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컬럼'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09.12.16 시간의 경제학-시간통계학
  2. 2009.11.03 총명탕 이야기
  3. 2009.11.02 과학혁명의구조
  4. 2009.10.24 혁명을 뒤에 붙인 시기들 (과거컬럼)
  5. 2009.08.29 기억과 역사
  6. 2009.05.06 NT 나오다.
2009.12.16 07:17

시간의 경제학-시간통계학

역시 예전의 글이다. 
나는 시간의 경제학을 zdnet에 연재한 적이 있다. 

그 많고 이상한 글중의 하나


시간의경제학-시간통계학

-링크

몇 년 전 <링크>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였던 적이 있다. 네트워크와 복잡계를 다루는 이 책의 요지는 단순하다. 링크가 많이 걸리는 네트워크는 성장하고 링크가 적은 네트워크는 쇠퇴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비즈니스 핵심이기도 하다. 포털이나 허브를 지향하는 사이트는 링크나 스쳐가면서 들르는 링크로 사람들을 편입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링크의 수가 증가하는 노드는  엄청나게 증가하지만  그렇지 않은 노드는 주목을 받지 못하고 링크수가 급격히 감소한다. 체증수확의 법칙이 강력하게 적용되는 복잡계이다. 저자는 일을 판가름하는 핵심 요소가 선호도라고 한다. 선호도가 조금이라도 높은 경우 처음에는 차이가 적어보이는 불평등 성장이 시작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불평등이 심해진다고 한다. 선호도가 높은 링크는 더 보강되고 선호도가 낮은 링크는 그 노드로 가는 링크마저 희미해진다. 

구글은  하이퍼링크의 유효성을  평가하는 페이지랭크 방법을 만들어서 유명해졌다. 페이지랭크는 많은 수학적인 트릭에 의존한다. 신기하게도 유효한 검색 상위리스트 몇 개만으로도 대부분 만족할 수 있었다. 실제로 높은 링크계수를 갖는 상위의 몇 개 사이트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것은 그 자체로 다시 중요하게 된다. 그런데 링크의 선호도는 주관적인 것이라 페이지의 디자인이나 배열이 , 또는 영향력이 큰 블로거의 존재 같은 요소들에도 좌우될 수도 있다. 구글은 만우절 포스팅에서 피전(pigeon Rank)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비둘기들이 웹페이지를 보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부리로 선택하여 투표하는 것이었다. 물론 농담이긴 했지만 신랄한 풍자로 기억한다.  

  


현실에서 선택은 일어날 수 밖에 없고  실시간으로 일어난다. 선호도가 떨어지는 놈들은 리스트의 순위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선택은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경우도 많고 논리적인 이유도 잘 모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유를 모른다해도 링크가 적은 길이나 노드는 곧 잊혀진다.  이유는 별것이 아닐 수 있다. 웹사이트의 디자인이 잘못되어 “비호감”이 될 수도 있으며 레이아웃이 산만한 결과가 치명적일 수 있다. 사람들의 변덕이 결과를 흔들어 놓기도 한다. 어떤 사이트로의 경로는 자꾸 줄어들을 수 있고 , 시간이 지나면 잊혀진 사이트로 사용자들을 이끌 신통한 검색엔진은 없을 것이고  없어진 것으로 의심되는 링크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지는 정말 의심스럽게 된다. 사람들의 기억이 희미해진 연예인이나 잘나가던 사람들이  빠르게 그 거취마저 알기 힘들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럴 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해피엔딩도 있지만 필자는 그 반대의 경우를 더 많이 알고 있다. 네트워크들이 재편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적네트워크에서도 링크 서열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한다. 때로는 조용히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세포나 사람은 컴퓨터와 달리 정말로 생물학적인 문제들을 일으킨다.  사회라는 뉴럴 네트워크 속에서 조직을 만드는 세포들은 이상한 방법으로 스스로 파괴되며 사람들은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건강이 나빠지기도 한다. 그전까지 멀쩡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들도 그렇다. 마치 할 일이 없어져서 버림받은 일개미나 일벌처럼 이상해지는 것이다. 조직의 세포들은 중요하지 않게 되면 저절로 죽는 사이클이 있다. 그런 호르몬이나 화학물질이 실제로 있다. 반대로 중요성이 올라가는 개체들이나 세포들은 활력이 증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세포의 모양마저 예전과는 몰라보게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편리한 메카니즘이다. 우리의 몸 조직이 이미 이런 작업들의 산 증거다. 자연계에 있는 복잡한 시스템들은 불필요한 것들이 스스로 소멸되도록 하여 시스템을 조율한다. 직접 죽이지는 않더라도 간접적으로 소멸시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충분히 개발해 놓았던 것이다.  효과적이며 실제에서는 강력한 효과가 나타난다. 

심리학에서는 공격성의 대상이 자기 자신으로 향하는 우울증이라는 것이 있다. 흔히 말하는 스트레스와 관련된 증상들을 넘어 수명이 짧아질 많은 일들이 갑자기 증가한다. 그러다가 자신에 대한 공격성이 수그러들면 증상이 급격히 좋아지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바꾸는 것이 키워드이다. 평상시 자기에 대한 평가가 낮거나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경우 상황은 빨리 악화된다.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는 특별히 이런 공격성들이 문제가 된다. 경쟁자에게 밀리거나 사회 서열의 강등이 일어나거나 사람들의 외면 정도로도 상당히 위험하다.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꽤 위험하다.  실제로 죽이지 않더라도 적대감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줄 수 있다. 

문제는 개인들의 욕구나 무의식의 근원이 뚜렷한 이유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일들의 원인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절 시스템은 잔인할 정도로 효과적이다. “나는 필요가 없는 사람인가 보다” 라고 생각이 드는 그 순간부터 이상한 사이클이 시작된다. 나중에 살펴보면 그 발단이라는것이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소멸의 사이클이 개시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잠시 동안의 경험으로도 해당 당사자는 심각한 손상을 입고 사회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괴로워하던 사람이 주위사람들의 격려로 갑자기 복귀하는 경우를 보면 심각한 원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의해 사람의 활력이 바뀌기도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통계가 있는데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은 경쟁관계에 있던 연구자들보다 몇 년을 더 산다고 한다. 살면서 자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활력에 넘치고 오래 산다고 한다. (앞서 말한 경우의 반대다. ) 그만큰 선택은 주관적이다.  

선택 시스템에서 적응이나 기능의 실패라는 것이 개인의 실패 (personal failure)인 경우도 있지만 시스템의 실패인 (system failure)경우도 있고 조직의 실패인 경우도 있다. 보통은 개인의 실패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스템 실패인 경우도 분명히 있다. (어떤 일들은 정책이나 사회 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나타난다. 이런 일이 예견되어 있어도 피해자는 개인이다.) 개인이 사회의 흐름이나 분위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경우도 있어 평가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개인의 실패와 시스템 실패의 구분은 필자에게는 사실 중요한 화제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열심히 살았지만 사회시스템이 잘못되어 일이 이상하게 풀리는 사람도 꽤 있기 때문이다.   운영체제의 실패와 그 속에서 수행되는 어플리케이션의 관계와 같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 구소련의 계획경제는 실패에 빠지는 정책들이 많았다. 관료들이 테이블위에서 종이에 그려본 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사람들에게 종용했다. 잘못된 것으로 생각되어도 당이나 지도부에 대한 불평발언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사회에서 사람을 격리 수용하거나 육체적으로 괴로운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결국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시스템 실패는 그 시스템에 속한 사람들의 실패와 고통으로 이어졌다. 지도원이 지침을 하달하면 또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자본주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시스템을 바꾸는 가능성은 없지는 않지만 매우 낮다. 극심한 경쟁(때로는 과도함을 넘어서는 경쟁) , 숫자 놀음처럼 보이는 유동성 , 에너지를 잃어가는 사회들. 이미 문제는 많은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공격성이 스스로를 향하여 자신을 파괴할지 아니면 공격성의 방향을 바꿀 정치활동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정치가들은 사람들과 이런 게임을 하는 일에는 천부적인 사람들이다.) 좌절처럼 보이는 일이나 힘든 시간은 어디에나 있다.    

외부의 평가기준이 사람들의 능력이나 활동의 모든 것이라면 기준은 언제나 흔들린다, 외부상황의 변덕과 시스템 실패에 대해서 속수무책이다. 복잡해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기준에 의해 흔들리는지 조차 모르고 흔들릴 수밖에 없다. 판단의 기준은 많으며  그 기준을 만든 사람들마저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  시스템의 평가를 우회하려면 스스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어처구니 없는 평가 시스템에 의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난번에는 자기계발 열풍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자기계발의 평가 아이템들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것이 옳건 그르건 열심히 일하는 노력 영웅도 많다. 조금 더 영악해진다면 다른 사람들을 잘 관찰하고 새로운 목표를 의도적으로 던져줄 수도 있다. (일종의 밈(meme)게임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악용하는 방법을 개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하나의(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해결책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보는 일이며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이것도 고전적 정신훈련법들에 나오는 방법의 재탕이다.) 스스로 하나의 평가센터가 될 수밖에 없다. 노력영웅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면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죽도록 했더니 사회의 가치기준이 변해버려서 후회만 남을 수 도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시스템 실패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인의 실패는 그보다는 더욱 아닌 것이다.  

이때 질문할 내용은 무척 많다. 사회가 요구하는 코드를 잘 못 읽어 냈다고 해야 하는가? 자신이 정한 목표가 잘못된 것인가? 잘못된 지적 컨텐츠를 만들어 낸 것인가? 목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일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완벽한 예는 아니겠지만 평생 동안 자신을 평가하기도 하고 목표를 만들기도 하는 사람의 예가 있었다. 류비셰프라는 구소련의 학자였는데 이 사람은 자신의 시간속에서 시간을 기록하며 열심히 살았다. 지적인 생산성도 높았으며 괴짜이긴 하지만 많은 팬들이 있었고 오래도록 건강하게 살면서 일도 많이 했다. 시간에 대해 조급증을 내지도 않았으나 낭비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학대하지도 않았고 늘 일정했다. 그라닌이 쓴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라는 책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필자에게는 연구 대상인 사람이다. 


-시간 통계학

많은 수는 아니지만 자기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하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하고 보상인 사람들이다. 물질적 보상이나 권력 같은 것보다 일 그 자체가 주요하고 몰입의 대상이 된다.  몰입은 자주 일어난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도 갖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실제로 병을 만들어 내거나 활력을 만들어 낼만큼 강력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서 관심과 생각을 통제한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기목적성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보상이 일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것은 일에서 일 자체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일을 하기위해 마음과 관심을 통제하고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훈련이기도 하다. 관심을 갖고 어떤 일에 공을 들이면 흥미와 관심은 더 증가한다. (관심은 관심을 부른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은 점차 중요하게 될 것이다. 현대의 지식 경제라는 것이  생각하는 방법과 교육(광고와 홍보도 교육에 속한다.)그리고 재교육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직업을 갖 기 전까지 많은 시간을 교육기관에서 보낸다. 직장에 다니면서 많은 일이 페이퍼워크와 기안이며 고급 리포트쓰기의 연장처럼 보인다. 업무의 재교육을 포함해 고객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광고와 이미지를 제공하는 것까지 교육기관을 닮아간다. 그 다음에는 또 많은 보수교육과 재교육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의학은 예전부터 긴 교육기간이 필요했고  보수교육 , 재교육을 강조했다.  지금은 이런 일을 하지 않는 분야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주입적인 학교를 제외하고 변화와 힘을 가져다주는 정신적 에너지가 넘치는 창조적인 학생이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냥 열심히 학교만 다나는 학생보다 중요하다. CEO나 관리자는 교장선생님과 비슷한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류비셰프의 책을 읽은 사람들이 실망을 하는 이유는 단기간에 어떤 방법을 만들어주는 내용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생각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간을 다루는 방법은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시간을 쓰는 것을 생각하는 일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은 통계로 변한다. 류비셰프는 이일을 평생 동안 해왔다.  그래서 긴 시간이라는 용어를 썼다. 긴 시간을 공부나 창조적인 일과 비슷한 작업을 해야 한다면 긴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매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적으면 자신의 한계와 일정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얻어낸 것은 필요로 하는 시간과 자신의 변화였다. 

류비셰프는 많은 저작을 남겼다. 생전에 그는 70여 권의 학술 서적을 발표하였다. 총 1만 2,500여 장에 달하는 논문과 연구 자료를 남겼다. 많은 시간을 투입해야했다.  류비셰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인내심과 끈기를 발휘했고 이 일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82세에 생을 마친 그는 마지막 몇십 년 동안에 가장 높은 학구열과 창의력을 보여주었다. 책의 저자는 그 방대한 연구 실적보다는 도대체 무엇이, 어떤 방법이 이를 가능케 했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저자는 류비셰프에 대해 더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방법론은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며 류비셰프가 수행했던 연구와는 별도의 독립적인 업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시간을 적는 것은 통계표 같았다. 류비셰프도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나면서 그 생활 방법은 강인한 정신력과 도덕적인 힘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 방법은 류비셰프의 삶에 버팀목이었고 고도의 생산력과 힘이 바로 이 방법을 바탕으로 하여 발휘된 것이었다.  류비셰프는 1916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일기라 할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 한 일을 간단하게 나열하고 시간과 분을 계산한 후 옆에 다시 이상한 숫자를 적어두었다.

일기의 한 장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1964년 4월 7일, 울리야노프스크.
  - 곤충분류학 : 알 수 없는 곤충 그림을 두 점 그림. 3시간 15분.
  - 어떤 곤충인지 조사함 -20분 (1.0).
  - 추가 업무 : 슬라바에게 편지 -2시간45분 (0.5).
  - 사교 업무 : 식물보호단체 회의 -2시간 25분.
  - 휴식 : 이고르에게 편지 -10분.
  - 울리야노프스카야 프라우다 지誌 -10분.
  -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 - 1시간 25분.
  기븐 업무 - 6시간 20분.
 
수백 쪽이 모두 마찬가지로 단조롭고 지루한 대여섯 줄의 기록뿐이었던 것이다. 류비셰프는 이런 저런 글을 쓰는 데 며칠이나 걸렸는지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일기의 핵심은 바로 시간이었다. 저자가 최소한 처음 일기장을 훑어보았을 때의 느낌은 그랬다.  일기도 아니었으며 류비셰프 자신도 일기라 주장하지 않았다. 자기기록을 '시간통계' 라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회계 장부를 기록하듯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매월 말마다 합계가 나오고 그래프나 표도 등장했다. 연말에는 월말 합계를 바탕으로 연간 총계가 계산되고 결산표가 만들어 졌다.  얼핏 보기에 이 기록은 그저 지나가버린 하루의 시간을 측정한 것에 불과하다. 저녁이면 잠자기 전에 자리에 앉아 무슨 일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썼는지 계산한다. 그리고 기본 업무에 소모한 시간의 합계를 낸다..

류비셰프는 시간을 통계내면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몸속이서 끊임없이 째깍거리는 생물학적 시계를 느낌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구분할 수 있게 된것이다.  저자는 류비셰프의 논문을 살펴보다가 맨 마지막 장에 논문의 ‘가격’ 이 적혀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 논문 준비(집필 구상, 자료 및 문헌 검색) 14시간 30분
  - 집필-- 29시간 15분.
  - 총계-43시간 45분.
  8일간 (1921년 10월 12일 ~ 10월 19일).

류비셰프는 몇 년이 지나자 자신이 집필하면서 소비했던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시간통계를 냈다.  날짜와 기간은 물론이고 집필에 소요된 총 시간까지도 적어놓은 것이다. 시간통계 방법으로 집필 시간뿐만 아니라 자신이 책을 읽은 시간, 심지어는 편지를 쓴 시간까지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다.

시간은 부족하지만 잘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활용하려고 노력한다.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실행한 일들을 체크해나가기도 한다. 더 조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소비한 시간을 분석하면서 제대로 활용했는가를 평가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정도만해도 어려운 일이다.  시간을 잘 쓰는가에 대해 적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얼마만큼의 일을 하려고 했는데 실제로 일하는데 사용한 시간은 훨씬 적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만큼 잘못 예상하기 쉬우며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자신의 나약함과 허점, 실수 같은 것을 인정하여야 하며 큰 용기가 필요하다. 범위를 좁혀 일에 관련된 부분에서만이라도 자신을 돌아보는 일조차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나 통계는 그에게 돌아보는 과정을 제공했다. 실제로 유효한 시간을 예측하고 만드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류비셰프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이 방법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려서 이제 이 방법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네.” 

습관이자 방법론으로 자리를 잡아버린 것이다. 그가 이런 일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방법론은 자기 자신을 잘 알게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나이를 먹은 후에는 못다한 일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장수해야할 것이라는 사실을 계획 속에 포함시킨 듯했다.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류비셰프는 수천개의 샘플을 만들고 손수 촬영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다. 자신에 대해 기대하고 원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일정한 물리적 시간내에서 최대한 뽑아내야 했다.  그리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류비셰프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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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3 00:42

총명탕 이야기

예전에 지디넷에 쓴 글이다.
요즘은 총명탕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세상이 복잡하게 돌아가며 생존본능을 자극하지만 그래도 맨정신은 필요하다.
이글은 다시 한번  재수정을 위한 리마인더로 올려본 것이다.

아래에 적은 과학혁명의 구조를 포함해 다시 쓰거나 손을 보고 싶은 글들은 무척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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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 많은 경우 너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평상의 일도 있고 업무가 끝난 후에도 잔업이나 회식이나 모임 같은 일이 남아있으며 주말에도 사람들과 할 일이 남아있다.

어른들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매우 바쁘다. 요즘은 학원버스들이 밤늦게까지 원생들을 실어 나른다. 사람들이 하는 일의 효율을 필자가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바쁠 수가 없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기

모두 다 그렇게 바쁘다면, 사람들을 이토록 바쁘게 돌리는 것은 일종의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개인적인 시간은 줄어든다. 쉬지도 못한다. 사람들의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든 사실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낼지는 아직 잘 모른다. 필자 역시 쓸데없어 보이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는 것에 대해, 장기적인 효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생물학적으로 피로가 몸에 장기적으로 축적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한 만큼 일을 잘하고 있느냐 하는 비판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의도한 만큼 이라는 것이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고있다.

요즘 필자는 몇 가지 일을 만들고 즐기면서 한편으로는 시달리고 있다. 원래의 업무량은 변한 것이 없으나 원맨 또는 2-3명이 참가하는 프로젝트들이 더해졌다.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의욕은 넘친다. 몇개의 토이(TOY) 성향의 오픈소스 프로젝트에도 빠져있고 (앞으로 토이가 중요한 화두가 될 것 같아서 시작한 것들이다.) 예전에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다시 보니 사실은 별로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인정하는 LISP(리스프 처리언어)에도 관심이 있다. 이처럼 과거에 빠져 있었으나 접어놓은 취미들도 가끔씩 마음속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숙제는 더 있다. 이 컬럼을 포함한 글쓰기 숙제들도 있고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그래서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머릿속의 생각도 복잡하다. 복잡해지면 학습과 생각하는 일에 엇박자가 나곤 한다. 그러면 업무는 압력을 받는다. 사실 필자는 업무와 업무가 아닌 것의 차이도 잘 모른다. 아주 급박하지 않는 한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의 구분도 불분명하다.

조금 더 걱정하는 것은 지적인 생산성이다. 때로는 투입하는 노력이 과다하게 많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필자가 앞에 적은 프로젝트 가운데 일부는 사고력을 훈련하기 위한 토이 프로젝트였는데, 일이 진행되다 보니 사고력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잡아먹는 존재로 변해 스트레스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당장 필요한 다른 일들도 많은데 어쩐지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들에 의해 존속되는 프로젝트도 있다. 그 의무감의 이유는 잘 모른다. 해야 하는 일과 아닌 일의 차이는 미묘해서 항상 고민하곤 한다.

■머리가 쉬지 못하면, 몸도 못 쉰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은 학습과 생각하는 일이 중요한 업무로 변했다. 한계와 성능이 정해져 있는 머리를 잘 관리하여 어느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머리는 몸의 지배를 받는다. 몸이 정상적이라면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머리가 활동할 수 있다.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된다. 체력도 마찬가지다. 부족한 경우엔 불필요한 일들을 분명히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예측가능한 일들을 잘 배치하여 시간을 잡아먹는 일들이 충돌되지 않도록 배치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면 쓸데없이 버려지는 시간이 조금 줄어들고 다른 일들을 할 여분의 시간이 생긴다. 그러면 책을 보거나 문제를 차분히 살펴볼 여유 같은 것이 생긴다. 그러면 조금 더 업무를 잘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을 하다보면 질리거나 지쳐가는 것을 발견하곤 한다. 머리가 쉬지 못하니 몸도 쉬지 못하고 그러다보면 지쳐버린다. 일반적으로는 마음이 실제의 일들보다 앞선다. 역설적으로 욕심이 많으면 더 빨리 지친다. 그러면 일이 잘 되지 않는다. 동기가 강하면 일을 추진하는 힘이 증가한다고 하지만 의욕이 너무 앞서다보면 일들의 스텝이 꼬인다. 할 수 있는 이상을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힘들어하기도 한다.

■프로젝트 관리자는 팀원의 생산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프로젝트 관리에 있어서도 비슷하다.(프로젝트의 구성원은 한명부터 여러 명이 있을 수 있겠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일정한 기간 동안 일정한 일을 하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경험을 제외한다면 파일과 페이퍼가 남는 무엇이다. 사람들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지만 몸과 마음을 투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일을 파악하는 시간(학습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며 중요한 노동이다. 콤텐츠를 만드는 것도 노동이다. 많은 콘텐츠는 프로젝트 매니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팀원이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때로는 프로젝트의 완성이 팀원이 생각하고 만드는 과정의 부산물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프로젝트라면 팀원들이 공부하고 업그레이드를 일으키는 상황을 기대해야 한다. 그런데 프로젝트의 많은 수는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보통은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지만 기대와 열망은 제한이기도 하다. 분위기에 휩싸여 실행할 수 없는 것을 쉽게 약속해 버리는 것이다. 많은 경우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가 시간을 초과하고 실패로부터 배우게 된다. 예상하지 않던 일이 일어나 기대하던 것들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거나 다른 부산물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스마트하게 진행하기 위한 기대치는 사람들이 지치고 일이 잘 되지 않는 것까지도 고려하게 된다. 진행이 느려져서 기한까지 일을 다 끝내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것으로 봐주는 상황을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정서불안에 빠져 완전히 좌초하는 프로젝트보다는 조금 늦지만 제대로 진행하면 마무리를 할 수도 있는 프로젝트가 낫다.

지치고 일이 잘 되지 않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적인 생산을 높이는 방법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잘 지쳐버리는 것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해보도록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프로젝트의 관리자부터 너무 진지하면 안된다.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총합 이상을 기대하면 안된다.

팀은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팀원의 생산성이나 생산성이 조직의 생산성을 좌우한다. 그 반대도 있겠지만 개인이 너무 지치면 생각을 하나의 실체로 만드는 일이 무척 어려운 일로 변한다. 손발을 움직여서 일을 하지만 결국은 머리와 지식을 쓰는 일로 먹고사는 팀의 관리에서 스마트(총명)한 개인을 만드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개인으로서도 그렇다. 남들의 기대를 따라가다 보면 충직하게는 보이겠지만 조직도 개인도 손해를 보는 경우도 나타난다. 롱런 하려면 차라리 개인들이 이기적인 편이 유지관리가 쉬울 수도 있다. 롱런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프로젝트 보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말을 어렵게 했지만 스마트한 조직은 스마트한 개인들을 필요로 한다.

■총명탕과 개인의 생산성

필자는 얼마 전 동생과 통화하다 총명탕이라는 약에 대해 들었다. 총명탕은 한때 크게 유행했던 한약처방의 이름이다. 이 약을 먹으면 공부 잘 된다고 하여 수험생들과 학부모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요즘도 시험 때가 되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우선 약의 이름을 정말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지친 머릿속을 다스리는 총명탕이라는 약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도 수험생들이나 지친 서생들을 위하여 이런 약이 있었고 한의사들이 처방을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의학적 상식을 총동원해도 이런 성분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처방이 존재한다. 중국 문헌에도 나오고 동의보감에도 나온다고 한다. 인터넷을 뒤져보고 한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총명탕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이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이 총명탕이라는 것이 만드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다. 처방이 여러 가지가 있고 고정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원리는 있다. 성분이 통일되지 않았지만 머리를 좋게 한다는 이 약의 원리는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면 조금 더 총명해진다는 것이다.

이 처방 은 명나라때의 의원 공정현의 의서 '종행선방'에 청음으로 나온다고 한다. 이 의서의 특징은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두세 가지의 약재로 조성된 간편한 경험적 처방들 위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총명탕 역시 백복신(白茯神), 석창포(石菖蒲), 원지(遠志)라는 3가지 약물로 만든 아주 간결한 처방이었다.

처방 중의 백복신은 심(心)을 보함으로써 놀람•황홀함•성냄등을 진정시켜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석창포는 마음으로 통하는 구멍 심규(心竅) 혹은 심공(心孔)을 열어주고 원지는 마음 구멍에 쌓인 담연(痰涎)을 없애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실제로는 민간에서 구할 수 있는 풀뿌리와 나무뿌리를 고아서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효능에 대해 오랫동안 먹을 경우 하루에 천 마디 말을 암송할 수 있다 풀이해 놓았다고 적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약을 달여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머리를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처방으로 접근했다. 그러면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것이다. 원인은 알고 있으니 약은 만들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처방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예전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피곤했던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면 몸도 피곤하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옛날에도 공부는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공부라는 것도 생산성이 필요한 일이며 노동이고 시간에 쫓긴다. 누군가가 이런 약을 주문했고 부탁을 받은 한의는 궁리 끝에 처방을 고안했을 것이다. 발명이 되자 약의 수요는 계속 있었다. 그러니 오랜 세월동안 필요했던 하나의 킬러앱스 같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열심히 복용했을 것이고 요즘도 수험생들이 먹고 있으니 오랜 기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곧 '생산성 높이는 것'

어쩌면 먹으면서도 총명탕이 별다른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총명탕은 일종의 placebo 효과를 갖는 약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박한 수요가 있었으니 총명탕은 계속 필요했다. 따라서 총명탕을 발명한 사람은 아주 총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처방은 애매하지만 원인은 알고 있으니 치료방법의 제공은 여러 가지로 시도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언제나처럼 몸과 마음을 괴롭혔을 것이다.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스트레스에 둔감했다면 이런 처방은 처음부터 불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둔감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심신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 총명하고 생산적으로 만든다는 것이 과거의 지혜였다. 걱정이나 화를 억제하고 몸을 조금 편하게 만들면 총명해지는 것이니 사실은 맞는 접근법이다. 총명탕을 먹어도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면 효과는 없어지니 몸과 마음을 너무 피곤하게 만들면 안된다.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으니 욕심을 너무 부려도 안된다. 총명탕을 먹고 효능을 내려면 할 수 있을 만큼 일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지만 정말 좋은 아이디어임에는 틀림없다. 좋은 아이디어들은 사실 유용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일종의 신화나 소망적 믿음에 불과하다고 해도 유용할 때가 있다.

필자는 이 아이디어의 개발자에게 무엇인가 배웠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총명탕의 효과와 총명에 대해 이해할 것 같고 머리속이 환기되는 느낌이었다. 너무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이 스트레스와 마음속의 조급증과 화를 불러내 조금 게으른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총명탕의 아이디어 자체가 필자에게는 총명탕인 셈이고, 지적인 생산성을 생각하는 개인인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어진 생산성 관리의 아이디어다. 정작 지친 상태로 이 글을 쓰는 필자부터 시행해야 할 아이디어이기도 하다. 사실 조금 덜 지친 상태라면 더 총명한 글을 썼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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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23:33

과학혁명의구조

글을 어떻게 쓰느냐는 독자들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전에 과학동아에 내가 썼던 글과 다른 교수님의 글을 비교해본다. 
대상은 다르다. 나는 학생들을 위한 "be scientists"에 쓴 글이고 다른  글은 식자층을 위한 글이다.

확실히 다른 분이 쓴 글이 낫다. 그러나 너무 전문용어를 많이 쓰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된다. 
(암튼 이글은 내 컴퓨터 속에서 행불되었다가 예전에 프리챌 메일을 쓰던 사실을 기억하고 찾아낸 글이다.
행불상태의 글이 많다. 한미르에 있던 글들은 파란으로 업글하지 않아 모두 소멸되었다.)
많은 생각과 쉬운글이라는 과제 그리고 자신만의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일종의 곡예다. 


-과학 혁명의 구조 (내가 쓴 글)

교과서와 과학사
교과서들을 읽고 있을 때 이론들이 너무나 질서 정연하게 설명되는 이유가 궁금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과학 교과서들은 잘 정리된 이론을 제공하고 있다. 작은 우주라고 느낄 정도다.  그 이론의 틀은 상당히 단단하고 견고하게 느껴진다.  앞에 나온 이론으로 뒤에 나오는 이론들을 설명하고 마치 레고 블록을 쌓는 과정처럼 지식은 집적과 발전의 연속처럼 보인다. 대부분 비슷한 내용으로 구성된 많은 교과서들은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세계관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과서라는 것은 공인된 사고의 체계와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도 빡빡하게 정해진 커리큘럼 속에서 학생들은 특별한 필터링 없이 이러한 지식을 흡수한다.  책의 구성과 진행은 질서 정연한 정도를 넘는다. 나중에 나오는 이론들은 먼저의 이론을 누군가가 잘 정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만들고 수식으로 정리하여 곱게 펼쳐놓은 것 같이 보인다. 책에 나오는 문제들 또한 제시되는 공식을 이용하면 잘 풀어낼 수 있다.  한때는 과학자들이 우주를 초기조건만 주어지면 간단한 기하학과 뉴튼의 고전역학으로 다 해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은 특별히 이상한 과정이 별로 없어 보이는 , 그리고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견자들의 사진이 가끔 나오는 것으로 읽고 있으면 페이지가 넘어가게 되어있는 그러한 것들 이었다. 필자는 교과서를 읽으면서 머리가 질서 정연하지 않은 것을 언제나 한탄하곤 했다. 그것은 제공되는 지식이 교과서의 세계를 통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진지하게 생각할 때까지는 나름대로 중요한 문제이고 고민거리였다. 
교과서라는 것은 적어도 공인된 지식체계를 편집하고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그 사회과학은 그 자체가 공인된 사회적 의견이나 지배적인 의견 같은 것을 반영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과서를 읽으면서 지배적인 의견들을 배우고 나중에 학자가 되어 교과서를 쓰거나 가르치기도 한다. 사회에 나와서 일을 할 적에 조차 교과서는 도처에 널려있다. 이른바 <지식사회>가 되면서부터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된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수 십년에 이르는 긴 시간에 걸쳐서 교과서를 읽지 않을 수 없다.
교과서나 책은 많은 지식을 효과적으로 압축한 것이다. 교과서는 이른바 잘 정립된 정상적인 학문 , 정상과학(normal science)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정상과학은 자기모순이 크게 부가되지 않는 잘 포장되고  편집된 체계를 앉고 있는 작은 우주다.  학생들은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예제를 접하며 그 안에서 생각한다. 우주관까지는 아니더라고 지식세계의 세계관은 주입되고 공유된다. 물론 교과서에서 제공하는 지식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만 해도 많은 훈련과 노력 그리고 재능이 필요하다. 적어도 남들이 말하는 것은 거의 다 이해해야 한다. 이 정도에 이르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빨라져도 대부분의 과학연구는 기존의 정상과학을 강화하는 부문에서 일어난다. 교과서들은 더 두터워지고 이론은 이론을 만든다. 혁명이 아니라 아주 작은 혁명마저도  연구자의 소신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세상의 일들이 이토록 질서 정연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갑갑한 의문들이 조금이나마 해소되기 시작한 것은 필자에게 일종의 역사가 기질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관심이 있는 영역들이라면 어떤 사람들이 참여하고 어떤 단계들을 거쳐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파악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해 보였다. 별로 효용가치가 없어 보이는 호기심의 충족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결국은 이 역사가적 기질마저 다른 역사관을 담은 수많은 텍스트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사관 역시 주입되는 것이다.  과학사라는 학문분야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과학사 역시 역사과목 만큼이나 모순과 갈등의 덩어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배적인 이론과 그렇지 않은 이론 , 안정된 우주관을 제공하는 정교한 세계관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이론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과학의 역사가 그다지 평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는 급진적인 이론들의 탄생이 책의 주제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토마스 쿤이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펴내고 자신의 주장을 발표했을 당시 사람들은 쿤이 제시한 주제들을 놓고 격론에 휩싸였다. 논쟁 속에서 책은 곧바로 중요한 사상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는 고전으로 취급된다.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 중 상당수가 출간될 당시에는 문제작이었다. 아울러 쿤이 언급한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중요한 어휘로 등장했다.  이 책이 사람들의 과학 발전에 대한 사고와 접근방식 그 자체에 대한 새로운 시야를 제시한 것은 분명하다. 만약 이 책의 내용이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쿤의 책 역시 정상과학의 일부가 되었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은 것이다.  교양서적의 일부가 되었다.  (학부생을 위한 교양서적으로 서울대학교 선정 100선에도 들어있다. )
과학혁명의 구조
과학철학자이기도 한 토머스 쿤은 과학사를 연구했다. 책의 제목에 나오는 과학혁명은 과학사에서 혁명적인 발전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대표적인 과학혁명의 시기는 1500년 경부터 시작해 1700년대에 걸쳐 과학뿐만 아니라 세계관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지식의 폭발이 일어났다.  과학적 지식은 결국 세계관을 바꾸었으며 철학 사상, 사회의식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의 연구나 로버트 보일의 화학 연구, 하비의 생리학 및 해부학 연구, 뉴턴의 물리학 법칙 등이 모두 과학혁명 시기의 중요한 성취다. 사람들의 의식이나 철학적인 재료는 결국 과학지식이 제시했다. 사람들의 세계관과 의식 자체가  바뀌었다.
과학사가로서 쿤은 이 시기의 사실들을 검토하며 혁신이 일어난 형성과정을 퍼즐처럼 재조립해 보았다. 뜻밖에도 커다란 발견이나 발전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일관적이지도 않으며 여러명의 관련된 연구자나 연구 집단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커다란 불일치속에 진행되었다. 중요한 법칙은 사소한 오류들과 오해가 많은 환경에서 때로는 오류로부터 출발했다. (이를테면 빛이 입자인가 파동인가 하는 문제가  적어도 300년 이상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쿤의 작업은 이 과정을 재조립해 보는 것이었다.  초기의 연구 집단의 지배적인 견해는 학설로 굳어지고 그 다음의 과정은 결정적으로 바뀐다. 유력하게 경쟁하던 몇 개의 모델들은 흡수되거나 통합되고 만다. 결국 연구나 발전의 과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비약적이며 이전에 형성된 지식이 후대에 모두 전수되는 것도 아니다.
쿤의 책에는 교과서가 끝나는 곳에서 재능 있는 연구자의 새로운 업적이 시작된다는 표현이 있다. 아울러 "진리는 혼동에서보다는 과실로부터 더 쉽게 나타난다."는 베이컨의 말로 새로운 발견이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했다.  어떠한 분야든지 지배적인 사상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쿤은 과학의 발전이 :  
- 여러 이론이 공존하는 과학 전단계가 있고
- 가장 우세한 이론이 지배하는 정상 과학의 단계로 들어서다가
- 정상과학(normal science)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증거와 현상들이 등장하는 단계가 나타나고
- 새로운 이론이 혁명적으로 등장하는 단계를 거쳐
- 그 이론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으로 정립되고 정상 과학이 되는 단계에 이른다고 도식했다.
하나의 이론체계에 의해 과학 지식이 그 체계를 더 정교하게 만드는 식으로 발전하다가 그 체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발견되며 학자들이 공유하는 패러다임(paradigm)으로는 문제의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때 정상과학 시스템의 위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이란 일종의 세계관이나 문화 때로는 운영체제와 같은 것이다. 규범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은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집단에게 모형문제와 풀이를 제공하는 보편적으로 인식된 성취들로 간주했다. 연구의 가설, 이론, 실험 방법 및 규칙, 실험 도구, 연구 모형, 기본 개념,  가치관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정말이지 문화나 풍토에 가깝다. 정상과학이란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과학자 집단의 연구 활동의 체계이다. 기존의 정상과학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게 되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새로운 정상과학이 자리잡는다.  쿤이 말하는 ‘정상과학’의 기간은 비혁명적이고 안정된 기간을 말한다. 이시기에는 패러다임이 확립되어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용어에 어떤 명확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일종의 ‘게임의 법칙’과 비슷한 것으로 파악했다. 문화활동의 게임에 참가하려면 적어도 ‘게임의 법칙’은 알아야 참가할 수 있다. )
쿤이 예를 든 몇가지의 사례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몇 개의 가설이 대립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천동설과 지동설은 둘 다 유력한 패러다임이었는데 지동설을 따르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결과들이 나타나자 예전에 유력한 패러다임이었던 천동설은 없어지고 지동설이 정상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은 양립할 수 없는 단절적인 전환이었다.  지적인 벽돌쌓기로 천동설을 정교하게 만들던 사상적 시스템은 무너진 것이다. 벽돌쌓기의 에너지는 지동설을 보완하는 쪽으로 흘렀다. 쿤은 그전까지 과학의 발전이 점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중요한 변화 중에는 단절적인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이 형성되면 이 패러다임으로 새로운 전문가 집단이 훈련된다. 새로운 집단은 이미 이 패러다임에 익숙하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완하는 일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계속된다. 새로운 전문가 사회가 구성된다.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보완은 계속된다. 그리고 새로운 교과서들이 만들어지고 교과서가 끝나는 지점에서 재능있는 연구자에 의해 새로운 연구가 진행된다. 쿤은 이런 일이 보편적인 현상이며 과학적 연구의 진행이 전문가 집단에 의해 진화적으로 점진적으로 패러다임이 형성되는 사회적 현상임을 강조했다.
패러다임
주류적인 문화풍토의 생성과 강화 , 집단의 풍토와 같은 패러다임은 쿤의 생전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진화론이 나오자 사람들이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비슷하다.  격렬한 논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의 폐부를 찌르는 중요한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결국 패러다임은  패러다임 자체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했다. 패러다임이라는 사고틀에서 세상을 보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오늘날 패러다임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나 ‘다양한 패러다임’과 같이 자연스럽게 인용된다. 시간이 지나자 책은 과학사의 범위를 넘어서, 인문학, 사회과학 전반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여러분야에 패러다임을 제공한 것이다.
어떤 고전이나 사상을 담은 책이 중요한 이유는 나중에도 중요한 논의나 담로의 대상이 되며 일정한 시기에 적어도 핵심적인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기능 때문이다. 사회적 의식구조가 바뀌면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같을 수가 없다. 필자는 패러다임과 정상과학에 대한 논의가 중요한 철학적 영향이 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하신 분이 있다면 책을 읽으며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아직도 사람들을 홀릴만한 참신성과  힘 그리고 생각의 흐름을 일으키는 마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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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의 크로키 (초고 구성안)가 더 나은 듯하다.

과학 혁명의 구조 - 간단 설명 (이것 보다는 쉽게 쓸 예정입니다. 오랜만에 쿤의 책을 다시 보네요 . 뼈대가 이렇다는 것이고 쓰다보면 언제나 변형이 일어납니다. )

 

필자는 예전에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이론들이 질서 정연하게 설명되는 것이 언제나 궁금했다.  그러나 발전의 과정을 설명하는 내용은 적었다. 고등학교 당시에는 물론이고 대학교에 다닐 당시에도 (특히) 물리학은 너무나 엄정한 이론을 제공하고 있었다.  역학은 물론이고 전기나 파동 , 양자 역학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틀은 상당히 단단하고  견고하여 앞에 나온 이론이 뒤에 나온 이론을 설명하고 책의 진행도 질서 정연하여서 마치 나중에 나오는 이론들은 먼저의 이론을 누군가가 잘 정리하여 새로운 이론으로 수식을 정리하여 곱게 펼쳐놓은 것 같았다.  문제 또한  이런 공식을 이용하면 잘 풀어낼 수 있었다 . 특별히 이상한 것이라고는 아무것 도 없는, 그리고 때때로 새로운 이론의 발견자들이 가끔씩 나오는 밋밋한 교과서 속에서 필자의 머리가 질서 정연하지않은 것을 언제나 한탄하곤 했다.  독자들도 이론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이론들은 밑바닥에서부터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서 발전되었고 교과서에 그런 내용은 모두 빠져있다. 현실의 모임인 역사가 국사 교과서에는 밋밋하게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 그것은  책들이 교과서였기 때문에 그랬다. 교과서는 적어도 자기 모순이 크게 없어 보이는 듯이 포장되고  편집된 작은 우주였다, 학생들은 그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예제를 접하며 그 안에서 생각한다. 다른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교과서는 이미 지배적인 이론들의 집합이며  사람들을 재교육 시키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지배적인 위치를 확립하지 못한 이론이나 학설들이 나타나는 것은 지면의 제한도 있지만 학설들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 교과서적인 세계 또는 정상과학이라고 부르는 체계가 여기에 속한다. .. 물론 이 단계에 이른 것도 많은 훈련과 노력 그리고 재능이 필요하다. 적어도 남들이 말하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갑갑한 우주와 같은 틀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필자가 일종의 역사가라는 기질을 발견하면서부터 깨어졌다.  과학사라던가 연구에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 같은 것에 더 흥미를 느끼면서 원래의 이론보다는 이론이나 기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가에 대한  내용이 흥미를 끌게 되었다. 실제의 과정은 현실 생활처럼 어수선하며 모순이 있는 가운데 자신의 주장을 제기하고  그 중에서 힘을 얻은 이론이 살아남는 과정이다.
..얼마 지나면  지배적인 이론들을 제외한 이론들은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지워진다.

...<중략>...

중요한 몇가지 예
'
전기와 빛의 발견 케이스  - 초기상태에는 주류 이론과 비 주류 이론을 구별하기 힘들다.
다양한 이론들이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지고 발달한다. (a4 1매)


.. <중략>...

패러다임이라느 용어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한 사람은 토마스 쿤이었다.  쿤의 대표적인 저서는 <과학 혁명의 구조>다. 아마 읽어본 독자도 많을 것으로 믿는다.  쿤은 그전까지 과학의 발전이 점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른바 <코페르니쿠스 적인 충격>이 과학 그 자체를 보는 시각에 가해진 것이다.

.. 과학의 체계라는 것이 동류집단의 공통된 사고와 가치관을 바타응로 하는 것인데 이 기준을 우리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 라고 한다, 문제느 이 정상 과학이라는 것이 기존의 이론이나 체계가 맞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보이고 스스로 정치적인 정상과학의 테두리에는 언제나 이론이 부합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때로는 전기나 원자구조의 발견시점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서로 판이하게 다른 이론들로 부터 새로운 과학이 그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 그래서 체계의 중요한 부분이 흔들리면 우리는 이것을 <과학혁명>이라고 부른다.

혁명이 쉬운 것은 아니다. 체계나 체제라는 것은 그 자체가 스스로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과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혁명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는 채로 끝난다 . 역사적으로 혁명이 성공하는 경우는 체계가 너무나 많은 부조리를 갖고 있어 슷로 붕고되기 전에 잠시 힘을 가하는 것에 비유하곤 한다. 썩은 문짝을 발로 차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만큼 많은 모순을 보이지 않으면 또한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일을 자각하지 않으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중략>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인지과학이다.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과정이  중요하다. 의식구조에 변화가 생기면 이전과 그 이후는 같지  않다. 쿤의 에세이는 이런점을 체계화 시키면서 출발했다. 쿤이 인정하듯 그 이전에도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중략>
토마스 쿤의 책은 그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이라고부르느데 이 책이 나오기전과 나온 후의 사람들이 과학의 발전에 대한 생각은 절대로같을 수가 없었다, 인식의 변화가 온 것이다. 생각하는 법을 생각하는 것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고전이 되었다.  (쿤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많고 찬성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점도 고전의 조건의 하나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좋아하는 사람만큼이나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고  이론과 실효성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논란 또는 논의 그 자체의 대상이 (담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 고전의 중요한 조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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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쿤의 과학철학 (어떤 교수님이 쓴글)

"과학 발전은 불연속적" 기존인식 뒤엎은 `혁명' 

토마스 쿤의 기념비적 저작인 '과학혁명의 구조'(이후 줄여서 '구조')는 역설적이게도 오트 노이라트, 루돌프 카르납 등이 기획한 '통일과학의 국제적 백과사전'의 일부로 1962년 출간되었다. 노이라트와 카르납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영향력이 컸던 빈 학파의 구성원들로서, '논리실증주의' 또는 논리경험주의'라 부르게 된 과학철학적 견해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학자들이다. 

논리경험주의적 과학관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 활동은 이론 중립적 관찰과 논리적 추론이 근간을 이루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적 활동의 전형이며, 과학적 지식은 역사를 통해 연속적이고 축적적인 형태로 성장한다. 이에 반해 쿤은 과학사를 배경으로 그러한 과학관이 과학 활동의 현실과 부합하지 않음을 보이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쿤은 과학적 탐구를 공동체적 활동으로 파악하고 두 가지 이질적 과학 활동을 구분했다. 정상과학(normal science)과 과학혁명(scientificevolution)이 그것이다. 

정상 과학'이란 동일한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행하는 과학적 탐구 활동이다. 여기서 패러다임'은 쿤이 기호적 일반화, 모형 가치, 범례(exemplar)라고 부른 이질적 요소들의 복합체이다. 정상 과학에서 과학자들은 자기가 채택하게 된 패러다임을 시험하는 태도로 임한다. 정상 과학의 성격에 대한 이런 이해는, 중립적 관찰을 토대로 연산법적 규칙을 적용해 이론들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객관성과 합리성이 성립하는 것으로 보았던 기존 과학관과는 궤가 다른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적 탐구에서 관찰 역시 다른 여러 가지 과학 활동과 마찬가지로 패러다임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다. 관찰에 대한 이런 견해는 관찰이 이론 중립적으로 이뤄진다는 당시의 방법론적 통념과 배치되는 동시에 논리경험주의적 과학관의 인식론적 구도를 뒤흔드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과학 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쿤은 과학 변동의 단절적이고 불연속적 측면을 극적으로 부각한다. '과학 혁명'은 패러다임이 교체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패러다임 선택의 문제가 등장한다. 그런데 쿤은 패러다임 교체를 형태 전환 (gestalt switch) 또는 종교적 개종에 비유한다. 이러한 비유는 경쟁하는 패러다임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초패러다임적 규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의 주장과 함께 과학자들의 패러다임 선택을 비합리적이 되게 한다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쿤은 자신도 패러다임 선택에는 나름대로 이유들' 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그 이유들은 연산법적규칙 적용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폭넓게 공유하는 과학적 가치-예를 들어 정확성, 일관성, 단순성 등- 적용에서 비롯한다고 대응했다. 결국 과학자들의 이론 선택이 합리성을 결여한다고 말하기보다는 합리성에 대한 기존 개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쿤의 주장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과학 혁명기의 경쟁 패러다임들은 공약 불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구조'에서 공약불가능성의 여러 측면이 언급되지만, 쿤 자신 이나 다른 철학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논의된 것은 의미상의 공약 불가능성이다. 과학 혁명기의 경쟁이론들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조차 상이한 의미를 가지며, 경쟁 이론들 사이의 번역이 가능하지 않다는 이 논제는 즉각적으로 많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비판자들은 그것이 경쟁 이론간 비교 불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론간 비교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선택은 비합리적 요인들에 의해 이루어 질 수밖에 없으므로, 과학에 대한 비합리주의는 공약 불가능성 논제의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쿤은 미국 과학철학회(PSA)의 1982년도 모임에서 발표 한 논문에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했던 것은 '국소적 공약 불가능성'(두 이론에 공통적인 용어들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견해)에 해당하며, 따라서 공약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이 경쟁 이론간 비교가 불가능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해명했다.

쿤은 20세기의 과학철학 논의에서 역사적 전환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논리 경험주의자들이 과학적 발견의 연속성을 부각하는 쪽으로 치우쳤다면 쿤은 그 불연속성을 부각하는 쪽으로 치우쳤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따라서 과학에 대한 좀더 균형잡힌 시각을 확보하는 작업이 요구되며, 이는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서울대 교수·과학철학). 

조인래씨 약력> ▲1953년 생 ▲서울대 물리학과 학사, 서울대 철학과 석사, 미국 존스홉킨 스대학 철학박사 ▲편역 '쿤의 주제 들: 비판과 대응'(1997) 공저 '현대 과학철학의 문제들'(1999). 

[20C 과학철학] 빈학파-포퍼 경험주의 핸슨 등이 비판 

과학의 성격과 발전을 이해하려는 20세기의 철학적 논의들은 '통일'과 '경험'을 화두로 출발했다. 1920년 카르납으로 대표되는 빈학파(논리실증주의)는 모든 과학 활동을 '관찰 또는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열을 가하면 금속이 늘어 난다는 많은 관찰 결과를 모으면, "금속은 열을 받으면 팽창한 다"는 일반화가 귀납적으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퍼는 아무리 많은 관찰 결과가 모이더라도, 단 하나의 반증 사례만 있으면 일반 법칙은 무의미해진다는 점을 강조, 귀납주의를 거부한다. 대신 그는 과학적 지식의 판단 기준으로 '반증 가능한가'하는 
새로운 잣대를 제시했다. 

1950년대부터 과학철학자들은 빈 학파와 포퍼의 '경험주의'에 집중적 비판을 가해 탈경험적 태도를 취한다. 콰인과 핸슨등 은 "관찰과 이론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핸슨의 표현에 따르면 "경험에 대한 서술이란 항상 이론의 등에 업혀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념적 틀이나 이론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실 그대로 된 관찰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핸슨의 이같은 태도는 쿤에게서는 '공약 불가능 '(incommesurability)이란 개념으로 발전한다. 예를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이 이후 뉴턴 과학이나 현대 물리학 관점에서 보면 아주 유치하지만, 2000년 이상 최고 이론으로 자리잡 았던 것은 나름대로, 이후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는 정교한 설명 체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과 근대 물리학은 서로가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즉 공약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이다.
 
파이어아벤트에 이르면 쿤의 공약 불가능성은 더욱 극단적 형태를 띠게 된다. 경쟁하는 두 이론은 어떤 방식으로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선택 과정은 철저히 과학자 개인의 주관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파이어아벤트의 주장을 흔히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모태준기자: taimo@chosun.com)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등 명저 남겨 

토마스 쿤(Thomas Kuhn)은 1922년 미국 신시내티에서 엔지니어인 사무엘 쿤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물리학을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최우등(summa cumlaude)으로 졸업했고 49년 물리학박사를 받았다. 쿤이 과학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때쯤이다. 쿤은 당시 하버드 총장이었던 코넌트 박사의 권유로 학부생들에 게 자연과학개
론을 가르치면서 과학의 발전이 '단선적이고 누적적' 이라는 기존 생각에 반감과 회의를 갖게 됐다고 한다. 이후 버클리 (1956∼64), 프린스턴(1964∼79), MIT(1979∼91) 등을 거치며 과학사를 가르치고 연구했다. 

쿤은 과학 발전이 한 시대의 세계관(패러다임)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과정'이라고 본다. 과학혁명은 바로 한 패러다임 내의 과학이 모순으로 부글부글 끓다가 위기에 닥쳐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혁명가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 과학자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이론, 법칙, 지식, 가치, 심지어 믿음이나 습관 같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쿤의 생각은 과학이 누적적 지식의 점진적 발전이라는 당시 생각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쿤의 저서로는 문제작 '과학혁명의 구조'(1962) 이외에 구체적인 과학혁명의 예를 다룬 '코페르니쿠스 혁명'(1957)과 '흑체이론과 양 자 불연속성'(1978), 과학철학적 주제를 모은 논문집 '주요한 긴장' (1977)이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숙명여대 김명자 교수와 이화여대 조형 교수 번역으로 국내에 소개됐으며, 한국과학사학회는 지난 80년 한림대 송상용 교수 주도로 '쿤의 과학사 서술과 인접 과학 의 영향'이라는 세미나를 갖기도 했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쿤에게 직접 배운 서울대 김영식 교수는 "쿤은 남의 얘기도 잘 듣지만, 좀처럼 자기 이론을 굽히지 않는 토론쟁이" 라고 그를 기억했다. 사회학계에선 성균관대 정창수 교수가 쿤에 관심이 많다. 쿤이 1996년 6월 17일, 73세에 후두암으로 사망했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있는 과학사 과학철학자였다"(MIT의 제드 부발트 과학기술사 교수)는 평가를 받았으며 뉴욕타임스는 6월 19일 "그는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들 사이에도 상당한 논쟁을 촉발했다"는 조사를 실었다. (모태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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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08:21

혁명을 뒤에 붙인 시기들 (과거컬럼)

망각대왕인 나는 예전에 쓴글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언제 이런 글을 쓴적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보르헤스 말처럼 안윤호라는 사람이 쓴 글이 맞기는 한데 그건 정말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 
관심이 너무나 많아서 도대체 집중이 안된다. 
난독증처럼 관심의 레벨을 여기저기서 흔들린다. (그리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너무 쓴 글들이 많다는 것이다. 주제도 너무 다양한 것 같다. )

다시 한번 손보고 싶은 글들도 있다. 
가장 쓸만한 글쓰기는 여러번 되고쳐 써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른데다 바쁘다. 최악이다. 당분간은 구경하며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처음부터 잘 써보던가.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2005/02/28

매스컴에서 커다란 변화에 붙이는 수식어 중에는 유독 ‘혁명’이라는 이름이 많다. IT 혁명이라든지 나노 혁명 같은 새로운 변화들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온다. 

필자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는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곤 하는데 역사적으로 커다란 변화에서 사람들이 조용하게 지낸 시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람에 풀들이 눕듯이 커다란 변화에는 사람들을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없다. 정치적인 혁명은 보통 지역적으로 국한된다. 

하지만 문화의 본질적인 혁명은 그보다 파장이 더 크고 광범위하다. 같은 이유로 30년간 진행된 IT 혁명이 어떤 일들을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변화가 한 분야에만 그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젠가 극적으로 변한다. 보통은 이런 시기를 사람들은 난국(hard time)이나 난세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와중에서도 국지적으로 극심한 변화에 휘말린 사람들은 이런 힘든 시기를 보낸다. 

과거의 예를 보면 산업이 발전한다기보다는 변화하는 시점의 틈바구니에 휘말린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압력을 견뎌내야 하든가 아니면 거의 미쳐버리는 순간이 많았다. 그 와중에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나중에는 조용히 잊혀진다. 가해자의 입장이건 피해자의 입장이건 사람들은 어두운 기억을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뻔하게 일어났던 일들이 교과서에는 두리뭉실한 설명 몇 줄로 압축되어 버리곤 했다. 

역사의 극적 변화 
극적인 경우가 산업 혁명이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당황해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방적기라든지 증기 기관 같은 기계들은 초기적이긴 하지만 자본과 기술의 집약체였다. 간단히 말해 설비를 위해서 상당한 자본이 들어가며, 제작을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기술 자본 집약적인 생산이 자리를 잡게 되자 노동 집약적이던 수공업자들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그 전까지 가내 수공업으로 잘 버텨 왔던 이들은 자신의 공방을 그만두고 공장에 고용살이를 하게 됐다. 이른바 취직이라는 것으로 그전까지는 자영업자이던 수공업 생산자들의 자존심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초기의 신흥 자본가들은 이들을 착취했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조건에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노동 시간은 보통 열여섯 시간을 넘기곤 했다. 일주일에 하루나마 쉬게 된 것도 세월이 조금 지나서였다. 

산업 혁명은 거대한 변화이자 빠른 변화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몸으로 겪어야 했다. 공장의 등장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수공업자들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산업의 생산성이 더 높아지자 방직 공업이 이윤이 높은 산업으로 변했다. 노동 비용이 낮아졌기 때문인데 그전까지 사람들이 몰려 살던 한적한 토지들이 방직 공업에 사용될 양(羊)을 기르기 위해 개간됐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영주들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땅에 세 들어 살던 주민들을 추방했다. 이러한 추방의 동기는 오로지 이기심 때문이었는데 다른 말로 하면 경제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쉬운 말로 돈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1800년대 초반 스코틀랜드의 고원 지대인 서덜랜드에서는 주민 추방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그전까지는 계곡이 있는 마을에서 조용히 살던 주민들은 양을 치우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들을 추방하여 했던 지주들에 불응했다. 주민들은 가난하게 살긴 했으나 마을을 떠나기는 싫었고 결국 지주의 앞잡이들은 집에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처 노약자를 피난시키기도 전에 집을 태운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나무가 거의 없는 이 지방에서는 집이 불타면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마을을 떠나게 됐다. 지주들은 이 빈터에 양을 방목함으로써 더 부자가 됐다. 적어도 그 이전보다 세 배 정도의 큰 소득을 얻게 됐다. 오늘날 한적한 초원들을 보면서 이런 일을 떠올리는 사람은 주민들을 포함해서 별로 없다고 한다. 

가혹한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조처로 오래 끌던 문제가 몇 가지는 해소됐다. 하나는 인구가 밀집되어 가난하게 농사를 짓던 오래된 사슬이 끊어졌다. 우선 추방을 당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전보다는 소득이 높아졌기 때문에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인구 과밀로 영원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추방당한 주민들은 일부는 근처 도회지의 공장으로 갔으나 일부는 공장의 리듬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당시 새로운 개척지이던 캐나다나 미국으로 가는 선택을 했다. 캐나다는 당시에 미국과 함께 이른바 신세계로서 사람들의 개척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이민을 간 세대들은 몇 년만 농사를 지으면 운이 좋을 겨우 조상대에는 평생을 걸쳐서도 이룰 수 없는 영토를 쉽게 개척할 수 있었다.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New Scottland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름은 이러한 사람들이 정착한 지명이라고 한다. 

고전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예들을 중요한 사실이라고 하는데 토지와 인구 과밀, 즉 극복하기 어려운 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러한 균형이 깨져야만 가난은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해피엔드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한계 상황에 이른 산업에서도 유사하게 되풀이된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농업에서 토지와 인구의 관계와 같다. 과거에는 아무리 일을 해도 먹고 살기에도 힘든 지경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회 변화에 의해 고리가 자의든 타의든 깨어지고 새로운 균형이 생겼다. 한계에 이른 산업 구조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탈출이 그 당시의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에서도 있었다. 아일랜드에서는 더 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추방이 아니라 기아가 발생했다. 이들이 기아를 피해 떠남으로써 다른 일들이 일어났다. 

아일랜드는 18세기 중반부터 갑자기 인구가 증가했다. 그 이유는 식량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인 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구가 과밀한 아일랜드는 소작인들이 농사를 지어 소작료를 내고 나면 살기가 빠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감자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감자는 일반 작물을 재배하기 어려운 아일랜드의 어디에서나 잘 자랐다. 감자는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크게 호전시켰다. 

문제는 감자가 재배되면서 아일랜드의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과밀하게 모여 살던 아일랜드는 1780년부터 1840년에 걸쳐 인구가 네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당시에는 현재의 인구보다 더 많은 800만 명까지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농업 혁명인 감자에 의해 이런 인구가 지탱될 수 있었다. 

오로지 식량 문제의 해결책이 감자라고 하는 유일한 사실이 문제였다(16세기 말엽 감자가 아일랜드에 들어온 이후 감자는 ‘왕궁에서 돼지우리까지 어디서나 먹는’ 식품이 됐다. 기후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망각한 채 아일랜드는 단품종 경작이라는 위험천만한 농업으로 옮아갔다. 19세기 초 한 농민 잡지의 기자는 감자를 ‘부자의 사치요, 빈자의 식품이며 우리 시대 인구 증가의 주 원인이자 기근에 대한 위대한 안전장치’라고 평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러한 단일하고 유일한 해결책이 사라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감자가 고온 다습한 기후에 의해 감자 마름병이라는 병에 걸려 갑자기 썩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대한 인구는 오로지 감자라는 한 가지 솔루션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감자는 뿌리부터, 그것도 갑작스럽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식량은 곧 바닥이 났고 사람들은 근심에 빠졌으나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병이 도졌으나 문제는 아일랜드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대기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감자가 썩어가는 와중에도 지주들과 관료들은 기득권의 관점에서 사태에 대처했다.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의 정책적 실기가 계속됐다.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주들은 소작인들에 무차별적으로 소작료를 받아 내려 했다. 주식을 감자에 의존하던 소작인들을 비웃고 아일랜드인의 게으름과 천성적인 모럴 해저드 문제를 사건의 원인으로 몰았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대다수의 답은 굶어죽거나 새로운 신세계로 떠나는 방법뿐이었다. 실제로는 두 가지 선택이 모두 일어났는데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구빈원에서 아사했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떠나게 됐다. 이상하게도 커다란 폭동이나 소요 사태도 없었다. 

영양실조에 빠진 사람들은 구빈원이나 교회 같은 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100만 명이 5~6년 만에 기아로 사망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그 당시의 기억이 깊은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이 때의 상황은 『아일랜드 대기근』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피터 그레이의 『The Irish Famine』이라는 원제의 책이 시공디스커버리 총서의 일부로 번역됐다). 당시의 밀농사는 흉작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밀을 살 돈이 없었다. 

단품종 모노클로널에 의한 재앙이 끝나자 인구와 토지는 다시 평형을 찾았다. 단 하나의 솔루션인 감자에 이른바 ‘올인’을 한 것이 화근이었으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감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일랜드 역시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비록 이주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영양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으나 살아남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고 곧 새로운 곳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이민자와 그 후손이 미국 사회의 주역으로 편입되는 데에는 몇 십 년도 걸리지 않았다. 지배층이 비난한 내용은 새로운 사회로 이주한 사람들의 성공으로 보아 근거가 빈약하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밝혀졌다. 아일랜드도 인구의 엄청난 과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 비극 같기도 하고 해피 엔딩 같기도 한 이런 사건들이 아주 먼 과거의 일은 아니다. 우연하지만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면 언제나 예측을 할 수 없는 불연속점들이 생겼다. 과거와의 단절이 일어나고 그 전과 그 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어쩌면 후세 사람들은 IT 혁명이 일어난 요즘을 하나의 거대한 혁명기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아직 국가적으로 하나의 솔루션에 올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대의 첨단 산업은 높은 자본 집중과 그에 따른 높은 리스크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전자와 IT 관련 첨단 산업은 일부 국가에 있어서는 높은 산업적 우위를 점하는 것도 사실이다. 리스크는 언제나 있었고 사실 첨단 산업이라는 것은 리스크에 해당하는 만큼의 이윤을 붙이기도 한다. 

시스템에 부분적으로라도 개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큰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커다란 문제가 정말로 일어난다면 정책적인 실기를 비난하거나 과도한 집중에 대해, 또는 회사들이 새로운 개발을 등한시한 어리석음을 서로 비난할지도 모른다. 

아일랜드의 감자 사건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소작인들이 감자 이외에는 달리 답을 찾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무시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근원적인 문제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전망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언제나 사람들이 어떻게든 새로운 답을 찾아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예상 외로 간단한 결론이다. 

감자에서 철도로 
거대한 시스템 실패(system failure)를 겪은 사람들이 신세계에 도착했다. 이들이 신세계에 도달했을 때 비슷한 일들이 결국 다시 일어났다. 새로운 답들을 만들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은 명백했다. 

미국으로 이민이 쏟아져 들어오긴 했지만 정작 당시는 세계적인 불황기였다. 사람들은 도착은 했으나 일거리가 없었다. 어려운 시절이 계속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 붐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의 철도 붐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IT 붐에 비할 만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수십 년간 계속됐다. 이들에게 철도 붐은 일거리와 부를 제공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휘말릴 기회를 주었다. 기회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부자가 됐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사람들의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철도 혁명이었다. 

갈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에는 철도 가설자와 철도 종사원을 빼고는 철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많은 이민이 철도를 계기로 부자가 됐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나 부모 때에 불행한 일을 당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부가 된 사람 중에는 그 과정 중에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에 가까운 부상율을 보이기는 했지만 엄청난 돈이 되기 때문에 철도는 건설되어야 했다. 개중에는 너무 무리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는 주주들을 속이거나 고객들에게 사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전한다. 아예 불법으로 주식을 발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이리(erie) 철도를 둘러싸고 철도계의 거물들이 판사를 매수하고 서로 총을 쏴대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들은 결국 화해를 하기는 했으나 주주의 우롱과 불법적 합병이 거의 범죄자 수준까지 갔기 때문에 지금도 이리 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태가 정리되자 밴더빌트나 굴드는 모두 당대에 최고의 명문가가 됐다. 

이 시기에는 아일랜드계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업가들이 철도와 철강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이민자들도 전반적인 지위 상승이 일어나 19세기 말에는 주류에 편입할 수 있었다. 거품이 일던 시기에 적극적으로 자본과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람들을 열광시키던 철도는 산업 혁명으로 바뀐 세상에 또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주었다. 세상이 좁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철도에 매달렸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자 철도 붐도 끝났다. 철도 거품이 사라지자 다시 한 번 커다란 불황이 시작됐다. 또 다른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불황은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계속됐다). 감자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단일 품목이나 마찬가지이던 철도의 불황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적극적인 식민지 개척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불과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가해진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이건 사람들은 거대한 변화를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체제의 모순을 꼬집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엥겔스나 마르크스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일부는 더 온화한 방법인 사회주의로 세상의 모순을 지적했다. 

19세기 중반이 자본주의의 최고 성황기였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것 같고 일체의 제약들이 없던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혹사당했다. 요즘으로 보면 법과 질서라는 것이 완전히 무시된 것 같은 모습들을 보였다. 현대의 법과 질서 체계란 것이 당시에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 요소들을 시정하기 위한 요소를 이미 많이 반영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은 계속됐다. 산업 혁명기의 모순덩어리들의 폭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1차 대전이 끝나고 최대의 불황인 대공황이 찾아왔다. 다시 대공황은 사람들을 한계 상황까지 몰고 갔다가 2차 대전으로 일단락됐다. 그 후로 현재까지 기계의 시대가 있은 후 컴퓨터의 시대가 찾아왔다. 

자본과 지식 
전쟁이 끝나면서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는 사이버네틱스의 역할이 산업계를 넘어 기술 실업 시대를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폰 노이만과 위너는 초기의 자동 제어 기계 설계에 관여했다. 결국 위너는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일이라면 사람은 기계와 경쟁해야 하며 이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의 책 『사이버네틱스와 사회(the cybernetics and society)』에서는 이러한 점을 우려했다. 앞으로 기술 발달로 인해 기술 실업 시대가 올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기술 실업의 위험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위너에게는 정말 절실한 걱정이었다.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의 부제는 「사람의 활용」이라는 주제로 되어 있다. 아직까지 어떠한 사회도 이러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러한 걱정은 일부 SF 소설에서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우려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같은 책에서는 컴퓨터를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실리콘 컬러의 노동자들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써서 묘사했다. 만약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면 높아진 생산성으로 만든 제품도 사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산업 자체가 모순에 빠져 새로운 종류의 불황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했다. 

IT 혁명의 생산성 향상의 그림자 뒤에는 임금 절감과 일자리 축소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뛰어난 CEO가 영입되어 리엔지니어링이나 구조 조정을 통해 하나의 기업체를 살리긴 하겠지만 그것은 시스템적인 규모가 아닌 것이다. 무엇인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이는 실업은 증가하기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저자의 걱정이었다. 

이러한 걱정이나 심사숙고도 사회의 거대한 변화에는 맥을 못 추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만든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아일랜드의 ‘감자’처럼 신성시되어 왔다는 사실이 문제다. 이런 일을 우려하는 현자들의 아이디어와 목소리는 계속 무시됐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경제 성장은 일어나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리프킨은 사회가 점차 자본 중심적이 되어가면서 사람의 노동력을 대처해 간다고 했지만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았다. 이른바 고도로 지식 집약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더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리프킨이 말한 일자리 수가 줄어든다는 통계는 주로 일반적인 직장에 한하는 것이다. 

드러커는 인구 통계학적 근거를 들어 이른바 지식 노동자 계급을 정의했다. 『Next Society』에서 드러커는 특화된 전문 지식을 가진 집단이 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형태이긴 하지만 경제는 실물보다는 지식에 의존하게 되며 연령층도 더 다양해질 것으로 예측한다. 

드러커는 과거 제조업과 농업의 예를 들어 이러한 형태가 변할 것임을 예측했다. 희소한 자원이 자본에서 지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IT 회사들은 설비가 많다거나 공장이 큰 것이 아니라 개발자들의 지식에 의해, 아니면 지적 자산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실물 자산은 이런 회사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회사는 좋은 인적 자원을 유지해야 한다. 반대로 전문 인력은 자신이 속할 조직체가 필요하다. 조직에 있어 희소한 자원은 점차 자신의 시간을 들여 업무 능력을 개발해 온 지식 계급으로 바뀐다. 자신을 종업원(worker)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의 전문가(professional)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직종이 점차 다수가 되기 때문에 과거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 즉 전문적인 지식이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IT 종사자들은 어쩌면 이러한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현실은 아직 이러한 방향으로 바뀌는 중인지도 모르지만 기존의 자본 중심적 생각을 갖고 있는 회사의 중역이나 관리자도 많은 것이다. 

지식 사회의 한 단면은 이렇다. 회사의 중요한 개발자나 연구자가 이직을 하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 이 사람을 스카웃한 회사는 새로운 성장 엔진을 갖게 되는데 그 성장은 엔지니어나 연구자의 지식과 경험에 의존한다. 반면에 원래의 회사는 성장 동력을 잃게 되는데 이 연구자의 지식이 핵심 기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식이 중요하긴 했으나 설비와 자본이 더 중요했다. 

특정한 설비 산업 분야가 아닌 업계에서는 이동이 어렵지만 않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실제로 이런 일이 과거에도 많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브라우저 전쟁에서 시나리오의 개척자인 마크 앤드리슨은 과거에 자신이 개발했던 브라우저 코드를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했다. 윈도우 NT 역시 DEC의 팀들이 VMS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코드를 몇 년 동안 새로 작성했다. 

필자가 보아온 바로는 컴퓨터 회사에서 개발자가 떠나고 난 책상에는 PC 한 대나 반납된 노트북만이 덜렁 남을 뿐이었다. 지식은 그의 머리 속에 든 채로 사라지는 것이다. 새로 이직한 개발자가 활동할 자금과 조직만 있으면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진 코드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원래의 조직에서 개발자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조직의 설비를 이용하여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일이 조직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과 시간을 과외로 투자한 것이기도 하며 그 사람의 정신의 일부다. 혹자는 이러한 이직 경향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자신의 발전을 위해, 또는 마음에 드는 비슷한 종류의 프로젝트나 사업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면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불행이 될 것이다. 

아직 명백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기술 유출 방지법(과거의 첨단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같은 법안들이 발의되는 모습을 보면 회사들이 기술이라는 지식을 점차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이 내용은www.scieng.net에 자세하게 나온다). 

여기서 자본과 지식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른바 지식 사업에서는 지식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 특정한 지식을 지키려는 회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불법적이고 비양심적인 이동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막아야 한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공청회나 토론을 거쳐야 하는데 이러한 노력 없이 독소 조항이 많다고 생각되는 법을 급행으로 통과시키려는 시도도 있는 것 같다. 

scieng.net에서는 이러한 법률 통과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연 이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서 하나의 커다란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산업 혁명의 시기와 같이 노동자가 아무런 힘이 없던 시절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지식이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면 산업에 투자한 자본가의 관점과 근로자의 의견이 너무 달라지면 소모적인 충돌은 더욱 심해질 수 있다(과거의 예에서 보면 정책 담당자들과 지주들이 판단을 그르친 예는 많았다). 드러커는 그의 책 『Next Society』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사회의 의식 구조(social mind-set)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철도가 등장한 뒤 산업 경제의 주도권이 장사꾼에서 기술자나 엔지니어로 근본적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정보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지식 혁명이다. … 핵심은 전자 공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지 과학이다. 즉 지금 막 등장하려는 경제 및 기술에 있어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과제는 십중팔구 지식 전문가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평가되는지, 그리고 그들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 근로자를 전통적 피고용자로 머무르게 하고 또한 그들을 계속 그렇게 취급하면 과거 영국이 기술자를 장사꾼으로 대법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십중팔구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본이 주요 생산 요소이면서도 또 자본 공급자가 우두머리가 되는 전통적인 의식 구조를 유지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 근로자가 기꺼이 피고용자 신분으로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 보너스와 스톡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 그리고 앞으로 단기적 목표인 주주 중심 가치를 일차적 목적으로, 그리고 존립 근거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지식에 기초한 사업들의 성과는 지식 근로자가 매력을 느끼게 하고 그들을 머무르도록 하고 동기를 부여하면서 경영하는 조직에 달려있다. 

현실을 보면 아직 이런 세상은 한참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 자본과 지식의 싸움에서 지식이 우위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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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9 21:46

기억과 역사

예전의 zdnet  컬럼입니다. 
천천히 두고 읽기 위해 옮겨 놓았습니다. 

컴퓨터와 달리 사람의 기억(memory)은 부정확하다. 심리학적 테스트에 의하면 사람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한다. 

기억은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강하게 왜곡되며 때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때로는 집단의 무의식을 반영한 가공의 산물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기억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며 집단 간에 공유되기도 한다. 또한 오래 유지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기억은 자의식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것이다. 

엉성하고 잘못된 정보에 의해 연결되어 있더라도 기억의 윤곽에 의해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와 세상을 인지한다는 것이다. 자의식은 기억과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항상 파악할 수는 없지만 직접 경험했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빌려서라도 정보를 얻은 공간과 시간은 기억으로 남는다. 기억은 시간과 공간의 전반적인 윤곽(scope) 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나의 정신적인 지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뿐만이 아니고 다른 생물들도 좀 덜 정교하긴 하지만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다. 기억이 없다면 사냥감에 대한 우회적 접근이나 미로탈출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가며 기억은 정신적인 지도를 갱신한다. 때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기억이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그 동안 몇 번이나 예를 들었던 사회생물학적인 예라든가, 집단적 정보교환 같은 예에서 뉴럴(neural) 네트워크처럼 움직이는 곤충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하나의 신경 세포이자 다른 세포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받는 이야기는 자주 언급했던 부분이다. 

하나의 자극이 발화(fire)되면 다른 세포로 연결되고 어떤 클러스터에서 반향이 일어나면 수백 배의 증폭이 일어나 거대한 자극의 파도로 연결되는 커다란 신호를 만들어 낸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작은 세포는 아무 것도 아니다(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다른 세포가 수도 없이 많은 곳이 바로 신경절(neural node)이다). 하지만 수백 개, 때로는 수백만 개를 넘는 세포가 모이는 신경절은 단순히 수백 개의 군집 이상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회적인 곤충의 예에서 이러한 신경절의 모임으로 움직이는 작은 개체들은 또 다른 거대한 개미집의 신경절의 한 부분이다. 그 속에서 개체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개체가 조직의 위계질서 위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개체는 전체적인 질서에 관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조직은 통일성을 유지한다. 지금까지 신경절들은 잘 동작하고 개미집은 붕괴되지 않으며 몇 억 년을 버텨왔다(베르베르의 개미가 연상되지 않는가?). 

기억과 환상의 공유 

기판 위에서 실제로 신경조직 매트릭스를 배양한 사진
어느 때 부터인가 이러한 조직(organization)과 작은 개체(agent)에 대한 이론들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사이비 과학으로 비난받지 않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이론이 명확한 증거가 없거나 입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의 정통적인 과학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위계적 질서를 연구하는 복잡성 과학의 한 분야도 존재한다(이를테면 유전자 알고리즘을 만든 John Holland의 Compex Adaptive System 같은 것이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다소 애매하지만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링크』 같은 작품도 복잡성 네트워크의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조직이나 개체가 메시지를 공유하는 방법은 어떠한 방법으로건 기억을 공유하고 복사하는 일이다. 운영체제의 IPC가 메모리의 복사 작업의 하나인 것처럼 사람들도 기억과 환상을 공유한다. 하나의 집단이든 개체이든 기억을 공유한다. 

필자는 그동안 컴퓨터 역사에 대한 컬럼을 쓰면서 기억에 대한 개인적인 규모의 재현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일어난 사실들이 존재하며 이를 풀어쓰는 더 많은 방법론이 존재하고 필자의 글쓰기는 컴퓨터 진화에 참여한 선수들의 입장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글쓰기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자 또 하나의 기억이다. 이는 사람들의 기억에 다른 기억을 첨부시키는 작업이다. 공자는 글을 쓰지 않지만 편집하고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컨텐츠가 된다고 말한바 있다(述而不作). 

사기열전의 저자인 사마천도 이와 비슷한 방법을 택했다. 하나의 소극적인 방법론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도올 김용옥 선생의 표현을 빌면 사실은 ‘述而作’에 해당되는 적극적 문화음모론이라고 한다. 쓰기(作 : writing)는 안하지만 편집하고 적는 것(述 : editing)으로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장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인데, 필자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빼곤 별 문제가 없는 접근 방법이다. 이는 도올 선생의 천재성이 최대치에 이르렀던 1990년대 초의 작품인 『노장철학 이것이다』라는 작품에 나오는 글로 당시 도올은 양심선언을 포함해 정말 참신한 무엇이 있었다(필자는 한때 도올의 팬이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역사관으로 변형될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러한 기억의 조작으로 독자들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는 작은 음모이다. 이러한 작은 작업들이 없다면 얼마 후 현재의 컴퓨터 업계를 통해서만, 때로는 MS나 오픈소스 진영의 글들을 통해서만 현실을 바라보게 될 것이고, 그 이전의 세계를 포함한 이전의 역사는 당연히 잊혀지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 틀림없다(하나의 왜곡이다). 

객체지향적 프로그래밍이나 그 보다 이전의 구조적 프로그래밍의 장단점을 평가하는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추종자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이라면 사람들이 광적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떤 패러다임의 끝에는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집착하는 사람이나 맹신도가 있기 마련이다. 머피의 법칙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느 시기에나 뻔한 거짓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라는 경구를 사용하여 빗댄 적이 있다. 

어떤 세력과 그 반대파의 이면에는 더욱 다양한 과거가 숨어 있다. 필자가 걱정하는 것은 이러한 시각이 고착화되어 많은 다양성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른바 조직의 위계질서라는 것이 경쟁에서 도태된 존재들의 소멸 내지는 축소를 통해서 강한 자는 더 강해지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다 빼앗기는 속성을 갖는다고 하지만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과거의 대안들은 이러저러했다는 자취를 그려보는 작업은 중요하다. 

승리한 패러다임을 인정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여러 가지 일들의 시절과 인연을 잘 관찰해 보는 것도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잘 맞는 일이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것은 세상에 사람이 많다보면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나지만 필자는 어쩐지 이러한 종류의 작업을 좋아하도록 코딩되어(재능이 있다기 보다는 좋아하도록)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기억의 용법은 가급적 많은 다양성을 발굴해서 이전의 기억과 가치들을 머리속에서 기억으로나마 살려보려는 것이었다. 과거 탐구의 목적은 기존의 패러다임 고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재를 준비하는 것이다. 사실 원래는 그렇게 고착적이지 않은 패러다임이 매우 고정적으로 보일 뿐이다. 

현재의 구조들도 과거처럼 빠르게 해체되고 재구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이는 것과 그 가능성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바로 과거의 용법이다. 컴퓨터 업계를 산업보다는 문화적 측면으로 생각한다면 다양성에 대한 예들을 들추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작업은 어느 정도 과거에 집착하게 되는 불필요한 측면도 있다. 

기억의 용법 

필립 K. 딕
SF 작가인 필립 K.딕(1928~1982)의 소설은 사람의 기억과 자의식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토탈 리콜’이나 ‘마이너리티 리포트’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 같은 작품처럼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 있기 때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필립 K.딕이라는 작가를 알고 있다. 기억과 그로 인한 자아정체성은 딕의 어두운 컬트와 맞물려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사람의 정체성은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진다. 기억 손상에 빠진 사람의 자아정체성은 심하게 손상 받는다. 심리적으로 기억은 때로 실제로는 없었던 현상도 만들어내고 어려웠던 현실도 따듯하게 포장하곤 한다. 도대체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사람들은 자의식의 많은 부분을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억이 바뀌면 현실에 대한 자의식도 바뀐다. 그리고 기억은 예상외로 쉽게 변조되거나 왜곡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딕은 항상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하는 주제에 집착했다. 사람들의 기억과 그 기억의 왜곡이 만드는 현상을 보고 있으면 현실이 왜곡되는 것 같은 생각 끝에 ‘정말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딕은 이러한 분야의 개척자였다. 딕의 생전에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작을 쏟아내는 작가를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라는 말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경쟁에서 승리한 편의 의견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한다. 그 패러다임이 유리한 위치에서 지배적인 효력을 발휘하면서 현실을 강력하게 왜곡하곤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래의 커다란 사건들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상식과 사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필립 K 딕의 소설 ‘토탈 리콜’의 한 장면. 어느날 주인공에게 잃어버린 기억이 살아나다.
사람들은 강한 자에 대해 아무런 적개심이나 의심도 없이 현실 왜곡을 받아들인다. 너무 간단한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나 이러한 방법론은 현실을 쉽게 살아가는 좋은 방법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른바 정통성이나 일반적인 가치관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그것이 어떤 사람들이 바라볼 때는 때로 크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곤 문제가 없다.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려고 하는 사실, 과거의 기억으로 어쩌면 크게 왜곡되었을 지도 모르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적어도 그러한 사실을 부정할 만한 연구와 공부가 필요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현실이 왜곡되면 기억도 왜곡된다. 

좀 더 격렬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단지 기억 속에 담긴 환영이라는 것이다. 가장 객관적으로 보이는 시각조차 완전히 독단적인 정보 처리를 시작한다. 우선 비교해부학적인 이유로 눈의 망막은 완벽한 뇌의 연장이다(중추 제 2번 신경의 연장이다). 빛이 망막에 도달한 순간부터 75% 정도는 그대로 폐기된다. 시신경 자체가 불안정한 화학전달 물질로 구상되어 빛을 받으면 매우 복잡한 반응을 거쳐 신경증폭이 일어난다. 

이 역치를 넘는 빛만이 시신경을 자극한다. 일단 눈에 먼저 들어온 자극을 수용한 시신경들은 다른 시신경들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눈동자의 움직임을 통제하게 된다. 눈은 작은 해상도의 센서를 가진 3차원 스캐너처럼 물체의 윤곽을 따라 빠르게 움직인다. 

눈의 정보처리는 고성능 카메라보다는 제멋대로 움직이는 스캐너를 닮았다. 대충 물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면 윤곽의 스캐닝을 중지한다. 그 다음에는 자체적인 신경망 비슷한 것을 동원하여 1억 개의 뉴런으로 전달할 수 있는 데이터 량을 100만 개 정도로 줄여 버린다. 

그 다음은 시상(thalamus)에서 다시 한번 불필요한 정보를 버리고 시각 피질에서 다시 한번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시각 정보만이 남게 된다. 이 정보가 뇌의 다른 부분들과 합의한 후에야 눈으로 본 물체에 대해 판단과 기억을 갖게 된다. 이 정도는 신경생리학의 기본 내용이다. 

다른 감각은 더 주관성과 정보 폐기가 더 심한 것들도 있다. 우리 몸 신경계의 약 20% 정도가 정보 전달을 담당하고 있다면, 나머지 80% 정도의 신경계는 서로 다른 신경 세포들과의 연결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내부적으로 정보의 통일과 합의를 위한 통신 시스템이며 외부 자극보다 내부적인 정보교환 시스템의 총량이 더 큰 것이다. 이러한 구조가 내부적인 편견이나 확신에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한번 네트워크가 구성되면 생물들은 훈련된 대로 반응한다. 

바로 이 부분에 기억의 용법이 있다. 사람들은 기억에 의해 훈련된 반응을 하는 것이다. 기억을 조작하고 다루는 것만큼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기억을 조작할 수만 있다면, 심지어는 눈으로 본 사실에 대해서까지 강력한 왜곡을 발휘할 수 있다. 대뇌 변연계(limbic system)는 뇌 안에 있는 작은 신경망으로 정보가 과연 필요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감정의 중추이다. 이 시스템은 매우 민감해서 외부의 평판과 자극을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다. 

TV 방송국들이 시청률을 모니터링하고 TV 프로를 제작하는 것처럼 변연계는 외부 영향에 민감하다. 결과적으로 변연계는 센서이자 기억의 제작자이다. TV 프로가 방송 내용을 만들어 내듯 변연계는 기억의 포탈인 것이다. 자극이 이 감시자를 통과하지 못하면 기억도 없다. 

현실과 기억의 관계 

대뇌의 변연계, 
기억의 포탈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라 많은 부분이 기억이다. 독자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지금 눈 앞에는 책상이 있고 책상은 방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음악이 들리는 라디오가 있고 PC가 한 대 놓여 있다. 우리는 방 바깥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집에는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집 밖에 차들이 지나가고 멀리서는 다른 소리도 들린다. 

독자들은 밖에 도로가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도로를 따라가면 사무실과 회사가 나오며, 회사나 학교에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지금 책을 읽고 있는 방 외부의 모든 현실은 기억이다. 기억 속에 거대한 현실감이 안주한다. 존재의 안정감은 일종의 환상이다. 이미 지나가고 변조된 기억 속에 세상이 존재한다. 

게다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의 기억은 작화(fiction)라는 것이다. 기억이 정보처리가 안 된 부분을 적당히 둘러대기하여 만들어 낸 그림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 연구는 심리학에서는 흔한 주제였다. 사람들에게 교통사고 필름을 보여주는 E.Lofters의 실험에서는 사람들이 영상 속에서 보이지 않던 건물에 대해 생생히 증언하는 결과를 얻었다. 약 20% 정도의 사람들이 암시를 받지도 않은 상태로 질문에 나오는 존재하지도 않던 건물의 존재를 증언했다. 

다른 실험에서는 미리 여론을 조작하고 (길이가 다른 막대기에 대해 같은 길이라고 미리 다수의 사람들이 주장해 놓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실험했다. 이에 대해 75%의 사람들은 조작된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해 길이가 다른 막대기임에도 불구하고 같다고 증언했다. 실험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주의의 여론에 굴복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막대기의 길이가 다른 것을 같은 길이로 보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사람들의 감각이 현실이 아니라 집단 의견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히려 소수에 속하는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일부는 자신이 계속 잘못된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고(사람들이 맞는 것 같은데 자신은 계속 잘못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는 분명히 잘못된 것을 알지만 인기 없는 의견을 말할 용기는 부족해 했다. 

이 정도면 필립 K. 딕이나 다른 SF 작가의 소설이 아니더라도 필자를 포함한 사람들이 얼마나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것 같은 여론 조작에 취약한 가를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자기확신이나 자아정체감마저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암시를 받은 피 암시자 뿐만 아니라 암시를 조작한 사람까지 이러한 무의식은 전염된다. 사람들의 본성 중에 맹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케팅 용어중에 ‘카피 캣’이라는 말이 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마당을 돌기 시작하자 다른 고양이가 따라서 돌기 시작했고 결국 온 동네의 고양이가 마당을 돌았다. 첫 번째 고양이 역시 특별한 목적이 없이 마당을 돌 수도 있지만 두 번째와 그 이후의 고양이들은 다른 고양이가 마당을 돌았기 때문에 마당을 돌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카피 캣’이나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신하들과 같은 생각을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각이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력히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각과 입마저 통제하는 거대한 힘이자 대중을 그릇된 믿음으로 뒤덮고 가두는 메커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필자와 친한 정신과 의사가 방문을 했다. 이전 컬럼을 쓸 때처럼 필자는 사람들의 기억에 대해 그에게 물어보았다(필자는 예전에도 좌절과 공격성, 우울증와 생존본능에 대한 메커니즘에 대해 많은 깨우침을 얻은 적이 있었다). 이번 시간에는 기억의 용법에 대해 적고 있다고 하자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당연히 기억의 용법을 보충할 내용인줄 알았는데 기억의 파괴에 대해 설명을 더 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억이 아니라 망각(memory loss)도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해 주겠노라고 자청해서 의견을 듣게 되었다. 

정신과적으로는 기억이 사람의 자의식의 중요한 요소라면 망각 역시 생존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망각이 불필요한 연산을 없애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다른 한 가지는 잔존물이라고 불리는 정서 반응과 사실 자체를 망각하는 일 자체가 사람의 정서 상태에 대해 중요한 보호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저절로 불필요한 내용들이 소거되는 작업이 판단과 실행의 효율을 높이는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기억이 남아 있다면 감당하지 못할 자의식을 보호해 준다는 것을 지적했다. 판단이 이들에 의해 불필요한 연산과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제거하도록 적응되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특성 자체가 중요한 진화적 결론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법한 일이었다. 과거의 추억, 그것도 좋지 않았던 추억과 감정의 잔재가 계속 일상생활의 기억 속에서 현실과 충돌한다면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일과 연관된 기억들은 현실에 꼭 필요하지 않는 한 존재할 필요가 적다는 것이 문제였다. 

없어지는 기억 중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현실도 포함된다. 기억의 파괴와 함께 과거 왜곡되었던 기억도 자동으로 폐기된다. 듣고 보니 기억의 상실 역시 자의식 유지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사람들이 그토록 망각을 잘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신없이 변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일종의 집단무의식이거나 지능 그 자체의 고유한 기능이라는 것이다. 

다른 예로 적응을 위해 선천적인 처리량 이상(사람의 정보처리 능력은 예상외로 빈약할 수도 있다고 한다)의 정보를 유지하지 않으려 하고 적응에 필요한 것만을 유지하는 예를 들기 위해 슈퍼컴퓨터와 체스를 두는 체스 명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체스 명인은 체스를 둘 때 필요한 수를 몇 십 개 정도, 때로는 열 개 정도로 제한하지만 컴퓨터는 셀 수 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체크한다. 둘은 서로 다른 신경처리를 하는 것이다. 

체스의 명인은 사람이기 때문에 뇌에서 불필요한 경우의 수를 제한했던 것이다. 마구 폭주하는 현실 세계의 일들과 그 적응의 와중에 사람의 신경은 혹사당한다. 그리고 마음의 잔존물들은 서서히 제거가 되며 새로운 정보와 혼합된다는 것이다. 처리 능력이 문제였던 것이다. 

적응을 위해 사람들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빼어놓고 모든 것을 버린다. 집을 청소하면서 결국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것처럼. 생각해보니 기억이라는 것은 예상보다 성능이 좋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뉴럴 네트워크, 네트워크 속의 네트워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의 지도는 계속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기억의 용법은 기억을 만드는 용법과 기억을 파괴하는 용법이 있는 것이다. 과거 잔존물들을 살려두고 싶었다는 컴퓨터 역사가의 꿈이 잠시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필립 K.딕이 살아있다면 이메일을 보내서 의견을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강도 
웹의 전신이라고 불리는 베느바 부시의 하이퍼텍스트 머신 이름은 메멕스(memex)였다. 메멕스라는 이름은 기억의 교환(memory exchange)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전 컬럼에서 다룬 적도 있지만 사람들은 메멕스의 이상에 거의 40여 년을 집착했다. 이 기계를 구현하기 위한 중간 과정에서 엥겔바트의 GUI나 앨런 케이의 OOP적 개발이 있었다. 

네트워크의 초기 구현자 중에도 메멕스의 추종자들은 많았다. 메멕스는 결국 하나의 꿈으로서 사람들의 컴퓨터 개발을 도운 셈이었다. 마치 SF 작가들이 우주 시대를 앞당겼다고 보는 것처럼. 결국 웹이 개발되면서 메멕스의 이상은 어느 정도 구현되었다. 

부시가 상상하듯이 기억의 교환 장치는 분명히 사람들의 지적인 능력을 바꿔 놓을 것이다. 정보 또는 기억을 교환하고 공유하면서 무언가 좋고 고상한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부시의 생각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게 고상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부시는 사람들이 좋은 컨텐츠를 쉽게 공유하면서 정신적인 능력의 전반적인 진보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대신 웹은 광고판과 거대한 기억장치 같은 것으로 변했다. 초기 라디오와 TV 개발자들이 생각했던 이상이 깨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웹의 시작은 어떤 대학원생이 브라우저를 조금 개량한 뒤에 더 갑작스럽게 진행되었다. 

웹과 네트워크가 세상을 연결하게 되자 웹이 하나의 거대한 기억 창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사람들은 물리적인 주소보다는 전자적인 주소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검색엔진이 기억을 더듬는 ‘더듬이’ 같은 것으로 출현했고 사람들의 존재는 구글에 존재하는 몇 개의 인덱스와 링크로 변했다. 

사람들은 메멕스의 기억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과거 TV와 영화, 그리고 책의 기억공간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처럼. 미디어 비평에 나오듯 TV 시대에 TV에 나오지 않는 것은 현실이 아닌 것으로 변한 것처럼 요즘은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했다. 

웹에서 검색되지 않는 정보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연결 강도를 측정하는 방법도 바뀌었고(바바라시의 『링크』같은 책을 보라) 사람들의 무의식을 조작하는 방법도 바뀌게 되었다. SF 작가들도 새로운 방법으로 글을 써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사람들의 많은 망각을 웹이 메워주기는 하지만 기억의 형성과정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카피 캣’의 경향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거대한 동조집행자의 무리 속에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정에 민감하고 겁이 많고 눈치를 보는 사람의 변연계는 그대로 남아 있다. 

기억이 애매한 공간을 이상한 것들로 만들어 넣는 습관이 변한 것도 아니며 남들이 의견을 강요하면 수그러드는 자세가 변한 것도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의견과 여론조작에 언제라도 동조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의 겁먹은 눈망울이 변한 것도 아니다. 여느 때처럼 현실감각은 기억의 조작에 어느 때라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다만 기억의 생성 장치의 속도와 연결 강도는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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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6 23:36

NT 나오다.

요즘 너무 바쁘다보니 토이팹을 들르지조차 않는 게으른 블로거가 되어갑니다. 
예전에 적었던 컬럼으로 기술유전자라는 제목으로 마소에 실린적이 있습니다. 

NT 나오다.


기술 유전자


아폴로 11호가 처음 달에 착륙했을 때 아폴로 계획의 총 책임자이던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일약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브라운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런던을 공습하던 V2 로켓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V2의 V는 Vergeltungswaffe로 독일어로 “복수 무기“를 의미했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의 목표가 핵무기의 개발이었다면 독일은 로켓으로 적국을 초토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달에 착륙한 아폴로의 아키텍트는 런던에 수백 킬로짜리 미사일을 퍼붓던 V2의 개발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미국의 영웅은 나치독일의 영웅이기도 했다.


독일이 전쟁에 패하자 미군은 서둘러 로켓연구소의 연구진들을 미국으로 데려왔으며 이들은 미국의 우주계획과 대륙간 탄도탄의 개발 초기단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은 실제로 로켓 추진기를 만들 능력이 없었다. 당시는 냉전의 초기 상황으로 개발진들의 과거가 어떠했건 이들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고 판단했다. 초기의 대륙간 탄도탄은 V2로켓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몇 개를 묶어서 추진했고 1950년대가 되어서야 독자적인 로켓추진기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 독일의 V2 역시 전쟁의 광기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인재와 자원의 총결집으로 전쟁의 광기속에서 갑작스러운 V2의 설계가 가능했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그만큼 로켓의 설계라는 일이 어려운 작업이었다. 로켓을 만들 수 있는 인재의 풀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소련에 끌려간 독일의 로켓 기술자들 역시 소련의 우주계획과 탄도탄 계획에 동원되었다. 소련 역시 이들의 기술적 유전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V2는 실험적인 로켓이 아니라 전쟁에 배치되어 도시를 폭격하기 위한 무기로 수백 Kg의 폭탄을 싣고 대기권까지 올라가야 하는 실용적인 로켓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늘날의 모든 액체 추진 로켓은 V2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  기술에도 일종의 유전자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로켓이나 핵무기와는 다르지만 컴퓨터의 역사에서 운영체제는 ,특히 일정 규모 이상의 운영체제는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한번 성공적으로 개발된 운영체제의 유전자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운영체제 말고도 수많은 운영체제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으며 일부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곤 했으나 오늘날 그 운영체제의 후손이나 사용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요즘에도 마이크로 커널이나 진보적인 개념의 실험적인 운영체제들이 많이 있으나 이들 중 앞으로도 살아남을 운영체제는 1%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지고 체계화 될수록 새로이 등장한 운영체제의 생존 가능성은 그 만큼 낮다고 할 수 있다. 초기의 구현 개념 설정부터 실제 구현까지는 기술적으로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사용자층의 확보라던가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에는 개발회사의 규모라던가 명성 같은 것이 필요하며 기술적인 전통도 필요하다. 개발자와 함께 기술적 전통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또 운영체제는 적어도 일정기간 동안 살아 남아 사용자들의 요구와 비판을 수용하며 살아 남을 수 있는 일종의 영속성(persistancy)이 필요하다. 이들을 생물체에 비교한다면 하나의 기술적 유전자의 보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 IBM의 후광을 입어 등장한 MS-DOS가 마지막 버전까지도 개리 킬달의 CP/M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처럼 NT와 윈도우의 후손들 역시 선조들인 DEC와 매킨토시의 유전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MS는 원래부터 운영체제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술적 유전자를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오늘날 유닉스는 30년 이상의 생존성을 , 지금도 간혹 쓰이는 MS-DOS는 초기의 CP/M부터 고려한다면 역시 30년 이상의 운용 경험을 그리고 윈도우 NT 역시 VMS부터 고려한다면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만약 아무리 개념적으로 좋은 운영 체제가 있어도 초기부터 사용자층이 너무 엷거나 한정된 수의 특수한 기계에서만 구동된다면 이런 장구한 세월동안 개선되고 유지 발전이 지속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갖기가 힘들다 아니면 운이 좋아 초창기부터 사용되어 왔던가. 리눅스 역시 유닉스의 클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만약 전혀 새로운 운영체제였다면 몇 사람의 관심으로 끝나고 말았을 가능성도 많다.

  

반대로 생각하면 한 운영체제가 널리 쓰이기만 한다면 최선의 성능이 아니더라도 그 존재의 당위성과 지속적이며 지루한 업그레이드와 변경에 대한 당연한 존재이유를 확보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MS의 운영체제들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데스크탑 운영체제의 거의 전부와  서버 운영체제에서 상당한 부분이 이미 MS로 기울어졌다.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MS의 제품을 사용해도 다른 회사나 단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커다란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른바 공포의 블루 스크린이 보여도 운영자가 리셋을 눌러주면 그만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절대다수라는 또는 오랫동안 익숙하다는 그 사실 자체로서 최고의 마케팅을 구사하고 있는 MS의 운영체제의 핵심은 NT가 근간이다. 흔하니까 더 많이 쓰게되는 점유의 포지티브 피드백은 NT가 우수하다기 보다는 일상적인 용도에 NT가 크게 부적합하진 않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인터넷 서버나 적당한 규모의 데이터베이스 (MS에 따르면 커다란 데이터 베이스나 어플리케이션도 수행 가능하다고 한다.)에는 별 문제 없이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비슷한 규모에서는 다른 운영체제가 절대적인 성능상의 우위를 점하지 않고 있다는 가정도 아마 맞을 것이다. 보안 취약성 문제가 일어 날 때마다 보안 패치를 적용하거나 알려져 있는 보안상의 결함들을 그때그때 패치로 때울 수 있는 것도 워낙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수라는 조건은 경쟁자에게는 무서운 장벽이기도 하다.


요즘 사용하는 윈도우XP나 윈도우 2000은 윈도우 NT에 기반한 기술이다. NT는 80년대부터 개발되었다. NT는 MS의 입장에서 보면 보물이자 당분간 운영체제 시장을 지배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NT의 성공은 기술적이라기보다는 마케팅과 시장 점유율의 승리하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NT는 1988년부터 개발되어 1993년 버전 3.1이 발표되었다. 너무나 짧은 시기에 성공적인 시장 점유를 마친 NT는 사실 NT(New Technology)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긴 개발 역사를 숨기고 있었다. NT는 역사적으로 보면 70년대부터 개발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70년대부터 유닉스와 경쟁하던 VMS가 NT의 조상인데 UNIX와 NT는 시작부터 다른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두 운영체제는 16비트 ,32비트 그리고 이제 64비트 시장에서도 경쟁을 해야하는 30년간의 맞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둘 다 대기업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출발부터가 매우 달랐다. 유닉스의 개발동기가 취미활동에 가까운 켄 톰슨과 리치의 작업이었다면 NT의 조상인 VMS는 처음부터 32비트 시장을 바라보고 만든 제품이었다. 그 개발은 DEC라는 대단한 회사로부터 시작되었다. ( DEC와 그 창업자인 올슨을 다룬 책도 있다 . 책의 제목은 The Ultimate Entrepreneur: The Story of Ken Olsen and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


DEC(Digital Equipment Corporation)


DEC에 대해 알파칩과 알타비스타(altavista.com)를 만든 회사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DEC는 정말 탁월한 회사였다. DEC의 창시자 켄 올슨은 컴퓨터 업계의 영웅이었다. 빌 게이츠 역시 어린 시절 켄 올슨을 자신의 영웅으로 여겼을 정도로 컴퓨터 업계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했다. 흔히 디지털(Digital)로 불리는 DEC는 사실상 모든 마이크로컴퓨터와 미니컴퓨터의 기술 유전자 내지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1957년부터 1997년까지 40년간  존속하며 수없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기의 마이크로를 포함해 컴퓨터에 관여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DEC의 PDP시리즈 컴퓨터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닉스 역시 PDP 시리즈에서 개발되었다. 유닉스의 32비트화도 PDP가 32비트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모든 임베디드 컴퓨터 컨트롤러의 시작도 DEC에서 비롯되었다.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탄생 자체가 PDP-8에서 영감을 얻은 인텔의 엔지니어 테드호프의 설계로부터 시작되었다.

1957년 MIT의 링컨 연구소의 TX-2 프로젝트에 염증을 느낀 켄 올슨은 자신의 동료와 함께 DEC를 설립했다. TX-2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개념인 트랜지스터를 사용한 대형 컴퓨터였다. 올슨은 TX-2에 사용되던 모듈들을 모아서 연구실에 필요한 컴퓨터를 세팅하는 것으로 출발한 작업은 1961년 PDP-1이라는 제품을 출시하면서 미니 컴퓨터의 세계를 열었다. 이 제품을 가장 먼저 구입한 회사는 BBN(www.bbn.com)으로 PDP-1을 이용하여 Interrupt Priority Controller를 만들었다. 요즘의 하드웨어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일이겠지만 당시의 기계는 트랜지스터 모듈을 프린트 기판에 조립한 것으로 레지스터 값들은 작은 콘솔에 있는 림프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CPU라는 개념이 하나의 칩이 아니라 ALU와 레지스터 모듈들을 전선(버스)으로 묶어 놓은 형태였다. 당연히 콘솔에 있는 스위치들을 눌러서 레지스터 값을 바꾼 후 시스템을 재 가동 할 수도 있었다. 운영요원이 디버거인 셈이었다.


그림 1) DEC의 PDP-8. 최초의 마이크로 컴퓨터 키트인 Altair 8800과 거의흡사한 모습이다.

IBM을 포함한 다른 업체들이 초고가의 대형기들을 만들었다면  저렴하며 성능이 나쁘지 않은 DEC의 컴퓨터는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수요를 창출하게 되었다. DEC는 여러 가지 컴퓨터를 만들었으나 초기의 성공적인 제품은 1964년의 PDP-8이었으며 12비트컴퓨터였다.  가격은 12000달러로 당시로서는 매우 저렴한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컴퓨터가 나오자 사람들이 과감하게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들을 많이 시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PDP-8은 명령어가 적었고 메모리 보호가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PDP-8로 그전에는 불가능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나온 PDP-11은 시장을 석권했다. PDP-8보다 크게 복잡하지는 않았으나 DEC는 집적회로의 개발에 신경을 쓴 관계로 작은 시스템은 요즘의 PC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PDP 에서는 RTSS와 유닉스를 포함한 다양한 운영체제가 수행되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컴퓨터 학계의 표준 시스템이나 마찬가지였다. PDP-10 시리즈 컴퓨터는 전산센터용으로 개발되었고 36비트의 아키텍처를 가지고 있었다.  PDP-10은 AI 나 LISP 개발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당시의 DEC에는 Gordon Bell(http://research.microsoft.com/users/GBell/)이나 Allen Newell같은 쟁쟁한 사람들이 근무했다. 



1976년이 되자 DEC는 점차 고성능의 컴퓨터(super-mini라고 한다)로 이행하기로 하고  1978년 VAX 11/780을 발표했다. VAX로 DEC는 미니컴퓨터의 시장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하위 기종에서는 점차 점유율이 떨어지게 되었는데 마이크로 컴퓨터들과 워크 스테이션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DEC의 사장 점유율은 떨어지게 되었다. DEC는 PDP-10의 후속기종이나 다른 모델을 포기하고 점차 VAX를 주 기종으로 밀게 되었다. VAX의 운영체제는 VMS와 Unix가 있었고 당연히 DEC에서는 UNIX 보다는 VMS가 훨씬 좋은 운영체제라고 평가했다. 사용자들이 UNIX를 사용하는 것에도 공공연히 반대했고 켄 올슨은 UNIX를 엉터리(snake oil)라고 주저없이 혹평했다고 한다. ( DARPA는 그전까지 인터넷을 관리하는데 사용했던 PDP-10이 노후화 되었고 DEC가더 이상 PDP-10 시리즈를 생산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되자 DEC와 접촉하여 VAX/VMS에서 TCP/IP를 구현해 주도록 요청했으나 곧바로 거절당한 적이 있다.  DEC가 고유의 VMS 운영체제를 변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인터넷의 구현은 유닉스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VAX에서 수행되는 유닉스에서 TCP/IP 스택이 구현되었다.)


1980년대 후반이 되자 DEC는 IBM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큰 컴퓨터 회사가 되었는데 전세계에 걸쳐 10만명을 고용하고 있었다, DEC는 당시에는 무적으로 하드웨어를 제외하고도 거의  모든 분야에 진출해 있었다. DECnet과 같은 독자적인 네트워크 시스템과 파일/프린터 공유 시스템 , 수없이 많은 소프트웨어들 그리고 자체적인 관계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잘 만들어진 제품들이었으나 DEC에서만 수행되거나 DEC 중심적으로 만들어진 것들로 고객들은 점차 다른 서드 파티의 제품들을 찾게 되었다. 올슨은 잘 만들어진 제품들은 저절로 팔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은 점차 32비트 기종의 시장에서도 RISC들과 386같은 경쟁자들이 나타나면서 점차 악화되었다. 1990년대 초가 되자 매출이 급격히 떨어졌고 DEC는 최초로 감원에 들어갔다.


회사는 하나의 대책으로 64비트의 RISC 아케텍처인 (그전까지의 CISC 구조인 VAX의 구조를 버리고 ) 알파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알파는 1990년대 말까지 가장 빠른 CPU로 VMS와 유닉스를 수행할 수 있었으며 MS의 윈도우 NT도 실행할 수 있었다. DEC는 Open VMS라는 새로운 VMS 개념의 제품으로 유닉스업계와 경쟁하는 한편 자체적인 유닉스 시스템 (나중에 OSF/1에서 True 64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도 출시 했다. 광고에도 점차 집착하게 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미 시장이 형성된 Unix로부터 점유율을 뺏어 올 수도 없었고  NT가 점유하는 저급의 서버시장의 점유에도 실패했다. DEC의 모든 서버 제품들은 그 이전의 PDP 시절처럼 시장을 점유하지 못했다.


올슨은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로버트 파머가 CEO로 영입되었으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적자가 계속되어 대량의 감원이 계속되었고 일부 제품은 오라클로 , 어떤 프로세서(예를들면  Strong Arm 같은)들은 인텔로 팔려나갔다.  결국 1998년 12월 DEC는 컴팩에 매각되었다. 그리고 컴팩은 다시 HP와 합병했다.


DEC가 미니 컴퓨터 회사로 출발하면서 40년간 지속되는 동안 대형기들이 사람들에게 해줄 수 없는 많은 영향력과 업적들이 추구되었다.  ASCII  문자 셋은 DEC에서 개발된 것이며 ISO-8859와 Unicode는 DEC의 다국적 문자 셋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사실 DEC의 컴퓨터는 컴퓨터 개발에 있어 하나의 요람이었다. 또한  대형기와 마이크로 컴퓨터의 사이를 잇는 교량이었다. PDP 기종에서 수없이 많은 프로그래머가 교육을 받았고 또 많은 어플리케이션과 시스템들이 PDP에서 개발되었다.  PDP 시리즈가 존속되는 동안 초기의 모든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자들이 DEC를 모태로 또는 DEC에서 수행되는 프로그램에서 영감을 얻어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곤 했다. 미니 컴퓨터에서 8080을 에뮬레이트하는 작업들도 PDP상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았다.  유닉스 역시 PDP에서 개발되었고 최초의 C 언어도 PDP에서 태어났다. 초기 마이크로 컴퓨터 개발자의 요람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atari , apple ,osborne 그리고 doctor dobb's journal 등이 이 클럽에서 탄생했다.)의 구성원들 역시 PDP-8과 PDP-11의 신세를 졌으며 이들은 마이크로 컴퓨터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VMS에서 NT로


David A.Solomon과 함께 Inside Microsoft Windows 2000 (3판- Microsoft Press) 이라는  책을 쓴 Mark Russinovich 는 그의 컬럼에서 윈도우 NT와 VMS에 대해 자세히 적은 적이 있다. 상당히 유명한 컬럼이라 필자도 몇번씩 재미있게 읽었고 이전의 유닉스의 역사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다. 컬럼에서 Mark Russinovich는 NT와 VMS의 유사성을 심도있게 다루었다.

(http://www.winnetmag.com/Authors/Index.cfm?Action=Author&StartRow=41&MaxRowsPerPage=20&Total=54&AuthorID=76) 보다 초기의 자료인 1993년의 <Inside Windows NT>의 서문에서는 NT의 주 개발자인 데이비드 커틀러가 VMS와의 유사성에 대해 적은 바 있다. 


CP/M이 QDOS를 통해 표절에 가까운 클론의 형태로 MS-DOS로 구현되었다면 NT는 VMS의 개발팀을 통째로 스카웃 하여 몇 년 동안에 윈도우의 API를 입혀 놓은 형태이다. 기술의 유전자는 이러한 방법으로 DEC에서 MS로 넘어가게 되었다.


VMS를 개발한 사람은 David Cutler로 1942년 생이며 현재 MS의 Distnuished Engineer로 근무하고 있다. 비교적 일찍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며 묘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잇다고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커틀러의 에러 메시지는 언제나 두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단어를 갖고 장난치는 일에도 대가였다. 이를테면 WNT(Windows NT)라는 이름은 커틀러가 지었는데 VMS에서 한글자씩 뒤로 옮긴 이름이라던가 HAL(Hardware Abstraction Layer)는 IBM에서 한글자씩 앞당겨서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처음에는 듀퐁에서 컴퓨터 관리를 담당하다가 운영체제에 관심이 생겨서 결국은 디지털(DEC: Digital Equipment Corporation)에 근무하게 되었다. 커틀러는 첫 작품으로 RSX-11이라는 운영체제를 만들었다. RSX-11은 주로 공장자동화와  산업에 쓰인 운영체제로 DEC의 PDP-11을 위한 운영체제였다. 회사의 기술담당 부사장이던 고든 벨은 1975년이 되자  32비트 프로세서가 있어야 다른 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32비트 프로세서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 프로세서는 나중에 VAX로 발전했다. 회사내에서 RSX-11로 유명해진 커틀러는 이 32비트 프로세서를 개발하는 초기 구성원으로 합류했다. 얼마 후 Dick Hustvedt 와 Peter Lipman과 함께 새로운 VAX를 위한 운영체제인 VMS를  개발하게 되었다. DEC에서 결정한 VAX와 VMS의 설계는 약간 특이한 것으로 구형 기종과의 호환성을 최대한 살리라는 주문이 내려졌다. VAX는 과거의 PDP-11과의 하위 호환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VAX는 데스크탑 워크스테이션 뿐만 아니라 엔터프라이즈 서버에서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과 VMS는 RSX-11을 포함한 과거의 운영체제와의 호환성과 다양한 하급기종에서도 싫ㅇ되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DEC는 VAX와 VMS에 큰 도박을 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DEC에서는 VAX와 VMS의 개발을  “betting the business“라고 표현했는데 나중에 MS 역시 NT 5.0의 개발시점에  ”betting the business”라고 표현했다.

그림 2) VAX시리즈의 하나였던 MicroVax

DEC는  1977년 VAX와 VMS 1.0을 발표하고 1978년 출시했다. 커틀러는 그 다음의 VMS의 개발에도 프로젝트 리더와 핵심 아키텍트로 계속 참여했다. 1981년이 되자 커틀러는 DEC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DEC는 간판 스타를 잃지 않기 위해 더 200명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커틀러에게 지원했다. 커틀러는 연구소를 시애틀로 옮겼다. 이 그룹의 목표는 디지털이 1990년대를 이끌 CPU 구조와 운영체제를 만드는것이었다. DEC에서는 하드웨어 프로젝트를 PRISM으로 운영체제는 MICA라고 불렀다.


1988년이 되자 DEC는 커틀러의 프로젝트를 취소하고 팀원들을 해고했다. 커틀러는 때마침 MS로부터 좋은 제안을 받았기 때문에 DEC를 그만두고 팀원들과 함께 MS로 이적했다. 커틀러의 제안은 20명의 개발자들과 함께 MS로 이적하겠다는 것이었고 이중에는 하드웨어 개발자도 끼어있었다. MS로서는 커틀러를 영입하는 것이 대단한 일이었으며 이만한 개발자는 흔치 않았다. 빌 게이츠는 Unix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운영체제의 개발이 회사의 미래에 중요한 사건임을 느꼈다고 했다.


처음에 VMS의 팀이 MS에 오기는 했으나 이때의 운영체제의 이름은 OS/2 NT였다. MS는 아직 윈도우를 개발하지 못한 상태로 IBM과 OS/2를 개발하고 있던 상태로 새로운 운영체제가 OS/2의 뒤를 잇기를 희망했으며 API는 OS/2의 일차적 API를 사용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90년 MS가 윈도우 3.0의 개발에 성공하게 되자 MS의 생각이 바뀌었고 IBM과의 관계도 바뀌었다. OS/2 NT는 6주만에 Windows NT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Win32가 NT의 공식적인 API로 바뀌게 된 것이다.  MS에서는 3.1과의 호환성과 16비트 어플리케이션을 NT에서 그대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잡고 DOS와 OS/2 그리고 POSIX도 부분적으로라도 호환성을 갖도록 만들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커틀러의 팀은 NT를 완성하기 위해 거의 광적으로 매달렸다.


NT의 핵심 개발 인물들이 VMS에 관계했으며 커틀러와 같이 일한적이 있기 때문에 NT가 VMS와 막연하게 비슷할  것이라는 예측을 넘어 NT와 VMS는 놀랄 만큼 비슷하다고 한다. Russinovich에 따르면 (Windows NT and VMS: The Rest of the Story :

http://www.winnetmag.com/Article/ArticleID/4494/4494.html)

그림 3) NT커널의 구조도

NT 역시 다른 운영체제처럼 유저모드와 커널모드로 구성되었으나 POSIX, DOS , OS/2의 층은 커널 모드가 아니라 유저모드에서 수행된다. 커널이 지원하지 않으면 이들이 export하는 API는 아무것도 수행되지 않는다. NT의 native API는 유저모드의 어플리케이션들이 커널과 소통하는 것을 규정하는 API 이지만 많은 부분이 문서화되어 있지 않다.  운영체제는 이들 어플리케이션 관점에서의 요구를 적절히 처리한다.


 NT의 커널이 디지털의 커널을 그대로 카피했다는 평을 받을까 염려되어 NTFS나 새로운 Win32 API 같은 여러 가지 부분을 새로 개발하여 이러한 사실을 희석하려 했으나 NT는 VMS코어의 개작이라는 의혹이 계속 뒤따랐다. 내부적으로 NT와 VMS의 커널이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에 DEC의 엔지니어들은 몇 주도 되지 않아 이들의 유사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VMS 5.0과 초기 NT는 너무나 비슷했다.


우선 프로세스 구조가 같았다. 프로세스의 우선 순위가 둘다 32레벨이며 상위 16레벨은 시스템에서 고정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처리 방식도 같았다. VMS와 NT 3.1과의 프로세스 구조에서의 큰 차이라면 NT가 쓰레드를 지원하는 것이었으며 스케줄러가 프로세스가 아닌 쓰레드에 실행시간을 할당하는 것이었는데 디지털도 얼마후인 1995년에는 VMS 7.0에서 같은 방식으로 커널 쓰레드를 처리하기 시작했고 NT 4.0에서는 유저 쓰레드를 구현했는데 이는 VMS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물론 프로세스 매니저도 비슷했으며 메모리 관리자도 구조가 유사했다.  I/O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비슷해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오브젝트 매니저마저도 비슷했다.  앞에 소개한 컬럼에 따르면 이들의 유사성은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NT가 VMS와 심각할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을 DEC의 엔지니어들이 알아차리고 상급자에게 보고했을 때 DEC에서는 MS를 제소하지 않았다. 대신 1995년이 되자 DEC는 Open VMS라는 프로그램을 들고 나왔고 이 제품은 NT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뿐만 아니라 DEC는 알파칩에 대한 NT 지원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MS는 DEC에 1억불 가량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후로도 몇 년동안 VMS는 NT를 NT는 VMS의 개념을 차용했다. 얼마 후 DEC는 컴팩에 흡수되었고 그 후로 알파칩과 VMS는 그전처럼 메인스트림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DEC는 MS보다 훨씬 큰 회사였다.


정작 “Betting the Future"에 성공한 팀은 MS가 되었다.  DEC에서 VAX와 VMS를 기획했던 전설적인 엔지니어 고든 벨과 데이비드 커틀러는  현재 MS 소속의 연구원이다. 운영체제 교과서에서는 항상 다루던 VMS가 어느 날인가 부터 사라지고 대신 NT가 등장했다. 나중에 데이비드 커틀러는 한 사람이 성공적인 운영체제를 개발하는 것도 큰 행운인데 자신은 여러번 성공적인 운영체제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던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유전자


합당한 제품에 대한 끊임없는 투자와 개발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88년도의 MS의 32비트로의 이행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도저히 개발할 수 없는 경우에 다른 유전자를 가져오는 것이 정말 중요한 개발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만약 VMS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NT가 없었으면 MS로서는 운영체제를 처음부터 개발하며 유닉스와 대결을 벌여야 했을 것이고 어쩌면 오늘날의 서버 시장 지배는 없을 것이다. 정말로 MS는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 빌 게이츠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IT 업계에서 6개월은 영겁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 우연하게도 NT가 발매될 시점에 유닉스 업계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둘러싸고 소모적인 경쟁을 벌일 때였고 가격도 인하하지 않은 상태였다. NT는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유닉스들에 비해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아직 리눅스나 FreeBSD 같은 공개형 유닉스 운영체제는 별로 홍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NT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이 엄청나게 들기 때문에 업체들은 개발에 전념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기술 유전자를 찾아 새로운 피를 수혈해야 한다. 기술을 개발하는 도중에 다른 업체들이 비슷한 기술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기술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IT기업들의 행태는 역사적으로 그들의 성장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다른 기술 유전자를 수혈 받았는가를 완전히 망각한 처사라고 볼 수도 있다. 


뉴스위크지(2004.2.18)에는 스티븐 레비가 빌 게이츠를 인터뷰하는 내용이 나온다. 인터뷰에서 빌 게이츠는 컴퓨터 기술이 기로에 처해있다고 보고 있지만 잠재적인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확신했다. 소프트웨어의 점진적 진보와 비약적 진보에 대해 설명하면서 비약적인 진보라는 것은 “이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느끼는 것들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비약적인 진보는 업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그것이 없으면 돈을 벌 수 없다. 소비자가 일단 소프트웨어를 구입하면 새로운 제품이 나오지 않는 이상 다시 구입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지금 진보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진보가 느린 것이 아니라 90년대의 IT 거품이 너무나 컸으며 그것은 바로 인터넷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넷이 팽창하던 90년대에 MS는 다른 경쟁업체들을 압도하는 대 도약을 했고 그 주력이 바로 윈도우와 NT였다.  그리고 NT는 다른 회사의 그것도 주력 운영체제였던 VMS의 재구현(re-implementation)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긴 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DEC가  조용히 있었기 때문에 별로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윈도우가  look and feel을 놓고 애플과 사투를 벌인 것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인터뷰에서 빌 게이츠는 매년 69억 달러를 쓰면서 앞으로의 새로운 목표인 기계와 기계 그리고 사람과 기계의 ‘경계(boundary)’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전하고 있다고 했다. 만약 그 성과로 비약적 진보가 일어나지 않으면 주주들에게 사과해야 하며 반대로 이런 기술들이 개발된다면 사용자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 주어지 것이라고 했다. 69억 달러의 개발비는 기술적 도약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MS의 노력의 징표라는 것이다.


개발비를 떠나서 MS는 어떤 새로운 유전자를 내어놓을 것인가? 과연 MS 고유의 중요한 무언가가 나와서 세상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을 것인가 ? 만약 그렇다면 사용자뿐 아니라 주주들도 정말 좋아하게 될 것이나 노력의 징표를 다른 회사들같이 쉽게 내어 주지는 않을 것이고 경쟁자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질 것이다.


필자는 새로운 기술 유전자는 어디에서 나올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세상을 정글에 비유한다면 너무나 경쟁이 치열하고 혹독하며 감시가 심한 곳이라 작은 싹들은 초장에 잘려져 나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어디에서인가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싹들이 나오고 이 싹들이 크면서 새로운 문화와 기술의 유전자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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