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수의 바퀴벌레가 폴리페달연구소(polypedal.berkeley.edu)에서 해부되고 전극을 꽂은 채 연구 테이블에 올랐다. 폴리페달연구소 같은 그룹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바퀴벌레의 움직임에서마저도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학자들의 학문적 배경이나 취향에 따라서도 서로 완전히 다른 접근법들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바퀴벌레의 주행방법도 연구팀의 숫자 또는 그 이상이다. 어쩌면 더 복잡한 것들은 아직 무리일지도 모른다.

로봇들이 흔해지면서 간단한 아날로그 동작만으로도 생존성이 높은 로봇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마크 틸든의 스파이더(Spyder) 같은 것도 새로운 통찰이라면 통찰일 것이다. 버려진 전자장치의 부품과 작은 PIC 프로세서만을 사용해서 걸어다니는 로봇을 만들어 사람들을 경악시켰다(틸든의 비슷한 다른 로봇을 포함하여 회로나 프로그램까지 공개되어 있다. 특허로 보호되고 있긴 하지만).

곤충 비슷한 것이 비교적 간단하게 구현되고 매우 인상 깊게 남는 예로 로드니 브룩스의 포섭 구조(subsumption architecture) 형태의 초기 로봇들이다. 80년대에 구현된 그의 로봇들은 생물처럼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고 관절이나 근육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동작에 관한 처리를 했다. 당시에는 주위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해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무시받던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곤충 로봇을 만들었는데 이 로봇은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아틸라(Atilla)와 징기스(Ghenghis)라는 이름의 이들 초기 로봇은 환경이 바뀌어도 새로운 프로그래밍 없이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NASA의 탐사로봇의 설계에도 반영되었다. 아무튼 그전까지는 매우 어렵다고 여겨졌던 설계들이 생물학적인 영감을 조금 받는 것으로도 쉽게 구현될 수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이 살짝 보였으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시스템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생물계에는 흔하게 존재하는 소모품에 가까운 간단한 구성물들로 만들어지고 먹고 사는 생태계 시스템에 스스로 편입되는 자기조직적 시스템들은 오랜 진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스템은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이다. 공학자들이 이러한 디자인들에 대해 겨우 눈을 뜨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이다. 사람들의 관점이 바뀌면 세상이 바뀌게 된다고 한다.

개미
개미와 함께 일생을 살아온 곤충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그의 저서 「사회생물학」이나 「개미」같은 책으로 유명하다. 행동생물학과 개체군생물학에 바탕을 둔 윌슨은 개미를 연구하며 일생을 보냈다. 행동생물학의 중요한 이론중 하나는 생물의 어떤 행동은 원자 단위로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본능적인 행동으로 먹이나 신호에 대한 생물의 반응을 보인다. 이 반응에는 실수가 없어야 하며 학습의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전적인 것이며, 컴퓨터의 펌웨어도 마찬가지다.

반면에 개체군 생물학은 개체군의 집결과 확산, 그리고 성장, 소멸 등을 인구통계학적 방법인 수학적 모델로 분석한다. 윌슨이 그의 동료인 휠도블러와 함께 개미와 다른 사회성 곤충의 연구를 수행했을 때 이 두 가지 모델이 정확히 맞는 것은 사실이며, 유전적 정보와 혈연관계 같이 이미 정해진 내용에 의해 협조 행동이 일어나기는 하나 이러한 내용들이 형성되는 것이 군집 내에서 진화적인 과정을 거치는 지적인 생산물로 봐야 한다는 견해에 도달했다.

간단히 말하면 개미들의 행동은 단순하지만 집단적 사회문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복잡하고 정교한 체계라는 것이 사회생물학의 기초이다(사회생물학을 하나의 학문 분야로 올려놓은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의 번역본은 재미있는 책이긴 하나 50만 단어가 넘는 관계로 체력과 인내력을 필요로 한다. 필자는 개미 세계여행이라는 그림이 더 많은 윌슨의 다른 저서를 오히려 더 재미있게 읽었다).

약 10년 전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개미들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사회를 구성해서 운영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전열을 갖추어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전쟁에서는 전차를 만들어 적을 공격하기도 하고 세균전을 펼치기도 하며 생식기를 맞은 암수 개미들은 한날한시에 일제히 날아올라 생명의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미래에 대비해서 식량을 비축하고 종족의 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는 이타적 정신은 개미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다.

평균적인 개미 한 마리의 무게는 1그램의 1000분의 1 이하지만 개미는 다른 곤충들보다 더 우월한 사회생활을 수행하는 그들의 생존방식을 갖고 있다. 개미들은 페로몬이라는 일종의 화학물질을 발산해서 서로 의사를 주고받는데 이런 의사소통에는 먹이가 있는 위치를 알려준다든지 또는 적의 침공을 경고한다든지, 혹은 집단행동을 벌이는 순서까지도 포함될 수 있다.

개미들이 전쟁을 벌일 때에는 상대방에 대한 기만, 선전 및 선동 전술, 암호 작성 및 해독, 의태와 은폐 행동, 구걸하기, 노예 부리기, 트로이목마 작전, 약탈 행위, 연막작전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된다. 작가인 베르베르는 개미의 놀라운 사회 생활상들을 소설 형식을 빌려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놀라고 한편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소설에 열광했다.

윌슨은 개미의 통신 방법을 연구했다. 1950년대 당시의 학자들은 사회성 곤충들이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일종의 화학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런 화학물질의 정체와 만들어지는 과정과 그 역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당시의 윌슨은 개미들이 어떤 화학물질을 분비하며 그 화학물질은 다른 개미들로 하여금 일련의 어떤 정해진 행동을 유발할 것이라는 다소 대담한 가설을 설정하고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윌슨이 실험실에서 사육하는 불개미들을 관찰한 결과 먹이를 찾아 집을 나선 척후병 개미들이 커다란 먹이감을 발견하면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이따금씩 복부 끝에 달린 침을 내밀어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흘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다른 개미들이 척후병 개미가 지나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서 먹이감을 운반해 오는 광경을 보았다.

윌슨은 하염없이 불개미들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윌슨은 척후병 개미들이 분비했던 화학물질이 그들의 몸속 어딘가에서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불개미의 해부학적 구조가 전혀 알려진 바 없었기 때문에 윌슨은 직접 불개미들의 뱃속을 가르고 내장기관들을 꺼내가며 작은 불개미들을 일일이 해부했다. 내장기관들에서 만든 화학물질의 길을 만들어 보고 다른 불개미들이 어떤 내장기관으로 조성한 길을 따르는지를 관찰했다.

5년 동안의 반복된 실험을 거듭해서 화학물질이 존재하며 개미는 외부로 발산되는 화학물질인 페로몬에 의해 서로 통신한다는 것을 밝혔다. 또한 나중에는 다른 동물에도 페로몬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윌슨은 40년 이상 더 개미를 연구했다).

페로몬은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지만 개미 집단에서의 위력은 절대적이다. 개미의 카스트는 페로몬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개미가 여왕개미가 되면 여왕개미의 페로몬이 생성되고 이 페로몬은 유전자가 동일한 다른 암컷들이 알을 낳는 일개미로 만든다. 둘 사이에 사실상 차이는 없다. 같은 부속품처럼 만들어진 일개미와 병정개미도 그렇다. 성장시 영향 받는 페로몬의 차이에 의해 몸집이 수십 배 이상 큰 병정개미와 보통의 일개미로 분화한다.

불과 페로몬에 의한 통신에 크게 의존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 개미집단은 개체로서는 발휘할 수 없는 집단적 지능을 가지며 사회활동을 한다. 쉽게 말해서 작은 개미와 작은 개미를 많이 합하면 복잡하고 거대한 개미의 왕국이 된다. 작은 컴퓨터를 이더넷으로 엮어 놓으면 거대한 인터넷이 되는 것처럼 이러한 시퀀스에는 무언가가 있다. 실제로는 배후가 없는 집단적인 지능과 행동이라는 것이 그 시스템을 만드는 와중에 숨어 있다.

시간이 나면 소파에 기대어 「개미 세계의 여행」이라는 책을 손으로 넘기며 개미 집단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지금도 재미있게 읽고 있는 필자는 아마추어적이긴 하지만 컴퓨터나 컴퓨터 주변장치의 세계에서도 언젠가 이런 개미-페로몬 시스템과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몽상을 하곤 한다(개미-페로몬 류의 어떤 시스템은 물류(logistics) 시스템에 실제로 응용되어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몽상에 가까운 일을 시도해 보는 것조차 쉬운 일은 아니며 성과는 운에 좌우되기도 한다.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막상 구현해 보는 것은 예상보다 쉬울 지도 모른다(예를 들면 존 홀랜드가 단순한 생각으로 피셔(Fisher)의 유전자 책을 손에 잡은 후 10여 년 간을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던 유전자 알고리즘 같은 것이 그렇다. 처음에는 간단한 수학적 알고리즘의 표현 정도로 단순한 접근에서 시작되었다).

괴델 에셔 바흐의「개미의 푸가 」
같은 개미에 대해 쓴 글 중 유명한 글이 있다. 「개미의 푸가」라는 제목으로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에 소개된 하나의 단편이다. 1978년에 발표된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작품인 「괴델, 에셔, 바흐」는 얼마 전 국내에서도 번역되었다. 호프스태터는 갑자기 이 책으로 유명해졌다. 재미있기도 하고 불가사의하기도 한 이 책은 지금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꾸준히 읽고 있다. 필자도 어렵기는 하지만 꾸준히 읽어보려고 애를 썼던 책이다. 개미 연구가인 에드워드 윌슨은 책의 「전주곡」과 「개미의 푸가」 부분의 초안을 직접 읽고 주석을 달아 주었다.

「개미의 푸가」는 호프스태터의 다른 책 「Mind’s I」라는 책에도 소개되었다. 이 책은 좀 더 대중적인 책으로 국내에서는 김동광 씨의 번역으로 「아니 이게 바로 나야!」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Mind’s I」는 ‘나’라고 하는 말의 의미부터 시작하여 독자들을 흔들고 혼란에 빠뜨려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을 모두 낯설게 하고, 반대로 낯설던 것을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만들려는 저자들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존 홀랜드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조직과 층위 형성에 대한 인용으로 「개미의 푸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읽어 볼만한 내용이다.

책의 내용은 아킬레스와 거북이, 게를 방문하여 선물을 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게는 마침 개미핥기 박사라는 손님을 맞이하던 참이었다. 선물은 바흐의 평균율의 음반이었는데 이들은 음반을 전축에 얹고 전주곡과 푸가의 구조에 대해 논의한다. 이들은 「전주곡」에서 푸가(fugue)를 전체 구조로 들어야 할 지 아니면 부분의 합으로 들어야 할 지에 대해 논쟁을 시작한다(둔주곡이라고도 불리는 푸가는 독립적인 여러 개의 성부로 구성되었다. 성부들은 하나의 곡으로 만들어 졌으며 푸가를 연주하면 이 곡들이 한번에 연주되는 것을 듣는 것이다).

푸가를 듣는 방법으로 시작한 논쟁은 각 성부가 서로 독립적이기는 하나 연관성을 가지며 각각의 곡들이 모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완벽한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푸가의 감상 기법을 놓고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을 택한 아킬레스와 거북의 싸움을 개미핥기가 중재하면서 시작한다. 부분과 전체라는 해묵은 이분법이 등장하는 것이다.

전체론(Holism)과 환원주의(Reductionism) 그리고 무(無 : MU)라는 글씨가 재귀적으로 얽혀 있는 그림을 보면서 이들은 이 그림을 보는 방법을 놓고 한바탕 또 입씨름을 벌인다. 대화는 개미핥기에게 개미의 군집에 대한 전체론과 환원주의의 견해를 묻는 것으로 다시 옮겨간다. 개미핥기는 ‘개미핥기’라는 것을 생물학상의 종(種)이며 자신의 직업은 개미 군집의 신경장애를 제거하는 외과의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개미핥기는 자신과 힐러리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소개한다. 개미핥기는 힐러리 아주머니와 지난주에 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힐러리 아주머니는 개미 군집의 이름이다). 개미핥기는 개미의 개체를 먹기는 하지만 군집을 먹는 것이 아니며 군집은 언어 능력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개미핥기는 개미들이 흙 위에 뿌려 놓은 코드화된 정보를 읽고 감상할 수 있으며, 땅위에 자국을 남기고 그 위에 지나가는 개미들의 생각을 알고 화답을 한다고 말한다.

힐러리 아주머니는 개미핥기와 몇 시간씩 대화를 즐기지만 개미 한 마리 한 마리는 아무런 생각조차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뇌와 뉴런(신경세포)의 비유를 들었다(필자의 능력으로는 호프스태터의 재치 있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요약할 방법이 없다). 개미핥기의 말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군집에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온갖 종류의 일이 있고 개미들은 역할에 따라 전문화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 마리의 개미가 담당하는 전문적 역할은 나이에 따라 변화해 갑니다. 그리고 그 역할은 그 개미가 속한 카스트에 따라 다릅니다. 어느 한 시점에 한 군집의 작은 지구(地區)를 조사하더라도 항상 모든 종류의 개미가 있습니다. 물론 장소에 따라 한 카스트의 분포가 다른 것에 비해 성기거나 조밀한 경우는 있지만 말입니다.

실제로 오랜 기간에 걸쳐 진화하는 동안 개미 군집에는 지극히 미묘한 카스트 분포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균형 덕분에 개미 집단은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의 근저에 깔려 있는 복잡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카스트 제도를 조정하고 미묘한 카스트 분포의 균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개미들의 항상적인 움직임이지요. 카스트 분포란 단일한 고정된 패턴으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군집이 처해 있는 현실 세계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하기 위해서 항상 변화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스트 제도를 업데이트해서 군집이 직면한 당면 상황을 만드는 것이 바로 군집 속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입니다.

군집 속의 개미 한 마리에게는 개미핥기가 두려움의 대상이겠지만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아무튼 저의 출현에 대응해서 개미들의 행동이 개미 카스트 내의 분포를 완전히 변경시켰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새로운 카스트 분포는 제가 그 곳에 나타난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그 군집에 하나의 지식조각(a piece of knowledge)을 추가시켰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개미 군집은 수 억 년에 걸친 진화의 혹독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극소수의 메커니즘만이 선택되고 나머지는 거의 배제되었습니다. 그 결과 남은 것이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설명했듯이 개미 집단을 작동시키는 메커니즘의 집합입니다. 

결국 개미의 푸가에서 나오는 개미 집단의 중요한 개념은 시스템 내의 계급집단(카스트)의 형성과 변동이었다. 수백만 마리의 개미들이 서로 푸가의 성부처럼 환원주의적으로 또는 전체론적으로 얽혀서 울려퍼지는 푸가는 어떤 소리가 날 것인가? 읽고 있자니 필자는 이런 재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 저자의 천재적인 능력이 부럽기만 했다. 게다가 책에는 개미집단 말고도 수없이 많은 주제가 더 있다. 개미 집단의 능력은 ‘시스템’의 힘이다. 그 ‘시스템’과 ‘시스템’을 만드는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

* 이 기사는 ZDNet Korea의 자매지인 마이크로소프트웨어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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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4 15:18

펌)PARC 이전의 컴퓨터 업계

예전에 내가 쓴 글이다. 기억을 더듬어서 캡처



PARC 이전의 컴퓨터 업계

PARC 이전의 컴퓨터 업계 2003-10-07 11:10:37

안윤호 | mindengine@hanmir.com


필자는 아마추어 커널 해커이다. 최근에는 관심의 폭이 조금 넓어져서 인문과학과 생물학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의학과 의공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필자는 이전에 8비트 컴퓨터가 쓰레기통의 부품을 주워 마이크로컴퓨터를 만들어 낸 ‘실리콘 밸리 키드’들에 의해 탄생한 것이고 이들은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내용을 적은 적이 있었다. 또 몇 달 전 컬럼에서는 사회주의자인 리 펠젠스타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 그리고 애플과 PC의 초기에 있던 대폭발에 대해 다루었다. 그 당시 마이크로소프트(이하 MS), 애플 그리고 몇 개의 중요한 회사들은 점차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제1차 폭발이 8비트의 하드웨어를 통해 시작한 것이었다면 그 다음의 폭발은 CP/M, 비지칼크(VisiCalc), 로터스(Lotus) 1-2-3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초기의 마이크로컴퓨터의 구현은 대단한 성취였다. 그 이전까지의 컴퓨터는 대중의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로컴퓨터가 퍼스널 컴퓨터의 형태로 보급되면서 최초의 스프레드시트인 비지칼크 같은 킬러 애플리케이션들이 출현함에 따라 사람들은 컴퓨터를 자신의 업무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로터스 1-2-3는 IBM PC의 보급을 다시 폭발시켰다. 이로 인해 컴퓨터는 수백 만대씩 팔리기 시작했으며 80년대 후반과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질적인 수준 향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들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나 많았다. 실리콘 밸리의 역사를 다룬 크린즐리의 책 제목은 「우연의 왕국(Accidental Empire)」이었는데, 그의 말처럼 아무리 보아도 우연의 힘을 무시할 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에는 if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try...catch 같은 수단도 없다. 냉엄한 투쟁과 아픈 추억만이 밀려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는다. 역사가들은 그러한 일들을 기록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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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컴퓨터의 보급

이번 호에는 초기의 작은 승리를 거둔 PC 업계를 다시 한 번 레벨업하게 되는 사건을 다루려고 한다. 초기 해커들이 자신의 열망(염원)을 납땜 인두를 들고 PCB(기판)에 담아 마이크로컴퓨터를 보급한 것이라면, 수준 향상은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촉발됐다. 요즘도 석유를 둘러싼 전쟁을 하고 있지만 1970년대에는 석유 파동이 있었고 냉전 시대였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종말관을 머리 속에 담고 살았다. 컴퓨터 자원 역시 국방에 관여한 부분이 많았고 냉전 경쟁에 일조했다. 1970년대의 인터넷을 비롯한 중요한 컴퓨터 발전은 많은 부분이 인류를 살해하기 위한 군비 경쟁의 일환으로 발전했다. 미국 국방성이 관여한 DARPA는 중요한 돈줄이었다.

마이크로컴퓨터의 보급은 사람들의 잠재의식 틈새 속에서 실리콘 밸리의 오타쿠 같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실리콘 밸리의 잉여부품을 통해 발전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극히 반사회적인 사람들이기도 했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같은 책은 마이크로컴퓨터의 출산 기록이나 마찬가지다. 초기 8비트 해커의 대부분은 대학 중퇴자나 사회 부적응자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은 광적으로 8비트 컴퓨터를 개발하였다. 특별한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으며, 마이크로 컴퓨터를 제외하고는 아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개발에만 몰두했다. 본격적인 운영체제나 고도의 하드웨어는 고려하지도 않았고 컴파일러도 없었다. 16비트 시절만 해도 어셈블러를 동원하여 개발하기가 예사였다. 로터스 1-2-3의 최적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MS-DOS는 CP/M 운영체제의 클론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었으며, CP/M 역시 개리킬달이라는 컴퓨터 해커에 의해 급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컴퓨터는 매우 원시적인 상태에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 복사기 회사인 제록스(Xerox)는 앞으로도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절실하게 찾고 있었다. 당시에는 잘 경영되는 회사였으나 어쩌면 복사기 사업은 전망이 어두워질 것 같았고 무언가 대안을 찾고 있었는데 그 답을 컴퓨터에서 찾고자 했다. 이들은 미래에 종이 산업이 없어지거나 쇠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이 대신 사람들이 컴퓨터 스크린만 읽는다면 1990년대에 가서는 회사가 파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했으며, 스탠포드 대학 근처의 스탠포드 산업 단지 내에 제록스 PARC(Palo Alto Research Center)를 세웠다. 대학과 연구소에서 우수한 연구진을 확보하면서 1970년에 문을 연 PARC는 고도의 두뇌집단으로 컴퓨터 역사에서 특이한 상황을 창조했다.


Xerox PARC

PARC(www.parc.xerox.com)의 목표는 10여년 후의 전자화된 사무실에서 적합하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무기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간단한 교육만 받고도 직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일이 중요했으며, 다른 회사의 제품과는 차별성을 두고자 했다. 매우 독창적이고 인습 타파적인 인물들이 모인 PARC는 한 시대를 뛰어넘는 제품과 개념들을 개발했다. 그 중에서도 CSL(Computer Science Laboratory)은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제록스 DARPA의 몽상가인 밥 테일러를 CSL의 책임자로 기용하였고 당시로는 최상급의 컴퓨터 인력을 확보했다. 밥 테일러 ARPANET(인터넷의 전신)의 개발에도 깊이 관여했다.제록스 테일러의 인맥이 인재확보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다. 테일러는 최고의 인맥을 발굴하고 이들을 분발시키는 역할을 맡았다(밥 테일러는 전공이 컴퓨터 과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였다). 테일러는 연구자들의 충돌을 막으며 의견을 듣고 가급적 단시일 내에 최상의 연구성과를 내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를 행했다. 조직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 중간 관리층을 없앴으며 40명 정도의 연구원들과 20명 정도의 사무직원으로 PARC를 운영하였다. 모든 보고는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조처하였다. 하급 연구원도 없었으며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모아 연구결과를 서로 발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른바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우기는 회의는 거의 아수라장에 가까웠다고 한다. 테일러는 그들의 의견을 듣고 진전사항과 구상을 중재하고 조정하였다. 이러한 중재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여 한때 연구소는 테일러 연구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아무튼 연구소는 광적으로 개발하는 연구자들과 이들이 마주치는 개발의 어려움으로 인해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소문도 돌았다.

밥 테일러가 최초로 발탁한 연구원은 앨런 케이(Alan Kay)였다. 앨런 케이는 널리 알려진 인물로써 재즈 연주자이기도 하며 애플 매킨토시의 주요 개발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스몰토크(smalltalk)'라는 최초의 객체지향 언어를 1972년에 CSL에서 구현하였다. 객체지향의 패러다임은 나중에 다른 프로그래밍 언어와 스타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앨런 케이는 마소 2월호에도 소개되었다. 객체지향 언어의 시작은 데이터와 간단한 도입 프로그램을 같이 전송하는 케이의 간단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였다. 앨런 케이(Alan Kay)는 유타 대학에서 연구 중 시뮬라 언어를 접한 적도 있으며, 스몰토크에서 교육용 환경을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과거에도 시도하였고 요즘도 진행중이다. 세이무어 페이퍼트 마빈 민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적도 있다).

차별화의 목표와 자만심에 가까운 이상주의로 |CSL의 연구진은 텍스트 표시 위주의 환경을 벗어나기로 한다. CSL에서는 새로이 개발되는 컴퓨터에 회사 근처의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자인 더글라스 엥겔버트(Douglas Engelbart)가 개발한 개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엥겔버트는 스탠포드 대학의 SRI에서 연구하는 학자였으며 마우스를 발명하였고 비트맵 그래픽과 윈도우의 개념을 개발하였다. 또한 하이퍼 텍스트의 연구로도 유명하다. 엥겔바트를 소개하려면 이 컬럼을 다 쓰고도 모자랄 정도인데, 엥겔바트는 몽상가라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지만 그 자신은 몽상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반문하곤 했다).

CSL은 마우스, 비트맵 화면, 페이지 편집기 등을 기초로 개선된 컴퓨터를 개발했다. 1973년 발표된 제록스 Alto 컴퓨터는 이러한 개념을 거의 최초로 구현했다. WISWYG 에디터를 구현했고, 마우스가 상용화됐으며 GUI를 구현했다. 그리고 비트맵 그래픽스를 구현했다. 부분적으로 LAN과 분산 처리도 구현됐다. Alto는 유명한 Xerox Star의 원형이 된다.

같은 해 클라이언트/서버와 분산 처리의 개념이 PARC에서 발표됐는데, 이 해는 밥 멧칼프(Robert Metcalfe) 이더넷을 발명한 해이기도 했다. 당시 CSL에서는 레이저 프린터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직렬 통신의 너무 느린 다운로드 속도에 질린 나머지 |멧칼프 이더넷을 개발하고 말았다. 600dpi 레이저 프린터의 다운로드 속도는 이더넷으로 인해 15분에서 12초로 줄어든다. 이후 이더넷은 네트워크의 표준이 된다(멧칼프 CSL을 퇴사한 후 3Com을 창업한다). 레이저 프린터는 1971년에 원형이 개발됐는데, 레이저의 라스터 스캔을 이용하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1974년에는 세계 최초의 그래피컬 워드프로세서인 브라보(Bravo) 찰스 시모니의 팀에 의해 만들어진다. 찰스 시모니는 나중에 MS의 소프트웨어 제작에 CSL의 개념을 도입한다. 또한 CSL의 팀이 오버래핑하는 스크린 윈도우와 팝업의 개념을 만들었으며, PDF와 포스트스크립트의 전신인 PDLs(Page Description Languages)도 이 때 정립된다. 1975년에는GUI를 사용하는 퍼스널 컴퓨터를 일반에 공개하면서 아이콘과 팝업 메뉴가 선보였다(이 시기에 제1세대 8비트 마이크로컴퓨터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1976년에는 레이저 프린터가 상용화되었고 다음 해에는 상용화된 전자출판 시스템이 발표되었다. 또한 문자발생 셋트가 완전히 정립된 시기이기도 하다. 1978년에는Notetake라는 가방 크기의 휴대용 컴퓨터가 완성된다. 1979년경에는 1000대 정도의 Alto 제록스 내에서 이더넷 랜을 통해 사용되었고 500대 정도가 정부기관과 대학에서 사용되었다. 1980년에는 smalltalk-80이 발표되고 제록스 인텔, 그리고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의 합의로 이더넷 표준이 만들어진다.

1981년에 PARC에서는 오늘날의 컴퓨터와 거의 비슷한 모습의 Xerox Star 8010을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워크스테이션의 선조라 부르는 Xerox Star의 탄생이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나 아폴로 같은 워크스테이션들은 모두 스타와 그 선조 모델들의 영향으로 태어났다. 물론 8010 머신 역시 많이 팔리지 않았다. 이 컴퓨터는 분산 컴퓨팅을 지원했으며 다국어 지원이 가능했다. 클럭은 느렸지만 기능들은 요즘의 컴퓨터에 필적한다. 나중에 Xerox Star는 상용화될 기회가 있었으나 경영진은 그 기회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기술적 진보는 계속된다. 이런 일련의 개발을 보면서 우리들 머리 속의 컴퓨터 시계와는 거꾸로 돌아가는 PARC의 기술 시계가 놀랍기만 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전 현재의 컴퓨팅 환경에 필요한 고급 개념은 일단 착상에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에서도 컴퓨터는 흔한 제품도 아니었고 대부분의 컴퓨터는 텍스트 터미널의 작업환경이었다. Alto는 너무나 빨리 태어난 것이다. 이처럼 20년 가까운 시간차를 갖고 미리 개발된 제품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영진들은 연구성과를 활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연구는 미래를 위한 기초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PARC에서는 레이저 프린터와 컴퓨터 네트워크, 그리고 GUI와 WISWIG이 가능한 워크스테이션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당시 경영진은 기존의 복사기 사업만으로도 충분히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했다. 나중에 Xerox Star 같은 컴퓨터가 시판되기는 했지만 기술의 활용에는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경영진들은 연구자들이 너무 이상과 자신들의 열정에만 치우친 사람들로 보였다. 만약 이 당시에 매킨토시 같은 GUI를 갖는 컴퓨터와 다른 8비트의 경쟁이 일어났다면 기술지향적인 관점에서 제트기와 프로펠러 전투기의 대결이 되었겠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어떤 경영 분석가들은 PARC가 많은 개발을 해놓고도 PC 시장을 장악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PARC의 분위기상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아무튼 연구진은 실망했다. 연구진은 컴퓨터 업계에서 자신보다 못한 기술자나 과학자들이 창업에 성공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고 경영진의 방침에 실망한 연구자들은 참다못해 회사를 뛰쳐나가 스스로 창업했다. CSL의 연구는 지금 생각해도 중요한 기술들이었지만 당시에는 당장 상품화되지 못할 것으로 보여 비밀주의를 고집하지도 않았고 연구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창업을 통해, 또는 다른 회사의 핵심 인력이 되어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했다. 이들은 모두 유명해졌다.

제1세대의 개척자들이 컴퓨터 산업의 기초를 마련한 바탕 위에 고급 기술들이 과감하게 적용되었다. 컴퓨터 산업의 박동은 CSL에서 만든 새로운 목표점들을 보면서 더 빨라졌고 미래는 경영진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되었다. 애플 MS는 이러한 기술과 개념을 포장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원래는 자신의 것도 아닌 윈도우 개념 자체와룩앤필(look and feel)을 빌미삼아 상대방을 서로 고소하기도 했고 때로는 협조하기도 했다. 두 회사가 생각하기에 GUI는 너무나 중요한 사안이었고 미래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개발된 요소를 사용했다. MS 애플도 WISWIG 인터페이스를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MS의 베이직이나 다른 회사의 소프트웨어들도 중대형기에서 아이디어와 코드를 빌려온 것이다. MS-DOS CP/M을 클론한 것이지만 CP/M 역시 다른 미니 컴퓨터의 코드를 베꼈다는 의혹이 있었다. 지적재산권이나 저작권, 그리고 회사의 기술이 비밀과 법률 서류에 둘러쌓이게 된 것은 컴퓨터가 큰돈이 되고 나서의 일이다. PARC의 개발은 그 후에도 계속되지만 중요한 개발자들은 계속 회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PARC의 사람들

어쩌면 사람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당시의 한 대세였는지도 모른다. 1980년대 초반에는 이른바 스핀오프(spin off)라는 회사들이 출현했다. 모회사로부터 분리해 나오는 새로운 자회사들은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스핀오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스핀오프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아이디어와 기술만으로 뛰쳐나온 사람도 많았다. PARC출신의 연구진은 매우 뛰어난 사람이 많았고 일부는 PARC의 분위기를 이어 나가고자 하였다. 물론 일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원래의 두목(?)격인 밥 테일러는 불간섭주의를 표방하였다. 연구진의 아이디어를 듣고 의견을 존중하면서 중재에 나서는 것이었다. 기술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많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우선 하급 연구인력을 기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상주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실제로 최고급 인력들이 일손 부족으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픽 워드프로세서인 브라보를 만들 때조차 대학원생들을 인력이 아니라 실험 대상자들이라고 부름으로서 간신히 인력을 충원할 수 있었다.

브라보(나중에 MS 워드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를 만든 찰스 시모니(Charles Simonyi)는 이때의 경험을 「메타 프로그래밍 : 소프트웨어 작성방법」이라는 논문을 써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모니는 프로젝트에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당초의 인원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것보다 비용만 더 들며 효과는 별로 없다는 것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다른 프로그래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메타 프로그래머를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메타 프로그래머는 작업 설명서만 작성한다. 메타 프로그래머는 사용자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 등을 피드백하며 프로그래머가 그 코드를 구현하는 것이다. 일반 프로그래머는 어떻게 보면 조금 독재와도 같은 이러한 방법은 시모니가 동구권인 헝가리 출신이라는 배경도 작용하였을 것 같다. 시모니는 제록스의 소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1인 독재를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시모니 제록스의 개발방법에 염증을 느끼고 회사를 그만두면서 제일 먼저 제록스를 떠난 밥 멧칼프에게 상의한다. 멧칼프는 몇 개의 유망한 회사를 적어 주었고 시모니는 그 중에 맨 위에 있던 MS를 선택하였다. 시모니는 1979년 합류 당시 MS의 첫 번째 박사급 인력이었고 MS의 개발 방법론에 영향을 주었다. 몇 명의 엘리트가 만들어 낸 것을 메타 프로그래머의 지휘 하에 일반적인 프로그래머들을 동원하여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시모니의 지휘에 따라 80년대 초의 MS는 공장(factory)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메타 프로그래머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핵심 프로그래머는 빌 게이츠였다. 나중에 MS가 거대 조직이 되었을 때에도 평준화된 많은 프로그래머들과 몇 명의 메타 프로그래머로 조직된 것은 우연한 결정이 아니라고 한다. 2002년까지 시모니 MS의 수석 아키텍트로 일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근 회사를 떠났다.

제일 먼저 제록스를 빠져 나왔던 멧칼프는 상당한 카리스마와 전투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네트워크 장비업체인 3Com을 1979년에 설립했으며, ARPA NET의 구축에 관한 내용으로 하바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네트워크 하부구조인 이더넷을 만들었다. 3Com을 만든 후 이더넷을 LAN의 표준으로 만들었고 그 후에는 3Com의 CEO로 제품을 팔러 다녔다. 자신이 만든 이더넷에 열정과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더넷 제품을 열정적으로 판매하였다. 약 11년 동안 3Com의 회장 생활을 한 후 1990년에 은퇴한 뒤 컬럼과 강연으로 바쁘게 살고 있다고 한다.

강연에서 자신의 행운은 이더넷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이더넷을 열심히 팔러 다닌 데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멧칼프는 매우 카리스마적이며 독단적이고 전투적이고 실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최근 그의 인터뷰(http://www.thetech.org/revolutionaries/metcalfe/)를 보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 스티브 잡스 멧칼프의 옹호자이기도 했는데, 잡스와 비슷한 양상으로 멧칼프는 자신이 창립한 회사에서 나중에 영입된 인사들에 의해 강제로 퇴출되는 경우를 당했다. 고집이 세고 독단적이며 전횡을 휘두르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존 워녹 PARC에서 포스트스크립트의 전신에 해당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PARC를 나와 벡터를 이용하는 포스트스크립트 언어를 만들었다. 존 워녹은 자신의 상관과 함께 PARC를 떠나 새로운 회사를 만들었다. 그 이전에는 자신들의 개발 제품을 상용화하자고 2년이나 회사에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인쇄용 워크스테이션을 만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소프트웨어와 폰트를 판매하는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어도비(Adobe)라는 이름은 자신의 집 정원에서 보이는 거대한 절벽 이름을 따서 지었다.

프린터 컨트롤러를 개발하기 위한 어도비의 노력은 매우 거대한 도전이었으며 당시의 느린 하드웨어를 감안하면 더욱 난감한 일이었다. 개발이 진행되는 도중 1984년에는 매킨토시를 만드는 애플 애플 III, 리자, 매킨토시가 모두 판매부진으로 실패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었다. 깜찍한 맥의 외관에도 불구하고 매킨토시 GUI를 강조하고 차별성 광고를 내기는 하였으나 다른 업체들도 모두 GUI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로터스, 비지코프, MS, 디지털 리서치 그리고 제록스까지도 GUI를 위한 제품들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애플은 이러한 경쟁자들을 물리칠 새로운 제품이 필요했는데, 1984년에 HP에서 레이저 프린터를 선보였다. 스티브 잡스는 프린터의 글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식자기 수준의 글씨를 보여줄 수 있는 어도비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하고 어도비의 회사주식 15%를 매입한다. 당시만 해도 계속 경영적인 실수를 하고 있는 잡스 어도비에 대한 투자를 거울삼기를 바라면서 회사의 이사회는 투자를 승인하였다. 6년이 지나고 주식은 8900만 달러가 되었으나 정작 애플은 자사의 포스트스크립트 카드를 쓰고 다른 회사는 어도비 시스템의 컨트롤러를 사용했다. 결과는 타사 제품이 애플의 제품보다 7배 정도 빨랐다고 한다.

존 워녹은 회사의 매출규모가 많아져도 경영을 고수했다. 빌 게이츠에게는 시모니가 있었으며 메타 프로그래밍으로 일을 해 나가는데 반해서 워녹 PARC에서의 방법을 그대로 도입했다. 영업은 최우선 요소가 아니었으며 최상의 프로그램을 적절히 개발해 나가는 일이 최우선시되는 회사였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고집불통인 회사는 애플과도 사이가 멀어지고 싸우기도 하고 빌 게이츠의 제안을 무시하기도 했다. 이들은 서로 싸우고 다시 화해하기를 되풀이했다. 폰트와 그래픽의 중요성은 무시할 수 없었고 사람들은 이를 원하고 있었으므로 주도권과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어도비 PARC 방식을 고집하기도 했지만 살아 남아서 훌륭한 회사로 남았다.


작은 역사라는 것

CSL의 식견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록스 자체에서는 실용화를 서두르지 않았다. 어쩌면 당시 경영층의 판단이 더 상식적이었을 수도 있다. 너무나 빠르게 PC 혁명이 진행되어 제록스가 PARC의 결과를 이용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몇몇 회사는 필사적으로 PARC의 결과를 이용하여 성장했다. 제록스 자체도 최초의 건식복사기술(xerography)을 상용화하려던 1950년대에는 아무도 복사기 시장이 커다란 시장이 되리라고 예측하지 않던 개발을 감행했다. 제록스는 모험 기업으로 출발했다. 불과 얼마 후 제록스는 대기업이 되었고 PARC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의 RCA가 50년대에 액정의 연구가 브라운관 판매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개발을 중지한 일이나, IBM에서 386의 출현이 자사의 미니 컴퓨터 판매에 악영향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들이 비슷한 맥락을 보여준다.

아무튼 우연하게 결집된 수십 명의 인원들이 컴퓨터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이 개발한 것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다. 제록스는 90년대를 대비하여 70년대에 개발을 하였다. 이는 어쩌면 올바른 예측이었는지도 모른다(1970년대에 워크스테이션과 GUI라니 너무 앞서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개발진들과 사업가들은 참을 수가 없었다. 기회가 생기면 열정적인 사업가와 개발자들은 그 기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이들은 자신을 판돈 삼아 배팅하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그래서 또 바뀐다. 역사에는 if 구문이 없다. 사건들이 연습 없이 계속 일어날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연과 운(運)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이들을 발견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안목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희뿌연 안개 속의 빙산을 발견하며 항해하는 것처럼 윤곽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윤곽은 뚜렷해지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은 알 수 없는 요소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컴퓨터 산업의 판돈은 크고 결과는 해봐야 아는 것이며 뚜렷한 룰은 없다. 이기면 많은 보상이 있으나 잘못되면 포인터는 Null을 가리킬 것이다. 때때로 컴퓨터 산업의 태풍의 눈은 소심한 사람은 견뎌내기 어려운 무서운 국면이 있다. 열정, 광기 같은 요소와 안목의 결합은 어울리지 않게 보이지만 컴퓨터의 경쟁적 역사에서는 언제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엥겔바트의 아이디어는 그의 연구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각과 사고를 연장하는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PARC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모아 모든 초기 제품을 보여 주었다. 활용하지는 않았으나 연구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인 GUI와 네트워크, 그리고 OOP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로 자신들의 꿈을 구현하려 애를 쓰던 몽상가들은 요즘은 생각하는 방법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엥겔바트는 "디지털 기술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뀌어야 한다(Digital technology could help make this a better world. But we’ve also got to change our way of thinking)"고 말한다. 이에 부응하듯 앨런 케이는 교육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바꾸어 보려고 했고 멧칼프도 최근에는 이와 비숫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30년 전에 있던 작은 혁명은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면서 출발한 것이다. 컴퓨터 산업은 그 혁명이 제시한 타임머신에 홀려 한번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제 GUI와 WISWYG은 하도 산업계의 화두로 많이 사용되어 별로 참신하지 않지만 처음에는 놀라운 생각이었다. 지금은 사물과 생각 자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화두를 만질 때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꿀 때가 된 것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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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8 22:29

v펌)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좋은 기사다.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4> 20세기 한국 최초 부동산 업자, 정세권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6-26 오후 2:20:43

    

     

북촌에서 가장 사랑받는 골목길이자 남산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가회동 31번지, 그리고 종로 3가 뒤편의 허름한 한옥 집단 지구인 익선동 166번지는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같은 점이 있다. 북촌이 당대 지주들을 위한 비교적 큰 규모의 한옥 집단 지구였다면, 익선동은 중산층 이하 서민을 위한 한옥 집단 지구였다는 차이다.

공통점은 두 지역을 모두 한국 최초의 근대 부동산 개발업자, 정세권(鄭世權)이 건설했다는 점이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부동산 업자, 정세권은 '건양사'라는 부동산 개발 회사를 설립해, 큰 대지를 매입하고 분할한 후 한옥 집단 지구를 건설해 일반인들에게 분양했다.

역사 기록 속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자라는 이력 외에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역사문화정책연구원 김란기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정세권은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의 재정적 후원자이자 적극적 활동가였다. 잡지 <실생활>과 <우리말 큰사전> 발간에 크게 이바지하고, 학교 건립과 기부 등 각종 사회 활동에도 참여했다. 이처럼 정세권은 경제적 이득을 꾀했던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경제적 부강과 교육 진흥, 서민 생활 개선을 실제로 고민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북촌이라는 매력적인 동네를 창조한 인물이자, 한국 근대사에 기념비적 역할을 한 기관들에서 활동한 이 인물에 대해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는 바가 거의 없다.

20세기형 퓨전 한옥, 익선동과 북촌의 탄생

1920년 일제의 회사령 철폐로 일본 자본이 조선으로 유입되자, 미처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던 민족 자본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책 <서울상업사>에 따르면 당시 명동, 용산 일대 남촌 지역에서 주로 거주했던 일본인들은 종로 일대까지 옮겨와 상업 활동을 확장했고 한인의 경제적 기반을 잠식해 들어갔다.

부동산 개발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났다. 당시 조선인들은 대형 관급 공사 참여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소자본으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고 있었다. 마침 서울이 엄청난 규모의 인구 증가를 경험하고 있었던 배경과 맞물려, 조선인들은 도시형 소규모 주택 산업에 파고들었다. 정세권도 그중 하나다. 그는 1910년대 후반 주택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정세권은 그 속에서도 남달랐다. 그가 만든 한옥은 전통 한옥을 상당 부분 변형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수도와 전기가 들어왔고, 환기와 일조권 등 구조에까지 신경을 썼다. 또 행랑방과 장독대, 창고의 위치를 실용적으로 재배치하고,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챙을 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처럼 그의 한옥은 20세기형 생활 방식을 고려해 설계된 퓨전(fusion) 한옥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수난을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 동지회' 단체 사진(1946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세권이다. ⓒ한글학회 제공

서민 주택 금융을 고민한 부동산 업자, 정세권

정세권은 1925년 <경성편람>에 쓴 '건축계(建築界)로 본 경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근래의 경향은 일반이 개량식을 요구하는 모양입니다마는, 개량이라면 별것이 아니라 종래 협착하던 정원을 좀 더 넓게 하여 양기가 바로 투입하고 공기가 잘 유통하여 한열 건습관계 등을 잘 조절함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관도 미술적인 동시에 사용상으로도 견확하고 활동에 편리하며 건축비, 유지비와 생활비 등의 절약에 유의함이 본사의 사명인가 합니다. 재래식의 행랑방, 장독대, 창고의 위치 등을 특별히 개량했고, 또 한편으로 중류 이하의 주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년부, 월부의 판매 제도까지 강구하여 주택난에 대해서는 다소의 공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다시 쓰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현재의 주택난과 관련, 우리 회사는 중산층 이하 서민을 위한 주택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산층 이하 서민의 주거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당시 서민들은 초가집에 거주했다.) 서민도 한 차원 개선된 주거 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새로운 형태의 집인 퓨전 한옥에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퓨전 한옥에도 부자 한옥의 특징인 정원이 작게나마 조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서민 주택은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갖추기 위해 100퍼센트 정통 양식을 따르는 고전 주택이기보다는 개량형 주택이 더 적합할 듯합니다. 그런 주택을 분양하면서도 우리는 주택 대금을 입주 시점에 모두 받지 않았고, 다양한 금융 기법을 이용해 연 또는 월 단위로 분양금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도 서민이 주택을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금융 정책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보금자리론'은 9억 원 이하 주택에 대해 매우 낮은 금리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하는 금융 상품이다. 여기서 서민의 주택 구입을 지원하는 주체는 보통 정부 산하공기업이나 한국주택금융공사 정도다. 민간 회사들은 이런 정책을 좀처럼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 1920년대 정세권의 회사는 민간 회사이면서도 서민 주택 금융을 제공했다. 한옥을 분양한 후 분양 대금을 입주 후 월 단위로 받은 것이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분양 대금을 입주 전에 일시에 받으면 사업 이익을 조기에 확보할 수 있는데도, 정세권은 서민 편의를 위해 주택 융자를 제공했다.

그간 많은 서민이 뉴타운 건설로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무참히 쫓겨났다. 너무도 과도한 분담금(새 아파트에 들어가기 위해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이 가장 큰 원인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거대 건설 회사들은 2008년 이전 부동산 호황기에 크나큰 수익을 올렸다. 이들이 아파트 건설로 큰 수익을 얻었다는 것은 싼 비용으로 원래 거주민을 몰아내며, 입주자에게는 큰 분담금 또는 비싼 분양가를 부담케 해 배를 불렸다는 것의 방증이다. 건설 회사들이 원주민의 형편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서 경제적인 보상을 해준 일은 기억 속에 없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부동산 업자는 서민 편의를 저버리지 않고 사업을 했는데도 말이다.

춘원과 만해가 감사한 인물

정세권은 춘원 이광수의 자택(한옥)을 건설했다. 춘원 이광수는 자신의 수기에서 정세권에 대한 큰 고마움을 표현했다. 특히 정세권의 인품과 민족 정신, 그리고 창의적 사업 방식에 커다란 찬사를 보냈다.

"나는 그(정세권)의 소유인 가회동 가옥을 전세로 빌어서 3, 4개월 살았지만,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잘 몰랐다. 다만 가끔 그가 토목 두루마기를 입고 의복도 모두 조선산으로 지어 입고 다니는 것과 머리를 바짝 깎고, 좀 검고 뚱뚱한 영남 사투리를 쓰고 말이 적은 사람인 것만 보았었다. (중략) 조선 물산 장려를 몸소 실행할 뿐더러 '장산사'라는 조선 물산을 판매하는 상점을 탑골공원 뒤에 두고 조선산 의복과 양복을 장려하고 실생활(實生活)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조선 물산 장려를 선전하는 인물인 줄 알았다. (중략) 조선식 가옥의 개량을 위하야 항상 연구하여 이익보다도 이 점에 더 힘을 쓰는 희한한 사람인 줄도 알았다. (중략) 기타 설계 변소, 마루, 토역재료(土役材料) 등 내가 안 것만 하여도 정씨의 개량한 점이 실로 적지 아니하다. 미다지 밑에 굳은 목재를 붙이는 것도 아마 씨(氏)의 창의(創意)라고 믿는다. (중략) 나는 더욱 정씨의 인격을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중략) 한 사람의 인격의 힘이 이처럼 영향이 큰가를 느꼈다. 이것도 내 집 성조에서 얻은 큰 소득 중의 하나다."
- <삼천리> 제8권 제1호(1936년 1월 1일) 중


이렇듯 한옥 건설 사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정세권은 '자산가' 정체성을 가지고도 다양한 사회사업을 지원했다. 그는 조선물산장려회의 회계와 사업 전반을 관리했고, 상업에 밝은 눈을 활용해 물산장려운동을 크게 활성화했다. 특히 대공황기를 맞아 조선물산장려회가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정세권은 1929년 관훈동 197번지에 있었던 장려회 회관을 익선동 166번지로 이전토록 금전적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에 만해 한용운은 <장산> 지에 '백난중분투(百難中奮鬪) 하는 정세권 씨에게 감사하라'는 글을 게재하고 그의 노고를 치하한 바 있다.

조선물산장려회 회관은 1931년 9월 낙원동 300번지로 이전하기까지 익선동에 머물렀다. 그러다 자립 정신과 민족 의식을 고취코자 했던 많은 장려회 이사와 실리적 산업 육성을 추구했던 정세권은 대립하게 됐다. 결국 정세권은 물산장려회에서 나오게 되고 물산장려회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다 차츰 쇠퇴했다.

정세권은 교육, 특히 출판에 관심이 많아 조선어학회 활동도 적극 지원했다. 일례로 그는 사비를 털어 1935년 화동 129번지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제공했다. 이렇게 조선어학회에 관여한 이력으로 정세권은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 당시 최현배, 이희승 등과 더불어 큰 고초를 겪었다. 김란기 박사에 따르면, 정세권은 청량리 주변 토지를 일본에 빼앗긴 후에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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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한 평가…"쉽사리 '집 장사'로 매도될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정세권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한 편이다. 소규모 개량 한옥을 대량 공급해 저소득층 밀집 주거지를 형성한 일은 그간 '집 장사'란 단어로 평가 절하돼 왔다. 김란기 연구에 따르면,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박길룡은 귀족 계급 소유의 뜰과 저택을 부수고, 소규모 한옥 밀집 지역을 개발하는 것이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주거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지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한 대지에 작은 집을 여러 채 만들면 큰 저택이 한 채 있을 때보다 인구 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1000평 대지에 한 가구가 큰 저택을 가지고 살 때보다 50평짜리 집 20채가 있는 경우가 가구당 거주 인원이 같다는 조건 하에 면적 대비 인구는 20배가 된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주거 환경은 자연히 악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박길룡의 평가는 주거 환경이라는 한 측면만을 바라본 단편적 접근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당시 서울은 인구 급증으로 주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특히 중산층 이하 서민의 주택 수요는 대단했다. 서민은 초가집 등 기존에 살던 주택의 위생 문제에 시달렸지만 저택을 구매할 형편은 결코 아니었다. 주거 복지 차원에서 서민을 위해 양질의 주택이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됐어야 했다. 바로 그 일을 한 사람이 정세권이다.

따라서 크게 보면 주거 환경이 일부 나빠졌을지라도 사회 전체의 편익은 환경 악화라는 비용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옥 건설 기술의 맥을 정세권이 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당시 정세권과 같은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한옥 건설 기술은 그 맥이 끊겼을지도 모른다. 정세권의 사업이 결코 과소 평가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김란기 연구에 따르면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은 일본식 주택을, 한인 지식인과 부유층은 소위 '문화 주택'이라 불렸던 서양식 주택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정세권은 이들의 취향에 아랑곳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 서민을 위한 도시형 한옥을 건설했다. 20세기 초반의 생활 방식까지 고려한 새로운 도시형 퓨전 한옥을 말이다.

▲ 한강 이북에 위치한 한옥 밀집 지구. 2011년 서울시 건축물 대장을 바탕으로 GIS 기법을 이용하여 한옥 밀집 지구를 어렴풋이나마 예측하였다. 익선동(빨간색 표시)이 가장 오래된 한옥 지구로 나타난다. ⓒ김경민

서민 위해 건설된 최고 한옥 단지 익선동 166번지, 그 가치 존중받아야

현재 익선동 166번지는 깨끗하고 화려한 외관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북촌 역시 10년 전에는 익선동 166번지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한옥의 보존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10년의 세월은 어마어마한 차이를 만들어버렸다.

조선물산장려회의 후원자이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역사적 인물이 역사적 건물들을 지은 곳이 익선동 166번지와 북촌 가회동이다. 하지만, 우리는 당대 지주들을 위한 한옥 집단 지구인 북촌에는 열광하면서도 일반 서민의 생활 양식이 밴 익선동 166번지의 가치는 도외시하고 있다.

북촌 가회동이 깔끔하고 아름답기에 보존 가치가 있다면 익선동 한옥 주거 환경을 업그레이드하면 된다. 그리고 대지주의 북촌 가회동이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서민을 위해 지어졌던 익선동 166번지의 가치 또한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

더군다나 익선동 166번지는 북촌 가회동에 앞서 개발된 한옥 집단 지구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옥 집단 지구이기도 하다. 익선동 166번지에는 서울이 고려 시대 남경이던 시절의 골목길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다면 그 지표 밑에는 어마어마한 보물이 숨어 있을 수 있고,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겠으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동네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은 재개발로 묶여 있다

지난 13일, 동대문 쇼핑 타운의 공장 역할을 하는 창신동 뉴타운이 드디어 해제됐다. 개인적으로 창신동 봉제 공장들의 지역 협동조합 결성을 몇 년에 걸쳐 고민하고, 미력이나마 지역 사회에 도움을 주려 노력하던 중 듣게 된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소식이었다. 서울시는 중재자로서 느리지만 당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다면 재개발지역으로 묶여 있는 익선동 166번지, 약 100년 전 서민을 위해 건설된 가장 오래된 한옥 집단 지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불과 10년의 차이가 북촌을 변화시켰다. 만약 10년 전 어느 개발업자가 나타나 북촌 한옥들은 누추하므로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면, 그래서 그 개발안이 채택돼 북촌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북촌을 보고 있을까.

<필자 주> 정세권에 대한 자료는 주로 김란기 박사 논문과 인터뷰 등이었고, 그 외 옛신문 기사를 일일이 찾아가며 궤적을 꿰맞추었다. 우리가 북촌이라는 외형에는 열광하고 있으나, 부끄럽고 부끄럽게도 북촌을 만든 당사자는 잘 모르는 형편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정세권의 자손, 정몽화 씨가 책 <구름 따라 바람 따라>에 정세권에 대해 기록했다는데도 이 책을 도저히 구할 수 없었던 점이다. 정세권 선생의 후손들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kkim2@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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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20:15

펌)빌 조이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오늘도 나의 글을 하나 퍼온다.

초창기에 적었던 글이다.



빌 조이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2002년에 살고 있다. 이전에 만든 SF 작품들 중에서 터미네이터는 1999년에, 노스트라다무스는 2000년에,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은 2001년에 일어날 일들을 다루었다. 2002년은 2001년보다도 1년이나 머나먼 미래인 것이다.

 

안윤호 (마이크로소프트웨어)
2002/04/16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에는 인공지능을 가진 HAL9000이 나온다. 이 고성능 컴퓨터는 우주 여행중 편집증 증상을 보이며 자신을 제거하려는 승무원들을 하나씩 치밀하게 살해했다. 

2002년의 봄
헐리우드 영화들은 이상하게도 미래를 밝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블레이드러너와 매드맥스, 그리고 터미네이터 등 어디를 보아도 어둡고 쓰레기 더미와 폐허 속에서 검은 옷을 걸친 주인공들이 기관총을 쏘며 설치고 다니는 미래의 모습이 더 흔하다. 어쩌면 이러한 영상매체나 SF 소설들을 통해 우리는 강하게 불안이나 어두운 색의 미래에 대한 암시를 받아 왔는지도 모른다. SF의 선조격인 묵시록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아무튼 고전적인 SF 작품 중에서 보면 2002년은 미래인 것이다. 소설에 나오는 미래답게 2002년이라는 해에는 모든 변화가 엄청나게 빠르게 그것도 가속도를 더하여 바뀌면서 우리의 고유한 감각을 흩트려 놓기도 하고 성능과 양적인 면에서 고소 공포증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2002년이 현재인 것이다. 또한 현실의 장이기도 하다. 바로 오늘이다.

핵폭탄의 개발 이후로 군비 경쟁에 의해 70년대까지 핵무기는 놀라운 성능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유전공학, 나노기술 또는 로봇공학등의 통제하기 어려운 기술로 만든 위협적인 부산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봄이 우울증을 유발하다
필자는 봄에 우울증이 조금 도지는 경향이 있다. 몸 속의 생체시계는 겨울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린다. 춘곤증과 나른함이 어수선한 사회적 환경과 개인적 현실들과 어우러져 몽롱한 우울증을 느끼게 한다. 겨울잠을 잔 곰이 먹이를 찾아 허기증을 해결하듯 무엇이 이러한 우울증의 원인인가를 찾아 헤매고 싶기도 하다.

우울증은 공격성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공격성은 개인적인 좌절이나 외부에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자극에 의해 우울증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필자가 알고 지내는 정신과 의사는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너무나 강력한 적에 대한 공격성 표출이 자신으로 향한다고 하면 되겠다. 이러한 공격 본능의 메커니즘은 원래 생존과 관련된 기능들이다. 

어쩌면 필자의 우울증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 때문일 수도 있다. 너무 큰 변화는 스트레스를 주어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고 한다(하지만 수년 전부터 큰 변화는 언제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일시적으로 소강 국면인 IT 산업의 분위기가 원인일 수도 있다(IT 산업은 어쩌면 첨단 직종에서 일반적인 제조산업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엇을 해도 즐겁고 새로운 일들이 적어지면서 그럴 수도 있다. 지난 1년 동안 너무 발전해버린 시스템 적응 문제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면 겨울에 읽은 몇 편의 심각한 글들이 머리 속에서 내용 삭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이번 겨울에는 너무 많은 글을 마구잡이로 머리 속에 입력해 내용의 삭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호의 컬럼은 필자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겨울의 단상들을 독자들에게 부분적으로 전염(?)시키기 위한 것이다. 필자는 겨울의 우울증을 지렛대로 이용하여 그냥 지나쳤던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볼 수 있었다. 

지난해에 읽은 글 중에 가장 통렬했던 글은 빌조이의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유나버머 선언문, 고전적인 공산당 선언문, 그리고 GNU 선언문 등 선언문 몇 개를 읽었다(필자는 선언문을 읽는 것을 조금 무서워한다. 예를 들어 필자는 GNU 선언문을 읽고 나서 GNU에 푹 빠졌고 1997년과 그 이후의 사는 방법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창업자이기도 한 빌조이는 IT 업계의 거물이다. 가장 유명한 IT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2000년도 4월의 와이어드(wired.com) 잡지의 기고에서 빌 조이는 어두운 톤으로 미래에 대한 걱정을 이야기했다.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기술은 반드시 사람들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기술들은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 나노기술(Nanotech), 그리고 로봇공학(Robotics, 세 개를 줄여 GNR이라고 한다)이라는 세 가지로 대변될 수 있다고 한다. 

미래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빌 조이는 어느 날 레이 커즈웨일과 한스 모라벡, 그리고 대니 힐리즈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큰 걱정에 빠진다. 역시 몇 개월 전 이 글을 읽던 필자에게도 걱정이 전염됐다(그 전에는 발췌된 글만 읽었으나 전문을 읽기는 수개월 전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 걱정들에서 이렇게 저렇게 빠져 나오는데 몇 개월이 걸렸다. 

조이의 글은 레이 커즈웨일의「The Age of Spiritual Machines」라는 책을 알리기 위한 내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글 중의 많은 아이디어가 커즈웨일 책에서 나왔다. 그러나 컴퓨터 업계의 중요 인물이 공개적으로 걱정거리를 만든 이 내용들은 허구가 아니다. 

레이 커즈웨일에게 충격을 받은 빌 조이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였다. 빌 조이의 글 솜씨는 웬만한 소설가의 편집 솜씨를 가볍게 넘는다. 상식과 상상력 그리고 선동력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새로이 나올 기술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게 했다. 빌 조이의 의도대로 된 것이다. 

정리가 잘되고 호소력이 강한 조이의 글은 언론을 자극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색 평론에서 전문을 번역해 소개한 바 있다. 참고로 빌 조이가 쓴 글의 전문은 
www.wired.com/wired/archive/8.04/joy_pr.html에서 볼 수 있다. 

www.wired.com/wired/archive/8.07/rants_pr.html에서는 빌조이의 글에 대해 Tim O'Reilly나 Bob Metcalfe, George Dyson 같은 관련 인사들의 간단한 평을 달고 있다.
독일의 슈피겔은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지난달 와이어드에는 이 한 문장이 마치 돌에 새긴 계명처럼 표제로 제시돼 있다)'는 문구로 밀레니엄 기획을 시작했다. 정리가 잘된 구체적인 사실들의 배열을 통해 실감할 수 없었던 사실들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이 글의 도입부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새로운 기술적 혁신의 소식에 우리는 무감각해지기 쉽다. 우리는 거의 매일 모종의 기술적 또는 과학적 진보에 관한 뉴스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날 내가 들은 것은 보통 들을 수 있는 예언이 아니었다. 그 호텔 바에서 레이는 곧 출간될 자신의 책(정신적 기계의 시대, The Age of Spiritual Machines0의 사전 인쇄본의 일부를 내게 주었는데, 거기에는 그가 예견하는 하나의 유토피아(인간이 로봇기술과 하나가 됨으로써 거의 영생불사를 누리게 되는)의 윤곽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읽으면서 나는 더욱 불안해질 뿐이었다. 나는 그가 닥쳐올 위험에 대하여, 이 길을 따라갈 때 현실화될 수 있는 나쁜 결과에 대해 좀더 깊이 있는 이해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슈피겔의 밀레니엄 특집은 월간중앙의 홈페이지(
monthly.joins.com)에서 볼 수 있으며 2000년도 중반부터 10회에 걸쳐 연재됐다. 50여명의 전문기자를 동원한 거대한 규모의 특집으로 상당히 훌륭한 자료이다. 모두 합쳐 A4 300매 정도의 분량이다.「The Age of the Spiritual Machines」는 나노미디어에서「21세기 호모 사피엔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매우 훌륭한 번역이었다).



매우 거창한 제목이다.


조이의 글은 먼저 러다이트 운동과 유나버머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한다. 유나버머는 바로 새로운 종류의 러다이트라는 논지이다. 러다이트 운동은 이런 글에는 단골로 등장하며 산업혁명 당시 기계 때문에 삶의 뿌리를 잃고 기계를 파괴하던 일군의 노동자들을 러디스트라고 불렀다. 러디스트의 두목 이름이 러드였으며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러디스트들의 열망과는 달리 사회는 더 산업화되었다. 조이는 새로운 형태의 러다이트로 유너버머를 예로 들었다.

 

 

유나버머
몇 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쇄 폭탄 테러범 '유나바머(Unabomber)'를 기억할 것이다. 한때 버클리 대학 수학교수이기도 했던 유나바머 데오도어 존 카진스키(Theodore John Kaczynski)는 1978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의 한 공학박사를 상대로 폭탄테러를 시작한 이후 15번이나 계속된 폭탄테러로 3명을 사망하게 했고 2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FBI는 유나버머의 수사에서 수사비 최다 지출 기록을 세웠다. 카진스키는 어릴적부터 수학의 천재로 17세에 하버드 입학 25세에 버클리의 종신교수가 되었다가 27세에 교수를 사직하고 잠적하였다. 18년간 테러활동을 하다가 54세가 되던 해에 검거되었다. 

유나버머라는 별명은 주로 대학(university)과 항공기(airplane)에 대한 폭탄테러(bombing)를 일으켰기 때문에 생긴 합성어이다. 정신병자 또는 주변인격 등 수많은 악평이 있고 데이비드 겔런터 같이 직접 폭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비난도 있지만,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유나버머의 선언문이 전혀 억지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필자는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유나버머 선언을 몇 번 읽어보았다. 

그는 체포되기 전 발표한 유나바머 선언문(The Unabomber's Manifesto)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선언문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박탈하는 뉴 테크놀러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선언하에 "현대 기술 산업사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박탈하며 자연을 파괴한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혁명뿐이다. 혁명의 목표는 정부의 전복이 아니라 현존 사회에 존재하는 각종 테크놀러지를 제거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 담겨있다. 이 선언문은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으로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에 전문이 게재됐다. 

먼저 빌 조이가 인용한 내용을 보자. 빌 조이는 이 글이 레이 커즈웨일의 「The Age of Spiritual Machines」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컴퓨터 과학자들이 인간보다도 모든 일을 더 유능하게 해낼 수 있는 지능적인 기계들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럴 경우 모든 일은 기계들의 방대하고 고도로 조직된 시스템에 의해 수행될 것이며, 어떠한 인간의 노력도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기계들이 인간의 감독을 받지 않고 스스로 판단해 결정하는 것이 허용되거나 기계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유지되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이 될 것이다.

기계들이 자기결정을 하도록 하용된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짐작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계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추측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인류의 운명이 기계에 좌우될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인류가 모든 힘을 기계들에 넘겨줄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가 자발적으로 자기의 힘을 기계들에 넘겨주는 일도, 기계들이 의도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고 기도하는 일도 없을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류가 기계들에 의존하는 입장으로 쉽사리 자기를 내맡겨둠으로써 결국 기계가 내리는 모든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회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기계들이 점점 더 총명해짐에 따라 사람들은 기계로 하여금 모든 결정을 내리도록 허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가 내리는 결정들은 사람이 내리는 결정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체제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결정들이 너무나 복잡한 것이 되어 사람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총명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단계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한 단계에서는 기계들이 통제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에게는 기계의 스위치를 꺼버릴 능력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기계에 의존적이어서 기계의 스위치를 끈다는 것은 자살행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계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유지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 경우 인간은 자동차나 개인 컴퓨터 같은 자기 소유의 사적 기계들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규모의 기계 시스템에 대한 통제는 극소수의 엘리트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은 오늘날과 동일하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기술의 진보 덕분에 엘리트는 대중에 대하여 훨씬 더 큰 통제력을 행사할 것이며, 인간의 노동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기 대문에 대중은 잉여의 존재, 체제에 대하여 쓸모 없는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엘리트가 무자비하다면 그들은 간단히 대다수 인류를 제거해버릴지도 모른다.

ㆍㆍㆍ 중략ㆍㆍㆍ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자유로운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들은 가축이나 다름없는 지위로 떨어져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다가,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는 이 구절의 필자가 시오도어 카진스키, 즉 유나바머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나는 카진스키를 변호하고 싶지 않다. 17년에 걸친 그의 폭탄 테러행위 때문에 세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했다. 카진스키의 폭탄 하나는 내 친구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총명하고 비전있는 컴퓨터 과학자인 데이비드 겔렌터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혔다. 많은 내 동료들처럼, 나 자신도 유나바머의 다름 번 목표일 가능성이 높다고 느꼈다.

카진스키의 행위는 살인적인 것이었고, 내가 보기에는 범죄적일 만큼 미친 짓이었다. 그가 러다이트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의 논리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고통스럽지만, 이 구절에 담긴 논리가 갖는 어느 정도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조이의 글에서 카진스키의 인용은 여기에서 끝난다. 그러나 유너버머 선언문에서 카진스키는 좀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심각한 문제를 지닌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우리 세계가 안고 있는 광기 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드러난 광기가 바로 좌파주의(leftism)다. 좌파주의의 심리를 먼저 검토하는 것은, 현대 사회가 지닌 문제를 개괄하는 데 그것이 길잡이 역할을 해 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 좌파주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두 가지 심리적 경향을 우리는 '열등감'과 '지나친 사회화'라고 부르겠다. 열등감이 현대 좌파주의 전체에서 발견되는 특성인 데 반해, 지나친 사회화는 현대 좌파주의의 어느 한 분파에서만 발견되는 특성이다. 하지만 그 분파는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열등감'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말 그대로의 열등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하, 무력감, 비관적 성향, 패배주의, 죄의식, 자기 혐오 등과 같이 열등감과 관계 있는 모든 속성을 포괄적으로 뜻하는 것이다. 

ㆍㆍㆍ 중략ㆍㆍㆍ

좌파들은 강한 것, 좋은 것, 성공한 것의 이미지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증오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은 미국을 증오하고, 서구 문명을 증오하고, 백인 남성을 증오하고, 합리성을 증오한다. 좌파들이 서구를 비롯해 그런 것들을 증오하는 이유와 그들의 진짜 동기는 서로 다르다. 
 그러니 좌파가 미국과 서구를 증오하는 진짜 동기는 그 같은 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좌파가 미국과 서구를 증오하는 이유는 바로 미국과 서구가 강하고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윤리 체계는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에 따라 완벽하게 윤리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아무도 증오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인정하건 않건 간에, 때때로 누군가를 증오한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심하게 사회화된 나머지, 자신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윤리라는 짐 더미에 허덕이면서 윤리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끝없이 자신의 진짜 동기에 대해 스스로를 속여야 하며, 실제로는 비윤리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감정과 행동을 윤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지나치게 사회화된'이라는 말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지나친 사회화는 자기 비하, 무력감, 패배주의, 죄의식 등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어린이를 사회화할 때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어린이가 사회의 기대에 맞지 않는 언어나 행동을 보일 때 창피를 주는 것이다. 이것이 도를 지나칠 경우, 또는 어떤 어린이가 특별히 수치심에 예민한 성격을 지니고 있을 경우, 그 어린이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윤리가 사회화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비윤리적인 갖가지 행동들에 대해서도 순응하도록 사회화된다. 결국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은 끝까지 윤리라는 심리적 쇠사슬을 벗어날 수 없으며, 사회가 그에게 제시한 윤리적 삶을 따라 살면서 평생을 보낸다. 지나치게 사회화된 사람들 대부분은 그 결과, 구속감과 무력감이라는 심각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지나친 사회화야 말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그 어떤 잔혹 행위보다 더 무서운 잔혹 행위라고 생각한다. 

지나친 사회화
어쩌면 우리도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낄 지도 모른다. 특히 사회 전체를 상대로 적대감을 느끼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아니면 우리의 기술 전체에 대한 적대감과 투쟁은ㆍㆍㆍ, 미국 국민의 25%는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해 비관적이라고 한다. 

오래된 PC 한 대를 버리면서 환경 오염까지 걱정하도록 훈련된 필자 역시 어쩌면 지나치게 사회화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모든 원시성을 잃고 이렇게 사육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유나버머를 너무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빛과 그림자 같은 통찰력을 얻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공공의 적'을 보면서 깜짝 놀라버리는 우리는 이미 어느정도는 지나치게 사회화되어 있다.

 

 

 

필자도 독자들도 유나버머가 아니다. 그러나 유나버머의 산업사회와 테크놀러지에 대한 적대적 성향은 우리 모두에게 조금씩 잠재해 있다. 카진스키의 광기를 불러일으킨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사회와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 광기와 공격성들은 과연 조용히 하나의 광적 행동으로 조용히 끝날 수 있는 것일까? 

(유나버머의 선언문은 박영률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판매되고 있다. 이번 컬럼에 글을 발체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 박영률 출판사에 감사한다. 유너버머의 재판 과정에 대해 연대순으로 정리된 글은 www.unabombertrial.com에서 볼 수 있다). 

오늘도 끈질긴 침입광과 편집증적 보안광들은 네트워크 수준에서 서로 싸우고 있으며 보안산업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면 몇 명의 고전적인 유나버머가 러디스트의 산 증거로 존재할 수 있다. 즉 낡은 폭탄에 의해 비행기가 추락할 수도 있고 일부 연구가 중단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들 때문에 빌 조이가 이런 글을 쓰지는 않았다. 빌 조이가 말한 새로운 기술, 즉 GNR이라는 아이템은 해커나 파괴자의 손에 핵무기보다 더 위험한 수단을 공여한다. GNR은 컴퓨터와 뗄 레야 뗄 수 없는 개념이며 사이버네틱스의 최전선에 있다. 커즈웨일의 책은 GNR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의 가능성과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다시 GNR로 돌아와서 
결국 사람들이 잘 살기 위해 만든 기계들에 의해 사람들이 얽매이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게 유나버머의 논지이다. 레이 커즈와일은 자신의 책에서 가속적 발전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피력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을 아예 다른 수단을 통한 진화로 보았다. 커즈웨일은 우울증에 빠지지 않는 낙관적인 천재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전공학, 나노기술, 그리고 로봇공학은 21세기를 여는 기술들이다. 유전자 공학과 나노기술은 이른바 본원적인 기술이다(유전자는 생물의 설계도이다. 분자는 일반적인 물질 속성의 기본적 요소이다. 나노기술에서는 실제로 원자와 분자를 조립하여 물질을 직접 
제조하고 불필요한 분자들을 미세한 나노기계를 통해 분해한다). 

가속적 발전은 지수증가하기 때문에 발전이 어느정도 축적되면 복리이자처럼 불어난다. 예를 들어 80년대에는 터무니없어 보이던 유전공학(필자는 지금도 유전공학의 정확성에는 많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은 이제 주류로 진입했다. 필자처럼 바이오 인포매틱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해당 분야의 책 몇 권을 갖고 있다. 아예 사람들이 상대조차 하지 않던 나노기술에 대한 슈피겔의 취재 기사를 읽다보면 몇 년 후에는 거대 산업으로 변할 것 같다. 그 70년대와 80년대의 초에는 지금의 마이크로컴퓨터가 같은 취급을 당했다.

빌 조이와 커즈와일에 대해 슈피겔과 인터뷰에서 나노테크놀러지의 연구자는 이러한 평을 했다.

"ㆍㆍㆍ빌 조이는 나노테크놀로지를 좀 다루었지요. 요컨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뭔가 좀 끼가 있는 발명가들로, 뜬구름 잡는 소리도 심심찮게 흘립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천재들은 앞으로 탄생할 나노로봇을 어떻게 프로그래밍해야 할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잡다단한 사고 연관을 지원할 수 있는 컴퓨터칩은 아직 요원한 일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빌 조이를 문명 비관론자로 만든 이는 레이 커즈와일인데, 사실 앞서 말한 갖가지 판타지들은 대부분 이 사람이 다 퍼뜨리고 다닌 것들입니다.  커즈와일은 모어의 법칙이 영원히 유효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결국 이런 추세로 나가면 인간의 지능을 따라잡을 컴퓨터 지능이 언젠가는 반드시 등장하리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이 조이로 하여금 제정신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ㆍㆍㆍ"

 

 

 


그러나 빌 조이가 우려했던 것은 정작 발전의 속도가 아니라 이러한 강력한 기술이 통제불능 상태로 악용되는 것이었다. 20세기의 무기였던 방사능
·생물·화학(ABC: Atomic· Bilogiocal·Chemical) 병기와 달리 이들은 생산의 규모나 설비가 적고 이들을 만들어 낼 지식만이 제한사항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요즘은 교과서가 되어버린 나노 테크 책. 90년대 중반까지도 인정받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무어의 법칙 또는 무어의 벽
커즈와일은 무어의 법칙이 2020년경까지는 유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한다. 만약 무어의 법칙이 계속 2020년까지 적용된다면 다시 1000배의 속도 증가가 일어날 것이다. 이 속도의 바탕 위에서 인공지능에 의한 대 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다른 방식으로 처리량의 증가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떠한 임계영역을 돌파하여 창발적인(emergent) 상태로 돌입하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복잡계의 이론인 자기조직론(self-organizing theory)에서부터 사회학적 이론의 도입까지 다양하다. 아무튼 필자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2020년까지 살아서 유나버머나 커즈와일의 예언이 실현되는가를 몸소 지켜보고 싶다. 

무어의 법칙들은 반도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전자에 대한 지식도 약 2
3년마다 두 배로 증가한다. 메카프의 법칙은 시간과 관련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네트워크의 가치는 연결된 컴퓨터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먼지 크기의 컴퓨터에서부터 거센펠드의 생각하는 사물에 이르기까지 사람과 컴퓨터의 연결은 폭증한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또한 이러한 변화의 와중에서 일을 하고 견뎌내야 하는데 우리의 신경은 인공신경이 아니다. 필자의 약한 신경으로 과연 이러한 일들을 다 감내해 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스튜어트 브랜드는 이러한 현상을 무어의 벽(Moore's Wall)이라고 하였다. www.longnow.com에 가면 이들의 주장과 업적을 볼 수 있다. long now는 현재라는 기간의 길이와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SF적 일반론
사실 쓰고 나서 보니 주제가 너무 넓었던 것 같다. 마치 SF 소설을 쓴 느낌이다. 이번호에 다룬 글들은 얼마 후 고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전이라거나 신화라는 것은 특정한 화두와 이미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고전의 가치라는 것은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보편적인 소재가 될 수 있는 데에 있다고 한다).

다음 회에는 민스키(마빈 민스키는 매카시와 함께 인공지능(AI)의 개척자이다)를 주제로 글을 쓰고싶다. 이번호에서 다룬 레이 커즈와일을 비롯하여 빌 조이의 논의상대가 되었던 3명 모두가 민스키의 제자였거나 같이 연구한 적이 있다. 나노엔진을 주창한 에릭 드렉슬러는 민스키의 강력한 비호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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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11:17

펌)순화원ㆍ순화병원 터順化院·順化病院址

이글은 http://sonsang4.egloos.com/m/10965221에서 퍼온 것이다. 

나의  본적지다. 이 옆에 있던 다른 경복궁 부속건물이 있었다.

45번지와 46번지를 오가며 살았다. 우리 할아버지는 피난을 오면서부터 이 병원의 원장이었다.  청십자 운동에 깊이 관여하기 전까지는 ..

하도오래 근무를 하다보니 중구시립병원과 순화병원은 동의어처럼 들린다.

작은아버지도 인터 to 가 없어서 여기서 인턴을 하고 서울대 병원에 레지던트로 들어갔다. 

석세일 교수님과는 동기가 된다.


북한에서 피난을 와서 좋은 구명조끼 역할을 했다.  





순화원은 대한제국과 일본 통감부가 협약하여 설립한 피병원(避病院: 전염병 환자 격리병원)으로 순종 2, 융희 2(1908)년 7월 23일 제사친묘諸私親廟를 합사하라는 칙명을 받들어 유비박씨의 신위가 옥동의 경우궁으로부터 육상궁 별묘로 옮겨진 뒤 사당의 기능이 상실된 옛 경우궁 터에 세웠는데 1909년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 7월 완성되었다.


당시 지은 건물은 목조 기와집으로(1,015.58㎡) 공사비는 31,722원이 소요되었으며 한성위생회漢城衛生會에서 경영을 맡았다. 이처럼 한성위생회에서 경영한 사실은 1911년에 제작된『경성부시가도』에서도 확인된다. 설립 당시 이와 유사한 기능을 담당하던 병원으로는 대한제국의 국립병원 성격인 ▼광제원廣濟院 부설 피병원(▼▼옛 하도감 터에 위치)이 있었다. 그런데 이 피병원은 순화원 공사 시작 1개월쯤 후인 1909년 10월 16일 폐쇄되었다. 따라서 순화원은 광제원 부설 피병원의 기능을 대체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으로도 보여진다.


1911년 순화원 시설이 경성부로 이관되면서 경성부립京城府立순화병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한편 1911년 작성된「경성부시가도」(지도 14)에는 이 병원이‘경성피병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순화병원은 종전대로 전염병 환자만을 취급하였고 한의방韓醫方도 적용하였다 한다. 그러나 순화병원은 80명밖에 수용할 수 없는 부족한 수용시설과 제공되는 식단도 우리나라 식성과 다른 외국식이며 치료방법도 우리나라 전통 의료방식과 매우 달랐던 이유 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로부터는 외면당하였다고 한다.


이후 순화병원은 6·25 전쟁 후 유엔군 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54년 10월 30일 제정된 서울시립병원 설립 조례에 따라 이 자리에는 1959년 서울시립 중부병원이 들어섰으며, 제10대 서울시장 장기영 재임시(재임기간 1960년 5월 2일 ~1960년 6월 30일) 일반 병원으로 용도 변경되었다가 1977년 7월 2일 서울시립 강남병원(강남구 삼성동 68번지)이 신설될 때 통합되면서 폐원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효자동사무소, 옥인변전소, 아파트 등이 들어 서 있다.






광제원(廣濟院) 


대한제국 내부(內部)에서 운영한 병원이며, 고종 36, 광무 3(1899)년 4월에 내부병원에서 출발하였고, 이듬해 6월 보시원(普施院)으로 발족하였다가 같은 해 광제원으로 개칭하였다. 일반 환자들의 진료를 담당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으나 죄수들에 대한 진료와 전염병을 취급하는 별도의 시설도 있었다. 의료비는 국고에서 보조하였고 약은 무의탁자와 죄인을 제외하고는 실비로 제공하였다. 1907년 광제원이 폐지됨에 따라 병원 업무는 대한의원(大韓醫院)으로 이관되었다.




▼▼옛 하도감 터에 있었던 피병원


옛 하도감(下都監: 훈련도감의 분영이며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맞은편에 있었음) 터에 있었던 피병원은 고종 32(1895)년 크게 유행한 콜레라를 치료하기 위하여 비어있던 하도감 건물을 서양의사들에게 제공하면서 개설되었다. 광무 3(1899)년 당시 국립병원이던 광제원 부설 병원으로 되었으나 광무 9(1905)년 경부터 수명의 수사환자(垂死患者)만을 수용할 뿐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자 1909년 10월 16일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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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순화병원


서울시 종로구 송석원길 32 및 자수궁길 18, 22 일대(옥인동 45번지 일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 2002년, 357면


전재(轉載)


이 사진 등을 통하여 일제 강점기의 순화병원 건물을 광복 이후에도 증·개축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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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순화병원(1959년 7월 9일)


서울시청에서 제공한 사진자료(명칭: 옥인동 순화병원 현장, 1959-0103-0003)에 의하면 1959년 7월에도 순화병원으로 불리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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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서울시립 중부병원(1962년 5월 29일)


서울시청에서 제공한 사진자료(명칭 : 중부병원, 1962-0222-0005). 순화병원은 1959년 서울시립중부병원으로 명칭을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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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증축 개관한 서울시립 중부병원(1963년 11월 27일)


서울시청에서 제공한 사진자료(명칭: 중부병원 증축, 1963-065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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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2 02:18

펌)상상력 증폭기와 앨런 케이

예전에 쓴글이다,

찾아서 퍼왔다는..


상상력 증폭기와 앨런 케이 

안윤호 (마이크로소프트웨어) 
2003/07/22 


신경계(neural system)의 기적은 엄청난 데이터가 들어가더라도 결국 필요한 데이터만이 출력된다는 것이다. TV의 프로그램, 인터넷의 페이지들, 잡지의 기사들 그리고 수많은 소스 코드들이 들어가더라도 대부분은 완전히 파기되고 일부만이 남는다. 우리의 신경계는 정보의 필터이다. 나름대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소실된다. 나름대로 정보를 걸러내고 다시 새로운 정보를 만든다. 정보의 파괴는 정보의 창조이다. 신경계가 만들어내는 지능의 핵심은 정보의 창조적 파괴이다. 

신경계 
한 신경세포가 있었다. 이 신경세포는 신경계의 일부이다. 뉴런이라고 부르는 신경계의 조직원인 신경세포는 자극과 다른 신경세포의 전기신호를 처리한다. 컴퓨터의 디지털회로의 논리 게이트처럼 뉴런은 언뜻 보기에는 하나의 부품처럼 보인다. 신경세포의 입력부는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어 있는데 일부는 흥분을 위한 자극이고 어떤 입력은 억제를 위한 신호로 작용한다. 이들의 합으로 신경세포는 점화한다. 자극이 문턱 값인 역치(threshold) 이상이 되면 신경세포는 점화한다. 복잡한 신경망 속에서 이 신경세포는 네트워크의 다른 신경세포에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르고 자신이 과거에 점화했던 신호전달이 다시 몇 개의 네트워크를 통과하여 현재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러한 폭발은 신경세포의 조직에 의한 업의 소산이다. 신경계의 네트워크적인 구조는 전달의 의미구조를 규정한다. 

어떤 신경점화는 매우 강력한 신호이며 일종의 폭발로 신경세포가 얼마간 모아왔던 전해질 이온들을 모두 방전시킬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다. 한번의 큰 신경 폭발이 일어나면 이 신경세포는 얼마 동안은 다시 이온들을 축적하면서 한편으로는 다른 신경세포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작은 자극에도 반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근처의 세포들은 이 신경세포와 같이 발화할 수도 있고 폭발을 촉진하거나 방해할 수 있다. 이들은 세포에 있어서 하나의 환경이다. 이웃들과의 관계는 신경세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아무튼 다세포 동물이 된 이래로 이런 반응은 언제나 반복되었던 것이다. 

'군중속의 고독'처럼 조직의 일원이면서도 고립된 신경세포는 얼마간 자신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한번 폭발을 꿈꾼다. 신경세포는 꿈처럼 크고 작은 자극을 이리저리 축적하여 다시 폭발을 기다린다. 모든 신경세포의 발화는 같아 보이지만 서로 다른 것이다. 어느 정도의 고립은 하나의 꿈과 같이 많은 자극을 축적한다. 다른 자극들과 자신의 생명력으로 수많은 신호가 모아지고 다시 신경세포는 발화한다. 결국 이 하나의 신경점화로 다른 신경세포들이 또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출력이 다시 입력이 되는 전기장치의 IIR 필터 같기도 하고 발진장치 같기도 한 이러한 신경신호들은 지속기간과 강도 면에서 다르며 커다란 한번의 펄스가 되기도 하고 발진기처럼 주기적인 신호들을 내기도 한다. 

비슷한 신경세포가 많이 모이면 강력한 신경신호를 내는 커다란 센터가 된다. 엄청나게 강력한 신호의 합의 합으로 다른 신호들을 압도하게 된다. 세포의 클러스터링은 필연적으로 사회학적이다. 인공지능의 창시자중 하나인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는 그의 저서 「Society of Mind」에서 이러한 현상을 일부 설명했다. 마음(mind)은 마음이 없는 작은 에이전트로의 구성과 조합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뉴런의 조직과 활동이 바로 신경계의 활동인 것이다. 도시와 사회가 간단한 법칙과 조직으로 기능하며 그 구성원인 우리들의 삶이 바로 도시활동의 총체인 것이다. '조직화되는 그 자체가 기능'이라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생물학에 배경을 둔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인 무의식이다. 조직의 세포는 일반적으로 다른 조직에는 이식되기 힘들다. 심지어는 DNA를 공유하는 모설계도가 같은 세포라도 조직 내에서는 분화과정이라는 간단한 소양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완전히 다른 세포처럼 분화한다. 조직의 룰을 무시하는 암세포마저도 자신이 배워왔던 교육과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무의식적으로 원래 조직의 세포의 기능과 외형을 닮는다. 

도저히 하나의 신경세포로서는 벗어날 수 없어 보이는 구조적인 한계 속에서도 우리의 머릿속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든다. 컴퓨터의 회로처럼 얽힌 사람의 신경계는 작은 게이트의 역할을 하는 신경세포의 군집과 조직으로서 서로 통신하며 정보를 처리한다. 차이가 있다면 주로 군집이나 조직으로 느슨하게 얽힌 사회조직 같다는 점일 것이다. 그 안에서 통신이 이루어지고 신경세포의 클러스터링이 정밀한 게이트를 대신한다. 엄밀한 타이밍과 정확성에 의한 결정보다는 군집의 사회통계학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 정밀할 것 같지 않은 조직들끼리의 통신은 일단 어느 정도의 군집내 합의가 이루어지면 매우 정교한 일을 할 수 있다. 이른바 학습 또는 적응이라는 것은 적절한 피드백 시스템을 만들고 적응하는 것이다. 세포들은 어떠한 방법으로든 서로 통신한다. 세포가 모여 개체를 만들어도 통신을 한다. 세포들은 호르몬이나 다른 미세한 화학물질로 블랙박스처럼 보이는 다른 세포들에 영향을 미친다. 간단한 통신체계가 이루어지기만 해도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생물학은 무한한 상상력의 보고이다. 생물학적인 사고방식 중에서 컴퓨터 패러다임에 큰 영향을 준 사례의 하나로 객체지향 프로그래밍(OOP)이 있었다. 앨런 케이(Alan Kay)는 스몰토크(Smalltalk)라는 언어를 통해 OOP를 소개하였다. 앨런 케이의 OOP는 바로 생물학적인 개념에서 출발하였다. 

앨런 케이 
지난번 배너바 부시의 영향을 받은 엥겔바트의 일화를 소개했었다. 지식과 깨달음이 다른 것처럼 엥겔바트에게 있어 자동화와 인간능력의 확장은 다른 것이다. 1968년도에 있었던 엥겔바트의 NLS(oN Line System)의 데모는 엥겔바트 나름의 인간 능력의 확장을 다룬 것이었다. 엥겔바트가 이른바 'artifacts'라고 하는 것들은 유용한 도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다. 도구가 사람의 능력을 확대했듯이 엥겔바트는 원시인과 문명인의 차이를 적응하는 환경에 대한 도구의 유무로 보았으며 새로운 인간능력 확장도구에 대한 일종의 부산물로 인터렉티브한 컴퓨터 환경이 탄생하였다. 특별한 기능을 갖는 물건(artifact)이 만들어지고 이를 도구(tool)로 사용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적응이나 교육(training)을 통해 전체적인 문화(system)를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엥겔바트의 주장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람의 문제해결 능력의 본질적인 상승을 추구하고자 하는 과제는 오늘날의 HCI(Human Computer Interface)보다 더 야심찬 목표였다. 오늘날에도 매우 어렵고 강력한 도전주제가 될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정보공간의 항해(information space navigation)'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등장하였다. 인터넷의 초기 형태도 같은 시기에 구현되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더욱 직관적이고 시각적인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에 윈도우와 GUI의 초기 개념이 등장하였다. 마우스도 같은 팀에 의해 발명되었다. 하이퍼링크와 그룹웨어도 등장하였다. 그 다음은 제록스의 PARC에서 이러한 이상들이 최강의 팀에 의해 놀라운 선견지명으로 구현되었으나 상업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당시의 신흥세력이던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텍스트 환경에서 GUI로 전환하기 위해 이러한 아이디어를 구현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는데 가장 중요한 개념들은 꿈꾸는 몽상가들의 아이디어로부터 나왔다. 꿈이라는 것, 이상이라는 것이 거의 사라지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무엇인가를 개척해야 하는 일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은 요즘의 컴퓨터 업계는 무엇인가 새로운 비전이 필요할 것인데 어떤 꿈이 사람들을 사로잡으면 그것이 새로운 비전이 될 것이다. 

앨런 케이는 엥겔바트와 마찬가지로 배너바 부시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케이는 어렸을 때 부시의 글을 하인라인이 소설화한 SF 단편을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충실한 고유한 장치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FLEX, 노트북의 원형이라고도 하는 다이나북(DynaBook) 그리고 객체지향의 시작이라고 하는 스몰토크를 만들어냈고 매킨토시의 원형 개발에도 관여하였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케이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이들을 실행에 옮겼다. 1970년대와 80년대가 그의 전성기였다. 1940년생인 앨런 케이는 이미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어린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두고 왕성하게 활동중이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은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과 무관하지 않다. 

세포 
앨런 케이는 생리학자였던 아버지와 예술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다. 예술과 생물학은 두고두고 케이에게 영향을 미쳤다. 앨런 케이는 직업적인 재즈 아티스트 생활을 하기도 했고 음악가가 될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의과대학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생물학과 수학으로 대학을 졸업 후 컴퓨터 과학의 길을 걷게 된다. 컴퓨터는 2년 간의 군복무 기간중 프로그래머 생활을 하면서 접하게 되었다. 컴퓨터의 길을 걸으면서 앨런 케이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몇 명의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까지는 앨런 케이의 학교생활은 엉망이었다. 명문인 부롱크스 과학고에서는 정학을 당하고 류머티스 열로 쓰러졌으나 학점을 이수하여 간신히 졸업했고, 베다니 컬리지에서는 학교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제적을 당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콜로라도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거의 무대 음악을 작곡하면서 시간을 보냈으나 간신히 졸업할 수는 있었다. 

학부 졸업후 대학원 과정을 유타 대학에서 시작한 앨런 케이는 데이브 에반스(Dave Evans) 밑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에반스는 일종의 도박으로 학적부가 엉망이었던 앨런 케이를 대학원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에반스는 ARAP의 후원으로 초기의 시분할(time sharing) 컴퓨터 개발에 관여하고 있었다. 군복무 시절부터 프로그래머로서의 소질은 일찍부터 주위의 관심을 끌었으나 과연 과정을 무사히 마칠지가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앨런 케이와 함께 유타에 새로 기용된 인물은 이반 서덜랜드(Ivan Sutherland)로 MIT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컴퓨터 그래픽스'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든 사람이었다. 앨런 케이는 서덜랜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반 서덜랜드의 스케치 패드(Sketch Pad)는 최초의 그래픽 시스템으로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것 이상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 마스터(master) 도면과 사례(instance) 도면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프로그래머는 마스터 도면의 속성에 대한 제한을 할 수 있었으며, 스케치 패드는 사례 도면을 받아서 제한조건들을 검토한 다음 다시 이 제한에 대한 변경을 시도할 수 있었다. 유타에 오기 전에 서덜랜드는 3D HMD(Head-Mounted Display)를 개발하기 위해 하버드를 떠났다. 에반스는 서덜랜드를 유치하기 위해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사업을 해보자고 권유했고 그 결과 에반스 앤 서덜랜드(Evans & Sutherland)라는 회사가 탄생하였고 플라이트 시뮬레이터(Flight Simulator)와 상업적 그래픽에서 전설적인 회사가 되었다(www.es.com). 

앨런 케이가 처음으로 유타에서 맡은 일은 서덜랜드가 건네준 학위논문 더미를 읽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스케치 패드의 목적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다음의 일은 시뮬라(Simula)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뮬라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시뮬라는 노르웨이의 Kristen Niggrd와 Ole-Johan Dahl이 개발한 언어로 마스터와 인스턴스를 구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ALgol 60으로 알고 분석을 시작했던 앨런 케이는 결국 시뮬라는 스케치 패드의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케치 패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홀연히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마스터로 행동을 정의하면 인스턴스는 그 정의를 따르게 되는 원리였다고 한다. 케이는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는데 결국 독자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스케치 패드나 시뮬라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생물의 세포처럼 행동한다는 발상이 케이로부터 나왔다. 첫 번째로 모든 세포적 인스턴스는 기본적인 마스터 행동양식을 따른다. 두 번째로 세포들은 자치적이며 보호막을 빠져 나오는 화학적 메시지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세 번째로 세포들은 분화가 가능하다. 동일한 세포는 자신의 문맥상 위치에 따라 다른 조직의 세포가 될 수 있다. 나중에 스몰토크의 구현에서는 이러한 아이디어들이 포함되었다(스몰토크의 초기 구현 개념은 1981년 Byte지에 실린 스몰토크의 구현자인 Daniel Ingalls의 'Design Principles Behind Smalltalk'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요즘의 객체지향에 관한 책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갖고 있다. http://users.ipa.net/~dwighth/smalltalk/byte_aug81/design_principles_behind_smalltalk.html 참조). 

FLEX, 다이나북, LOGO 그리고 스몰토크 
에반스의 학생이었던 앨런 케이는 1967년도에 에드치들과 함께 초기의 데스크탑인 FLEX를 설계한다. 사람들이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하면서 이들은 초기의 문제에 부딪힌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컴퓨터를 사용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개인용 컴퓨터의 기본 문제인 사용에 대한 확장의 예측가능성이 문제가 되었다. 초기부터 확장 가능한 언어의 필요성이 나타났고 퍼스널 컴퓨터의 문제는 소프트웨어에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 병행하고 있던 시뮬라나 스케치 패드와 관련해서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케이의 분류에 의하면 컴퓨터 언어는 2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바이올린처럼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는 종류이고, 다른 하나는 연필처럼 문자를 아는 사람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쉬운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새로운 언어에 대한 구상을 떠올리게 된다. 

FLEX는 나중에 ARPA의 전시회에서 공개되면서 호평을 받았으나 정작 케이의 관심을 끈 것은 그가 전시회에서 처음 구경한 초기의 평판 디스플레이였다고 한다. 나중에 자신의 다른 작품인 다이나북의 구상에는 평판 디스플레이가 들어 있었다. 

1960년대의 말엽에 생물학적인 접근법과 함께 케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나는데 그것은 세이무어 페퍼트(Seymour Papert)와의 만남이다(www.papert.org). 페퍼트와의 만남으로 케이에게는 교육이라는 커다란 화두가 하나 더 생겼다. 그 당시 마빈 민스키와 함께 MIT의 AI 연구소를 이끌어가던 페퍼트는 그 당시에 어린이들을 위한 언어인 LOGO를 만들고 있었다. 그 전에 페퍼트는 5년 간 스위스에 가서 발달 심리학의 대가인 피아제(Jean Piaget)와 함께 연구를 한 적이 있다. 피아제는 수십 년 간 아동들이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 배우고 관찰하곤 했다. 

피아제에 의하면 배움(learning)은 어른들이 교사와 칠판을 통해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이 세상에 적응하도록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능력의 핵심 부분이며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에 대한 그들의 표현법을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피아제는 어린이들이 지식을 획득하는 과정을 관찰하면서 어린이들이 근본적으로 과학자라고 결론지었다. 어린이들은 실험을 하고 이론을 형성하며 그 이론을 실험을 통해 검증한다. 이 과정은 어른들에게는 놀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어린이들에게는 나름대로 연구의 핵심적인 형태라는 것이다. 
페퍼트는 컴퓨터의 응답성과 표현능력이 어린이들이 칠판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정도의 연구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MIT의 동료들과 BBN의 협력으로 기존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 LOGO는 어린이들이 컴퓨터를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필자도 Harold Abelson의 책으로 배워본 적이 있는 LOGO의 문법은 LISP과 비슷하다. 표현력은 매우 강력하여 역시 LISP과 유사한 형태다. LOGO는 아직도 개발중이다(http://el.media.mit.edu/logo-foundation/). 

페퍼트는 민스키와 함께 매우 복잡한 사람으로 한정된 지면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최근에는 레고 마인드스톰의 개발에도 관여했는데 마인드스톰(mindstorm)이라는 용어는 그의 저서 「Mindstorms: Children, Computers and Powerful Ideas」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은 그의 강연집을 책으로 만든 것으로 책의 주제는 모든 도구는 사람들이 더욱 인간적이 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담고 있다. 나중에도 페퍼트는 미디어랩 시절에 해니건 학교에서 lego/logo 과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후 레고사는 레고 LOGO 언어를 발표하고 있다. 

LOGO가 컴퓨터 과학과 인공지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개발자들은 알고 있었다. 프로젝트의 1차 목적은 어린이들에게 생각하는 방법과 문제해결 능력을 향상시키도록 도와주는 도구를 창조하는 데에 있었다. 어린이들이 문제 해결 능력의 향상을 재미와 보상으로 자연적인 욕구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실제의 작은 로봇인 로고 거북(LOGO Turtle) 같은 도구들이 개발되었고 어린이들은 스크린이나 실제의 거북 로봇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교육받았다. 지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연구그룹의 중요한 목표였다(knowing how to learn이라는 화두가 중요하다). 

페퍼트의 팀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본 앨런 케이는 개인용 컴퓨터에 대한 그의 의식 자체가 또 한번 크게 변하게 되었다. 나중에 스몰토크를 만들었을 때 제일 먼저 어린이들을 가르치도록 한 것은 페퍼트의 영향이 크다(최근의 케이 역시 페퍼트처럼 자신이 구현한 스몰토크 환경인 Squeak((www.squeak.org)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LOGO의 경험이후 케이는 심사숙고한 결과 2년 간 지지부진하던 자신의 FLEX의 문제가 사용자들이 쉽게 사용하기 어렵다는 단순한 사실을 발견했다. 한번도 어린아이들도 쓸 수 있을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나 언어가 반드시 장난감(toy)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장난감이 도구가 될 수 있으나 이러한 변화는 언어 설계자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퍼스널 컴퓨터의 핵심적 요소는 소프트웨어 툴에 있고 좋은 툴들은 사람들의 학습능력을 향상시킬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엥겔바트의 표현을 빌면 하나의 새로운 artifact로서 사람의 학습능력을 증폭시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툴의 제작은 많은 노력이 수반되는 것으로 사용하기 쉬운 프로그램의 제작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artifact는 8살의 어린이가 모래성을 만드는 장난에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마천루의 설계에도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는 정도에 비유할 수 있다. 이 도구는 부시의 메멕스 기계처럼 문자나 그림, 음악을 전송할 수 있어야 하고 도서관이나 전람회를 방문할 수도 있어야 할 지 모른다. 결국 앨런 케이는 완전히 동적인 매체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엥겔바트의 NLS 같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형태의 매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언어도 LOGO보다는 더 나은 형태로 더 사용하기 쉽고 간단하며 높은 수준의 프로그래밍에서도 질적인 향상이 가능해야 하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더 쉬운 형태로 증폭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성이 있어야 했다. 그 당시의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는 구현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케이는 일단 FLEX에서 멈춰야 했다. 

앨런 케이는 제록스의 PARC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ARPA의 몽상가였던 밥 테일러는 PARC의 책임자가 되어 많은 우수한 인력을 한자리에 모았다. 경영위기에 빠진 버클리 컴퓨터 연구소에서 버틀러 램슨을 비롯한 많은 인재를 확보했으며 스탠퍼드 연구소의 엥겔바트의 Augmentation Research Center에 있던 인력들도 합류하였다. 

당시에 FLEX의 후속작으로 KidiKomp라는 작은 노트북을 설계하였다. 그 후 Learning Research Group을 만들고 사람들과 노트북에 대한 이상을 공유하였다. 다이나북이라는 혁신적인 노트북 컴퓨터의 원형을 설계하기도 하였으나 완전히 구현하지는 못했다(Ryan Bob, "Dynabook Revisited with Alan Kay" Byte지, vol 16, 1991년 2월호). 나중에 나온 워크스테이션인 Alto 정도가 어중간하게 다이나북의 이상에 근접한 정도였다. 

1972년 9월 케이는 독립적인 세포처럼 존재하며 메시지를 주고받는 간단한 메시지 메커니즘을 정리하였다. 이런 간단한 메커니즘이 언어 전반에 걸쳐 잘 동작하기를 바라면서 얼마동안 자신의 아이디어를 요약했다. 그 후 며칠만에 동료인 Dan Ingalls가 언어를 구현해 주었다. 이른바 OOP의 시작이었다. 이후 스몰토크는 다시 한번 개정되어 스몰토크-80이 되었다. 

컴퓨터에서 언어는 매우 중요하다. 언어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기호 언어에서 언어는 하나의 문맥으로 어떤 개념은 특정한 언어에서 더 쉽게 생각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기호 같은 것은 애매하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명료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케이에게 있어서 스몰토크는 시뮬레이션과 상상력의 중요한 도구로 볼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의 과학적 발견이라는 것은 사물을 관찰하고 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인데 반대의 견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정한 법칙을 먼저 만들고 그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케이에 의하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시뮬레이트하는 것은 컴퓨터를 상상력의 증폭기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LOGO에서는 컴퓨터가 부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터틀의 시뮬레이트된 우주를 마이크로월드라고 불렀다고 한다. 케이의 생물학적인 가상우주에서는 모든 객체가 마이크로월드에 해당한다고 한다. 세포가 실제로 하나의 작은 우주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컴퓨터 발전 단계의 초기 세대에 해당하는 앨런 케이는 80년대 초반 이후 그 이전만큼 천재성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짧은 세월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객체지향 프로그래밍의 패러다임은 오래 살아남아 구조적 프로그래밍의 뒤를 이어 1990년대 이후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스몰토크는 OOP의 진정한 시작이긴 했으나 C++나 자바 같이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다만 OOP라는 개념의 영향력만이 남았다. 초기에 스몰토크가 어린이들을 상대로 테스트된 것을 생각하면 필자는 오늘날의 OOP는 너무나 복잡해서 원래의 구상에서 많이 멀어져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언어의 구현자들이 노력하지 않은 탓일까? 

엥겔바트나 부시와 마찬가지로 케이의 꿈은 인간능력의 확장(augmentation)이었다. 상상력과 학습능력에 관한 개선이 본질적인 주제였던 것이다. 페퍼트 같은 사람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이상을 구현하려 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교육은 일종의 새로운 조직분화를 시키는 작업이다. 교육의 힘은 매우 커서 세포분화처럼 사람들은 이 구속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앨런 케이 역시 주변의 강력한 인물들로부터 받은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쩌면 진정한 프로그래밍은 컴퓨터가 아니라 프로그래머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을 프로그래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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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19:32

아주 긴 이야기 텐세그리티

버전 레코드 0.0 시작하다. 


이제부터 아주 긴 이야기를 적을 것으로 보인다. 

텐세그리티와 버크 민스터 풀러의 이야기다. 

버전 0.0 부터 시작해서 0.999 까지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사실 끝도 없이 계속될 것이다. 이유는 내가망각대왕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와 함께 진행될 로봇제작 이야기도 아마 길어질 것이다, 게으르기 때문이다.

우선 몇개의 비디오를 보면서 진행해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ukuHtG6himY&feature=share

이 동영상을 보고 깨달았다. 옥타헤드론 트랜스포메이션 !
나만의 유레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8pFRoIrnk&feature=share

한번 더 깨달았다. 트랜스포메이션


https://www.youtube.com/watch?v=iL9y2MLz4_A&feature=share

이것은 테트라헤드론의 변형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Ke_IVPXhc9k&feature=share

이것은 테트라헤드론 트랜스포메이션이다.ㅣ


https://www.youtube.com/watch?v=HefLC3PW8XQ&feature=share

이것은 앞의 두가지 트랜스포메이션을 같이 그 것도 실물로 보여준다.


https://www.youtube.com/watch?v=FfViCWntbDQ&feature=share

그냥 지터버그 변환이라고 부르던 것은 사실 옆으로 보면 8면체인 것이다.
아무튼 이 속에는 무엇인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oUVDAgFtho&list=UUUlDPEzri1RhocNZ_lBiP1w

나는 망각대왕이니 페이스북이나 블로그가 없으면 큰일이다. 
duality라는 것이 있는데 duality는 플라토닉 솔리드이 중요한 특징이다.
벅민스터 풀러의 우주론을 이해하려면 이런 것들을 웬만큼 알아야 한다.
요즘에야 내가 나를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예전보다 머리와 힘은 나아지고 있다. 다행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saOP5NMcCM&feature=share
앞서 적은 것의 2부다. 설명이 쉽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이해가 쉽다.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대단히 좋은 비디오다.
나중에 이것들을 모두 편집해야 할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9sM44p385Ws&feature=share
버크민스터 풀러 자신의 지터버그 변환을 보이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CpNGYu64ps&feature=share

장난감 만들기의 블랙홀을 발견한 느낌이다. 

발음이 엉망인 아빈드 굽타의 홈페이지는 어쩌면 난지도일지 보물섬일지 모르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KE0wGpigCBE&feature=share

언젠가 로봇을 현재의 강성 모델이 아니라 텐세그리티 비슷한 것으로 만드는 날이 올 것으로 보인다. 

공간의 경제학 , 가장 경제적인 모델 .. 등을 주장한 다이맥시온 / 시너제틱스 모델은 중요한 개념이었다. 

바이올로지의 구조물을 텐세그리티로 보는 일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W8pFRoIrnk&feature=share

앞의 동영상들을 보고나면 조금 이해할 것 같기도 한 클립 ... 몇번을 더 보기로 하자.


http://kjmaclean.com/Geometry/Cubeoctahedron.html

오늘도 나름대로 관심을 끄는 사이트 발견 .
중요한 것은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관점이기도 하다. 
적어도 위키보다는 재미있다. 

cube octahedron은 큐브의 모서리만을 따서 만들 수도 있다. 
풀러는 이 도형으로 옥텟 트러스를 떠 올렸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ZOqg5bPZ0HE&feature=share

신성한 기하학 - 여러가지 종교적인 문양들은 기하학이자 과거에는 보석 커팅의 주제였고 영감의 원천이었다. 현재 나에게는 그냥 공부이자 집착(중독)이다.


 http://www.laetusinpraesens.org/docs80s/80vecteq.php


너 자신을 알라라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이말은 자신을 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집단을 알아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라고 누가 말했다.
좋은 해석이다. 



http://cosmometry.net/vector-equilibrium-&-isotropic-vector-matrix
아무튼 오늘은 나랑 비슷한 관심사를 갖는 사람의 사이트 하나를 더 발견했다. 

오늘은 하나 더 발견한 느낌이다. 
6개의 원이나 6각 링으로 만드는 것이 큐보헤드론이고 
31개로 만든 것이 텐세그리티 볼이다


스페이스 프레임이라는 것은 주유소 지붕이나 공장에도 있고 과학관에서도 흔히 보는 구조다. 벅민스터 풀러와 그레엄 벨은 각기 독립적으로 발명을 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구조물은 기하학적으로 매우 많은 요소를 담고 있다.


우선 머리가 아프기는 해도 그림이 많은 사이트를 한번 들러볼 필요가 있다. 
http://the-arc-ddeden.blogspot.kr/2010/02/interim.html


버크민스터 풀러가 옥텟 트러스를 만들 당시의 개념도이다,
A Guided Tour of Buckminster Fuller 에서 스캔했다.




탁구공을 빼곡히 쌓아놓았을 때 2층과 3층일 때에 나오는 지오메트리는 달라진다. 

시너제틱스 , 지오데식 그리고 옥텟 트러스와 텐세그리티의 개발은 수학공식을 쓴 것이 아니라 탁구공이나 나무막대를 놓고 영감을 얻었다. 풀러에게 이런 구조는 우주의 구조이기도 했다. 

웹을 뒤지다보니 비슷한 그림이 있어서 망각을 막기 위해 적어 놓는다. ]

http://evolvingbuildingblocks.blogspo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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