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09.10.31 샤넬이 디오르에게 분노했던 까닭은?
  2. 2009.10.24 Pioneer Profiles - Christopher Strachey
  3. 2009.10.24 혁명을 뒤에 붙인 시기들 (과거컬럼)
  4. 2009.09.12 자금의 흐름과 고용사정 (퍼온글)
2009.10.31 18:21

샤넬이 디오르에게 분노했던 까닭은?

우석훈은 시대가 원하는 말보다 조금 먼저 의견을 내놓는다.
생각해볼 화두를 먼저 제시하니 중요한 논객임은 분명하고 시각도 남다른데가 있다. 
결론이 애매하거나 해결법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 ,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사실은 제일 중요하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문제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이기도 하다. 

요즘 새로 책을 낸 모양이다. 프레시안의 글을 담아본다. 
적어도 나같이 복잡하기만 한 사람은 따라가기 힘든 사람이다. 


88만 원 세대'라는 용어가 등장한지 2년이 지났다. 이전 세대와 달리 대학교 졸업 이후에도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실업상태에 노출되어 있는 '88만 원 세대'는 20대를 상징하는 음울한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20대가 처해있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드러냈을 뿐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저자의 지적처럼 "이렇게 힘드니 열심히 살아보자"식의 처세술로 오독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용어를 처음 제시했던 우석훈 박사(경제학)가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펴냄)라는 후속작을 선보였다. 우 박사는 책 제목 뒤에 "시작되었다" 말이 생략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혁명의 모습이 무엇인지,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그 내용을 결정짓는 주체는 (우 박사가 아닌) 20대 당사자라는 것에는 이론이 없다.

우 박사와 100여 명의 20대들은 23일 연세대에서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출간 기념토론회를 열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우 박사는 "20대가 벌이는 긍정적인 모습도, 잘못에도 우석훈의 눈치를 보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그가 '혁명'을 말하는 이유는 20대가 구시대의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 올 시대를 선도하는 첫 세대가 되기 원해서다. 이제 공은 20대 자신에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토론회에 앞선 저자의 강연을 요약 소개한다.

아무리 많은 '~쯤'을 모아도 미완성이 완성으로 바뀔 수는 없다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저자 ⓒ프레시안

오늘은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쯤'과 '진(陳)', 그리고 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쯤'은 미완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 연세대의 공학관 지하에 있는 커피숍에서 겪었던 일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거기 커피 값이 캠퍼스 안의 다른 가게보다 약간 비쌉니다. 그래서 여길 찾는 사람들은 보통 좀 멋있게 보이려고 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 커플이 앉아 있었는데 남자가 자기에게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여자친구에게 설명하고 있더군요. 자기가 학교는 '연대쯤' 되고, 공부도 '나쯤' 하고, 키도 '나쯤' 되고 - 사실 키는 저만 하더군요 - 패션도 '이쯤' 되면 소개팅이 많이 들어온다는 겁니다. 지금 넌 '뭐쯤' 되는 애를 만나고 있다는 얘기죠,

제가 볼 땐 솔직히 별볼일없는 친구였습니다. 그가 들고 있는 지갑을 슬쩍 봤는데 80만 원 정도 하더군요. 그 지갑이 바로 '~쯤'을 노리는 마케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패션경영학이나 럭셔리 마케팅과 같은 분야에서 이런 남자를 엔트리(entry)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80만 원짜리 지갑을 사는 엔트리를 5년 후에 1억 원 어치를 사게 만드는 게 이들의 목표입니다. 결혼 예물로요.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를 보면 출연하는 배우들이 할리우드에서 '특A'급은 아닙니다. 이런 배우들이 '~쯤'의 범주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들이 명품 등으로 치장을 하면 특A에 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럭셔리 마케팅입니다. 상위 1% 계층은 이런 마케팅에 끌리지 않습니다. 애초에 소비 여력이 없는 하위 계층 역시 마찬가지죠.

고려대에서 강연을 해도 '고대쯤', 성균관대를 가도 '성대쯤'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20대들에겐 이런 마케팅이 통합니다. 하지만 그 '~쯤'을 다 모아도, 명품을 모아도 완성품이 되진 않습니다. 슬픈 이야기죠.

"지금의 20대는 고독한 저격수"

다음은 진, 즉 포메이션(formation)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 혼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0대는 어려서부터 혼자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거야 거야 잘할 거야, 혼자서도 잘할 거야'인 거죠.

다른 세대는 모두 진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50대들은 출신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고한 진이 있었습니다. 80년대 학생운동 당시의 '교문 돌파' 역시 대표적인 진의 사례입니다. 각각의 대학에서 교문을 뚫고 나가면 청와대로 진격할 수 있다고 믿었죠. 실제로는 걸어서 2시간도 더 넘게 걸리는 거리였는데 당시엔 그걸 잘 몰랐습니다.

지금의 20대를 진의 형식으로 풀어보면 홀로 몸을 숨긴 저격수(sniper)에 가깝습니다. 군대에서 저격수는 한 명을 맞추는데 이틀을 잠복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죠. 그렇게 기회비용이 크기에 저격수는 일반 사병보다는 장교를 노립니다. 지금의 대학생 역시 숨어서 큰 타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걸 두 개로 나누면 하나는 삼성 입사, 하나는 고시 정도가 되겠죠.

실제로는 현대전에서 저격수는 옵서버를 대동하고 뒤에서 부대 작전을 총괄하는 리더가 따로 있는 등 하나의 팀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20대는 그냥 고립된 저격수 꼴이죠. 간혹 이들에게는 옵서버 대용으로 '엄마'라는 존재가 있긴 합니다. 책을 준비하면서 관찰해보니 고시라는 것도 돈이 많이 들더군요. 학원 수업료 등을 엄마가 잘 충당해 줄수록 좋은 저격수가 되는 거죠.

다시 진의 얘기로 돌아가서 진을 이루기 위해서는 리더와 수신호를 보내는 시스템이 필요한데 현재 대학생은 둘 다 없습니다. 20대에게 누구를 영웅으로 여기냐고 물어봐도 신통치 않아요. 그들에게 강의석과 장기하를 예로 들어봤는데 둘 다 아니라더군요. 강의석은 20대를 좋아하지만 20대는 그를 확실히 싫어하고, 20대는 장기하를 좋아하지만 장기하가 20대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김연아는 국가를 대표하는 영웅이지 20대의 대변인은 아니고,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극찬했던 류현진 역시 여학생들 중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20대에서도 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물론 예전의 수직적인 구조의 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신세대의 진은 상명하복의 작동원리를 갖습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죠. 그 세대는 평생 그렇게 살아서 다른 방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적이죠. 학생운동 시절의 진 역시 상명하복까지는 아니지만 수직적인 시스템입니다. 민주집중제라고 해서 모두가 모여 결정하고 결정되면 모두가 승복하는 형태였는데 사실 모두가 모여 결정하는 경우도 몇 없었어요.

20대는 조직이 없지만 관계가 수평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수직적인 걸 싫어해요. '야, 다 모여'라고 하면 '네가 뭔데'라고 대꾸합니다. 강의를 하고 있으면 '쟤 뭐라는 거냐'라고 하는 게 들립니다. 예절·에티켓을 떠나 같이 나이 먹어가는 처지란 거죠. 1학년 여학생과 29살 먹은 복학생이 '오빠·선배' 호칭을 안 쓰고 친구합니다.

어려운 말로 자기발생적·자기구성적 복잡계로 불리는 이런 수평적인 형태에서 어떻게 진을 만들 수 있을까요? 조정과정은 있지만 서로 지시하는 건 없는 이런 상태에서 진이 출현할 수 있는 방법을 20대가 풀면 한국 사회 자체가 다음 사회단계로 진행되면서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대가 새로이 출현할 한국 사회의 선도적인 세대가 되는 것이죠.

▲ 20대가 전 세대의 수직적인 형태를 벗어나 수평적인 형태의 진을 출현시킬 수 있다면 한국 사회의 다음 단계에서 선도적인 세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오스트럼과 가브리엘 샤넬

마지막은 오스트럼 이야기입니다. 오스트럼의 이론을 간단히 설명하면 공유재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과학계에서 오랫동안 제기된 문제였죠. 사람의 성향을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로 나누면 게임이론상으로 이기주의가 득세하게 됩니다. 선한 사람은 계속 손해를 보기 때문에 결국 악한 자들만이 남아 재화를 낭비하는 '공유지의 비극'이 대표적인 예죠. 이걸 법이나 규율로 막자는 것이 홉스의 발상입니다.

오스트럼은 홉스 없이도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게임이론에서 기본적으로 이타주의를 지향하지만 상대방의 이기주의에 대해 한 번에 한해 보복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 결과적으로 공유재를 지킬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단점은 이게 작은 집단에서는 증명이 됐지만 국가 단위에서 가능한지는 아직 풀어내지 못한 것입니다.

작은 집단을 한국식으로 말하면 '마을'의 개념이겠죠. 40~50대에게 마을은 푸근한 단어이지만 생태적·문화적 정서가 다른 20대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개념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을 환대해줄 공간이 없어요. 인터넷 공간만 봐도 환대보다는 '악플'이 많고 진보적인 사이버 공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반면에 50대들은 골프장 회원 모임 게시판만 가도 끈적끈적하고 따듯한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우파들의 강점이죠. 가난하고 고립된 이들은 만들기 힘듭니다.

'~쯤'에 사로잡힌 20대가 환대받을 수 있는 '진'을 만드는 것, 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혁명은 사회학적으로 가장 많은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20대가 취할 수 있는 혁명의 길은 힘 있는 영웅이 아닌 문화생산자로서의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가 가장 편하게 느낄 수 있는 방식이죠.

가브리엘 샤넬을 예로 들어보죠. 20세기 역사는 샤넬을 제외하고는 설명이 안 된다는데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재산권이 생긴 게 20세기 초반인데요, 당시에 많은 여성들이 남자친구나 남동생 등의 후원으로 화가나 연극배우, 가수 등이 되어 재산권을 형성해 갔습니다. 에디트 삐아프가 대표적이죠.

샤넬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가게를 얻어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최초로 코르셋이 없는 속옷을 만든 이는 따로 있지만 기억하는 이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것을 상품으로 팔릴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게 만든 이가 샤넬입니다. 모자나 옷에 달린 레이스를 제거한 상품을 선보인 것도, 핸드백에 끈을 달아 여성들이 손의 자유를 얻게 한 이도 샤넬이었죠.

샤넬이 일생 동안 가장 분노했던 대상은 크리스티앙 디오르였습니다. 디오르는 H라인, A라인 등의 컨셉트를 선보인 디자이너인데 샤넬이 여성에게 필요한 옷을 만들었다면 디오르는 남성의 눈으로 괜찮아 보이는 여성의 옷을 만들었죠. 샤넬에겐 디오르는 반동으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20대들은 샤넬을 소비하지 말고 샤넬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성해방을 이끌어냈던 문화생산자의 모습 말입니다. 굳이 여성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 역시 그들만의 문화생산자 역할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20대, 거창한 운동보다는 삶에 대한 객관화가 먼저"

▲ 왼쪽부터 사회를 맡은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 노정태 전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고대녀' 김지윤 씨, 한윤형 <뉴리아트 사용후기> 저자, 우석훈 박사 ⓒ프레시안

강연이 끝난 후 토론 패널과 우석훈 박사의 대담이 이어졌다. 지난해 촛불 집회 당시 <MBC> '100분 토론'에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과 설전을 벌였던 '고대녀' 김지윤 씨(25)는 "<88만 원 세대>가 나오고 난 이후에도 20대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우 박사는 '조용한' 혁명이라고 썼지만 20대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위기를 맞고 있는 부모세대와 함께 '짱돌'을 들고 당당히 목소리를 내는 왁자지껄한 혁명"이라고 제안했다.

노정태 전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27)은 우 박사가 제시한 '혁명'의 방법론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20대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이후 논의의 방향이 '20대가 문제를 겪고 있다'가 아니라 '20대는 뭔가 문제가 있다'로 흐르고 있다"며 "지역 공동체는 뉴타운 개발 등으로 와해되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으로 떠오른 비주류 엘리트들은 현재 어떻게 할 바를 모른 채 20대에게 '깃발을 들고 뭔가 해보라'고 강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노 씨는 "진중권 교수가 중앙대에서 해임되자 '깃발'을 들었던 중앙대 학생들이 징계를 받을 때 과연 누가 그들을 지키려 나섰는가"라며 "20대 당사자 운동은 필요하지만 지역·정당운동이라는 전제조건을 만드는 것은 전 세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윤형 <뉴라이트 사용후기> 저자(27)는 "20대들은 <88만 원 세대>의 초반부만 읽고 '이렇게 힘들게 산다는 걸 알았으니 됐어'라며 책을 덮어버린 채 자신이 20대를 대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가능한 대안을 들이대도 '우린 안돼요'라고만 하는 시행착오는 20대 스스로가 풀어야할 문제"라고 말했다.

한 씨는 "20대들이 해야 할 일은 거창한 운동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객관화된 서사"라며 "한국 젊은이들의 삶이 잘 드러나 있는 웹툰이 많이 소비되고 있지만 분석과 비평은 곁들여지지 않는데 이런 부분부터 20대들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우 박사는 "사실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는 계획 밖의 책으로 사실 20대 이야기를 내가 더 쓰는 것 보다는 책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대학생들의 글처럼 20대 당사자가 나머지를 채웠으면 했다"며 "정당운동 등의 방법이 지금 당장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지방선거와 대선을 거치는 과정에서 좋든 싫든 공간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우 박사는 또 청중 한 명이 20대의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세대 착취론에만 메여 있는 것 같다는 지적에 "실제로 한국의 지배계급에 20대는 한 명도 들어가지 않는 현실에서 세대 착취의 범위 안에서 환경과 성 평등, 수도권 문제 등을 풀어나가려고 한 것"이라며 "학생운동과 지역운동 등 다원화된 형태의 그림으로 기득권을 연타할 수 있는 작은 물결들을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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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08:54

Pioneer Profiles - Christopher Strachey

세상에는 재미있는 사람이 많다.
denotational semantics를 만들었던 스트래치 같은 사람이 그 예다. 
튜링상을 받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작업을 해오면서도 의외로 알려지지 않았다. 

스트래치는 집안 대대로 머리가 좋았는데 블룸스베리 그룹의 일원이 리튼 스트래치도 있고 다른 유명한 스트래치가 있다.  블룸스베리 그룹은 이상하게도 재미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들의 문재는 탁월했다.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메이나드 케인즈일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도 바네사 벨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아더 웨일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노자의 도덕경을 영어로 번역한 "The Way and it's Power"를  썼다. 하이쿠와 동양의 많은 작품이 웨일리를 통해 번역되었다.  이들은 너무 자유분방해서 박사학위를 따지 않은 사람도 많다. 동성애와 양성애적 성향을 항상 이들을 따라 다녔다. 케인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찰스 스트래치도 그런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얼마전 작고한 피터란딘은 스트래치의 유일한 조수였다. 란딘은 컨티뉴에이션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스트래치와 란딘이 알골과 다른 컴퓨터언어에 미친 영향은 상당히 컸다.  스트래치는 1975년 작고 했다.  그 다음 스트래치 그룹의 영향력은 많이 시들해졌다. 스트래치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면 우리는 수학에 가까운 프로그래밍으로 많이 기울었을 것이다. 

C 언어의 직접적인 조상인 CPL ,BCPL ,B와 관련이 있고 마크로를 만든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l-valu와 r-value의 이론적인 확립을 하기도 했다.  Cuurrying (Haskel Curry의 이름에서 따옴)을 명명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Fixed Point 의 이론을 보면 언제나 스트래치를 만나게 되어있다. sicp 에 지겹도록 나오는 함수형언어의 개념은 처음부터 lisp에서 강조된 것은 아니다. 재 발견한 것이다.  Christopher Strachey는 ”Functions as First-class Citizen' 이라는 모토아래 Lamda 계산 개념이 프로그래 언어의 설계에 기본이라고 하였다. Scheme은 특히 이런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람다페이퍼라고 부르는 문서들에 명확히 나온다.

너무 방탕하게 놀다가 대학을 간신히 졸업했으나 나중에는 캠브리지의 컴퓨터 연구소를 지도한다. 후반부에 공동으로 연구하던 Dana Scott는 튜링상을 받았다.   현재의 수학실력으로는 즐기기엔 무리였다. MIT의 해커들도 버거워했던 주제다. 증명이 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위키백과에도 소개글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Strachey )

얼마전 서핑을 하다가 스트래치를 재평가하는 작업들을 보았다. 
아래의 글은 그 중의 하나다. 


Pioneer Profiles - Christopher Strachey

David Barron
Christopher Strachey

Author’s Note.

This is not a fully-referenced scholarly paper. Rather, it is an affectionate tribute to a former colleague and friend and is based mostly on memories of conversations, whether at High Table in Cambridge, in the Laboratory, or in the rural seclusion of the Strachey family home in Sussex.

Anyone who recognises the name ‘Strachey’ will no doubt associate it with the literary family who were at the heart of the Bloomsbury Group (think ‘Eminent Victorians’ by Lytton Strachey - Christopher’s uncle). And those few computer scientists who recognise ‘Christopher Strachey’ will probably associate the name with his work on formal semantics of programming language at Oxford, in collaboration with Dana Scott. But Christopher was far more than a theorist: he was always the programmer’s programmer, and also played a leading part in the founding of the British computer industry, as a logical designer.

Although the Stracheys were mainly a literary clan, there was a mathematical streak in the family - Christopher’s father Oliver was engaged in decryption in both world wars. Christopher followed this streak, and went up to King’s College Cambridge in 1935 to read Mathematics. After various vicissitudes, he graduated in Natural Sciences and took up a job as a research physicist with STC (Standard Telephone and Cables Ltd.). At the end of the war, he left STC and took up teaching, eventually becoming a mathematics master at Harrow School in 1949.

During his time with STC he had been involved in numerical solution of differential equations using a Differential Analyser (an analogue computer). Whilst at Harrow, he was introduced to Mike Woodger who told him about Turing’s ‘Pilot Ace’ computer at NPL. Christopher wrote a program to play draughts on the machine, but the Pilot Ace wasn’t really up to the job. Hearing about the Manchester Mark 1, he wrote to Turing, his contemporary at King’s, asked for details of the instruction sets and completed a program that not only played draughts, but also played “God Save the King” on completion.

In 1949, Lord Halsbury had persuaded the Government to set up the National Research Development Corporation (NRDC) under his leadership, the intention being to commercialise British scientific ability. Halsbury was particularly seized by the potential of the then new computers, and persuaded Strachey to join NRDC. As well as doing the programming for a simulation of the proposed St Lawrence Seaway, he took a major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Elliot 401 and Ferranti Pegasus computers, being responsible for the logical design of the Pegasus, a workhorse to replace the Ferranti Mark 1 (based on the Manchester Mark 1). In 1959, he left NRDC and set up shop as the country’s first freelance computer consultant. In this capacity he had substantial input into the design of EMI’s EMIDEC 1100 and 2400 computers.

In 1962, Strachey, whilst continuing as a consultant, was persuaded by Maurice Wilkes to join the team at Cambridge developing a cut-down version of the Manchester Atlas supercomputer (called Titan in Cambridge, but marketed by Ferranti/ICL as Atlas 2). Strachey’s brief was to develop a new programming language for the machine, working with myself and David Hartley. The language was based on Algol 60, and was initially called CPL (Cambridge Programming Language). Later, we joined forces with a team at the University of London Institute of Computer Science, and it became ‘Combined Programming Language’. For myself, I am content for it to be remembered as Christopher’s Private Language.

CPL had many innovative features: some of these were just, in Christopher’s phrase, “syntactic sugar”, but a major contribution was the clarification of the concept of L-values and R-values, which can be seen in C and all subsequent languages. (CPL begat BCPL, which begat B and then C and C++: another example of the pervasive influence of Christopher at the time). The development of CPL also provides another instance of Christopher as a programmer’s programmer. He decided that we needed a macro generator to assist in developing the CPL compiler, and - over a weekend in his Sussex home - produced the General Purpose Macrogenerator, GPM. This was an incredibly elegant string-substitution language - which could also, as he demonstrated in a tour-de-force of programming, be used to compute factorials.

As the CPL project proceeded, he became more and more interested in the formal semantics of programming languages. Delivery of the compiler fell more and more behind schedule. As a result, in 1965 he accepted an offer of a post at Oxford, as Head of the Programming Research Group (PRG), an offshoot of the Computing Laboratory. Here, in collaboration with Dana Scott, he developed his theory of denotational semantics and was eventually recognised by the award of a Personal Chair. But even whilst he was engaged in this theoretical work, the demon programmer survived. The PRG was given funds to buy a Modular One computer. Christopher decided from the start that the group would do their programming using an interpreter to simulate a stack machine. This was to be embedded in an operating system (OS/6) based on high level concepts. In the months between the placing of the order for the Modular One and its delivery, Christopher and his assistant Joe Stoy wrote the system in a CPL-like language, and developed a cross-compiler on the University’s KDF9 mainframe to compile the code into Modular One assembler. The machine eventually arrived, and the engineers installed it. The cross-compiled code was loaded, and pretty well worked out of the box. A night of tweaking followed, and in the morning the PRG personnel appeared to find a working system. Strachey locked away the Modular One manuals: “I’m the only one who knows the instruction code” he joked. His premature death in 1975 deprived the country of one of its greatest and most prolific computer scientists. (He always denied the existence of Computer Science, but he will be remembered as one of the subject’s founding fathers.)

There’s so much more that I could say about this remarkable man: perhaps the Editor will allow me another thousand words in a forthcoming issue. Let me finish with a quotation that says it all:

“It has long been my personal view that the separation of practical and theoretical work is artificial and injurious. Much of the practical work done in computing, both in software and in hardware design, is unsound and clumsy because the people who do it have not any clear understanding of the fundamental design principles of their work. Most of the abstract mathematical and theoretical work is sterile because it has no point of contact with real compu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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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4 08:21

혁명을 뒤에 붙인 시기들 (과거컬럼)

망각대왕인 나는 예전에 쓴글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언제 이런 글을 쓴적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보르헤스 말처럼 안윤호라는 사람이 쓴 글이 맞기는 한데 그건 정말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 
관심이 너무나 많아서 도대체 집중이 안된다. 
난독증처럼 관심의 레벨을 여기저기서 흔들린다. (그리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은 너무 쓴 글들이 많다는 것이다. 주제도 너무 다양한 것 같다. )

다시 한번 손보고 싶은 글들도 있다. 
가장 쓸만한 글쓰기는 여러번 되고쳐 써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른데다 바쁘다. 최악이다. 당분간은 구경하며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니면 처음부터 잘 써보던가.

안윤호 (아마추어 커널 해커)

2005/02/28

매스컴에서 커다란 변화에 붙이는 수식어 중에는 유독 ‘혁명’이라는 이름이 많다. IT 혁명이라든지 나노 혁명 같은 새로운 변화들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온다. 

필자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는 가끔 무서운 생각이 들곤 하는데 역사적으로 커다란 변화에서 사람들이 조용하게 지낸 시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람에 풀들이 눕듯이 커다란 변화에는 사람들을 극도로 피곤하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없다. 정치적인 혁명은 보통 지역적으로 국한된다. 

하지만 문화의 본질적인 혁명은 그보다 파장이 더 크고 광범위하다. 같은 이유로 30년간 진행된 IT 혁명이 어떤 일들을 만들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변화가 한 분야에만 그치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언젠가 극적으로 변한다. 보통은 이런 시기를 사람들은 난국(hard time)이나 난세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와중에서도 국지적으로 극심한 변화에 휘말린 사람들은 이런 힘든 시기를 보낸다. 

과거의 예를 보면 산업이 발전한다기보다는 변화하는 시점의 틈바구니에 휘말린 사람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압력을 견뎌내야 하든가 아니면 거의 미쳐버리는 순간이 많았다. 그 와중에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나중에는 조용히 잊혀진다. 가해자의 입장이건 피해자의 입장이건 사람들은 어두운 기억을 빨리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뻔하게 일어났던 일들이 교과서에는 두리뭉실한 설명 몇 줄로 압축되어 버리곤 했다. 

역사의 극적 변화 
극적인 경우가 산업 혁명이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당황해 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방적기라든지 증기 기관 같은 기계들은 초기적이긴 하지만 자본과 기술의 집약체였다. 간단히 말해 설비를 위해서 상당한 자본이 들어가며, 제작을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기술 자본 집약적인 생산이 자리를 잡게 되자 노동 집약적이던 수공업자들은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그 전까지 가내 수공업으로 잘 버텨 왔던 이들은 자신의 공방을 그만두고 공장에 고용살이를 하게 됐다. 이른바 취직이라는 것으로 그전까지는 자영업자이던 수공업 생산자들의 자존심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초기의 신흥 자본가들은 이들을 착취했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조건에서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노동 시간은 보통 열여섯 시간을 넘기곤 했다. 일주일에 하루나마 쉬게 된 것도 세월이 조금 지나서였다. 

산업 혁명은 거대한 변화이자 빠른 변화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몸으로 겪어야 했다. 공장의 등장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수공업자들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산업의 생산성이 더 높아지자 방직 공업이 이윤이 높은 산업으로 변했다. 노동 비용이 낮아졌기 때문인데 그전까지 사람들이 몰려 살던 한적한 토지들이 방직 공업에 사용될 양(羊)을 기르기 위해 개간됐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났는데 영주들은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땅에 세 들어 살던 주민들을 추방했다. 이러한 추방의 동기는 오로지 이기심 때문이었는데 다른 말로 하면 경제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쉬운 말로 돈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1800년대 초반 스코틀랜드의 고원 지대인 서덜랜드에서는 주민 추방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그전까지는 계곡이 있는 마을에서 조용히 살던 주민들은 양을 치우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주민들을 추방하여 했던 지주들에 불응했다. 주민들은 가난하게 살긴 했으나 마을을 떠나기는 싫었고 결국 지주의 앞잡이들은 집에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미처 노약자를 피난시키기도 전에 집을 태운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나무가 거의 없는 이 지방에서는 집이 불타면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결국 마을을 떠나게 됐다. 지주들은 이 빈터에 양을 방목함으로써 더 부자가 됐다. 적어도 그 이전보다 세 배 정도의 큰 소득을 얻게 됐다. 오늘날 한적한 초원들을 보면서 이런 일을 떠올리는 사람은 주민들을 포함해서 별로 없다고 한다. 

가혹한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조처로 오래 끌던 문제가 몇 가지는 해소됐다. 하나는 인구가 밀집되어 가난하게 농사를 짓던 오래된 사슬이 끊어졌다. 우선 추방을 당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그전보다는 소득이 높아졌기 때문에 부유하게 살 수 있었다. 인구 과밀로 영원히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예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추방당한 주민들은 일부는 근처 도회지의 공장으로 갔으나 일부는 공장의 리듬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당시 새로운 개척지이던 캐나다나 미국으로 가는 선택을 했다. 캐나다는 당시에 미국과 함께 이른바 신세계로서 사람들의 개척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이민을 간 세대들은 몇 년만 농사를 지으면 운이 좋을 겨우 조상대에는 평생을 걸쳐서도 이룰 수 없는 영토를 쉽게 개척할 수 있었다. 캐나다의 노바스코시아(New Scottland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이름은 이러한 사람들이 정착한 지명이라고 한다. 

고전 경제학에서는 이러한 예들을 중요한 사실이라고 하는데 토지와 인구 과밀, 즉 극복하기 어려운 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러한 균형이 깨져야만 가난은 대물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에게는 해피엔드에 가까운 이 이야기는 한계 상황에 이른 산업에서도 유사하게 되풀이된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농업에서 토지와 인구의 관계와 같다. 과거에는 아무리 일을 해도 먹고 살기에도 힘든 지경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사회 변화에 의해 고리가 자의든 타의든 깨어지고 새로운 균형이 생겼다. 한계에 이른 산업 구조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탈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탈출이 그 당시의 스코틀랜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에서도 있었다. 아일랜드에서는 더 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추방이 아니라 기아가 발생했다. 이들이 기아를 피해 떠남으로써 다른 일들이 일어났다. 

아일랜드는 18세기 중반부터 갑자기 인구가 증가했다. 그 이유는 식량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인 감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인구가 과밀한 아일랜드는 소작인들이 농사를 지어 소작료를 내고 나면 살기가 빠듯했다. 갑자기 나타난 감자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감자는 일반 작물을 재배하기 어려운 아일랜드의 어디에서나 잘 자랐다. 감자는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크게 호전시켰다. 

문제는 감자가 재배되면서 아일랜드의 인구가 갑자기 증가하면서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과밀하게 모여 살던 아일랜드는 1780년부터 1840년에 걸쳐 인구가 네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당시에는 현재의 인구보다 더 많은 800만 명까지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농업 혁명인 감자에 의해 이런 인구가 지탱될 수 있었다. 

오로지 식량 문제의 해결책이 감자라고 하는 유일한 사실이 문제였다(16세기 말엽 감자가 아일랜드에 들어온 이후 감자는 ‘왕궁에서 돼지우리까지 어디서나 먹는’ 식품이 됐다. 기후 때문에 생길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을 망각한 채 아일랜드는 단품종 경작이라는 위험천만한 농업으로 옮아갔다. 19세기 초 한 농민 잡지의 기자는 감자를 ‘부자의 사치요, 빈자의 식품이며 우리 시대 인구 증가의 주 원인이자 기근에 대한 위대한 안전장치’라고 평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러한 단일하고 유일한 해결책이 사라져 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감자가 고온 다습한 기후에 의해 감자 마름병이라는 병에 걸려 갑자기 썩어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거대한 인구는 오로지 감자라는 한 가지 솔루션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어느 날 감자는 뿌리부터, 그것도 갑작스럽게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식량은 곧 바닥이 났고 사람들은 근심에 빠졌으나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병이 도졌으나 문제는 아일랜드처럼 심각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대기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은 없었다. 감자가 썩어가는 와중에도 지주들과 관료들은 기득권의 관점에서 사태에 대처했다.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의 정책적 실기가 계속됐다.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지주들은 소작인들에 무차별적으로 소작료를 받아 내려 했다. 주식을 감자에 의존하던 소작인들을 비웃고 아일랜드인의 게으름과 천성적인 모럴 해저드 문제를 사건의 원인으로 몰았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대다수의 답은 굶어죽거나 새로운 신세계로 떠나는 방법뿐이었다. 실제로는 두 가지 선택이 모두 일어났는데 떠날 수 없었던 사람들 중 많은 수가 구빈원에서 아사했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떠나게 됐다. 이상하게도 커다란 폭동이나 소요 사태도 없었다. 

영양실조에 빠진 사람들은 구빈원이나 교회 같은 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100만 명이 5~6년 만에 기아로 사망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아일랜드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그 당시의 기억이 깊은 무의식에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이 때의 상황은 『아일랜드 대기근』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피터 그레이의 『The Irish Famine』이라는 원제의 책이 시공디스커버리 총서의 일부로 번역됐다). 당시의 밀농사는 흉작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밀을 살 돈이 없었다. 

단품종 모노클로널에 의한 재앙이 끝나자 인구와 토지는 다시 평형을 찾았다. 단 하나의 솔루션인 감자에 이른바 ‘올인’을 한 것이 화근이었으나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감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일랜드 역시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비록 이주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영양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했으나 살아남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고 곧 새로운 곳에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이민자와 그 후손이 미국 사회의 주역으로 편입되는 데에는 몇 십 년도 걸리지 않았다. 지배층이 비난한 내용은 새로운 사회로 이주한 사람들의 성공으로 보아 근거가 빈약하다는 사실 역시 뒤늦게 밝혀졌다. 아일랜드도 인구의 엄청난 과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 비극 같기도 하고 해피 엔딩 같기도 한 이런 사건들이 아주 먼 과거의 일은 아니다. 우연하지만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면 언제나 예측을 할 수 없는 불연속점들이 생겼다. 과거와의 단절이 일어나고 그 전과 그 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어쩌면 후세 사람들은 IT 혁명이 일어난 요즘을 하나의 거대한 혁명기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아직 국가적으로 하나의 솔루션에 올인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대의 첨단 산업은 높은 자본 집중과 그에 따른 높은 리스크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전자와 IT 관련 첨단 산업은 일부 국가에 있어서는 높은 산업적 우위를 점하는 것도 사실이다. 리스크는 언제나 있었고 사실 첨단 산업이라는 것은 리스크에 해당하는 만큼의 이윤을 붙이기도 한다. 

시스템에 부분적으로라도 개편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큰 스트레스와 고통을 받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커다란 문제가 정말로 일어난다면 정책적인 실기를 비난하거나 과도한 집중에 대해, 또는 회사들이 새로운 개발을 등한시한 어리석음을 서로 비난할지도 모른다. 

아일랜드의 감자 사건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소작인들이 감자 이외에는 달리 답을 찾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무시하려 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근원적인 문제는 인정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전망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필자는 언제나 사람들이 어떻게든 새로운 답을 찾아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예상 외로 간단한 결론이다. 

감자에서 철도로 
거대한 시스템 실패(system failure)를 겪은 사람들이 신세계에 도착했다. 이들이 신세계에 도달했을 때 비슷한 일들이 결국 다시 일어났다. 새로운 답들을 만들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은 명백했다. 

미국으로 이민이 쏟아져 들어오긴 했지만 정작 당시는 세계적인 불황기였다. 사람들은 도착은 했으나 일거리가 없었다. 어려운 시절이 계속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철도 붐이 일기 시작했다. 

당시의 철도 붐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IT 붐에 비할 만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수십 년간 계속됐다. 이들에게 철도 붐은 일거리와 부를 제공했다. 새로운 변화의 물결에 휘말릴 기회를 주었다. 기회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부자가 됐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사람들의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철도 혁명이었다. 

갈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에는 철도 가설자와 철도 종사원을 빼고는 철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많은 이민이 철도를 계기로 부자가 됐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나 부모 때에 불행한 일을 당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거부가 된 사람 중에는 그 과정 중에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에 가까운 부상율을 보이기는 했지만 엄청난 돈이 되기 때문에 철도는 건설되어야 했다. 개중에는 너무 무리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일부는 주주들을 속이거나 고객들에게 사기를 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전한다. 아예 불법으로 주식을 발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바 이리(erie) 철도를 둘러싸고 철도계의 거물들이 판사를 매수하고 서로 총을 쏴대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들은 결국 화해를 하기는 했으나 주주의 우롱과 불법적 합병이 거의 범죄자 수준까지 갔기 때문에 지금도 이리 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사태가 정리되자 밴더빌트나 굴드는 모두 당대에 최고의 명문가가 됐다. 

이 시기에는 아일랜드계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업가들이 철도와 철강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이민자들도 전반적인 지위 상승이 일어나 19세기 말에는 주류에 편입할 수 있었다. 거품이 일던 시기에 적극적으로 자본과 세력을 형성했던 것이다.

사람들을 열광시키던 철도는 산업 혁명으로 바뀐 세상에 또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주었다. 세상이 좁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철도에 매달렸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자 철도 붐도 끝났다. 철도 거품이 사라지자 다시 한 번 커다란 불황이 시작됐다. 또 다른 솔루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불황은 1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계속됐다). 감자와는 경우가 다르지만 단일 품목이나 마찬가지이던 철도의 불황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적극적인 식민지 개척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불과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가해진 변화는 엄청난 것이었다. 

어떠한 경우이건 사람들은 거대한 변화를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체제의 모순을 꼬집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엥겔스나 마르크스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일부는 더 온화한 방법인 사회주의로 세상의 모순을 지적했다. 

19세기 중반이 자본주의의 최고 성황기였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는 것 같고 일체의 제약들이 없던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혹사당했다. 요즘으로 보면 법과 질서라는 것이 완전히 무시된 것 같은 모습들을 보였다. 현대의 법과 질서 체계란 것이 당시에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 요소들을 시정하기 위한 요소를 이미 많이 반영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로 인해 사람들의 이동은 계속됐다. 산업 혁명기의 모순덩어리들의 폭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1차 대전이 끝나고 최대의 불황인 대공황이 찾아왔다. 다시 대공황은 사람들을 한계 상황까지 몰고 갔다가 2차 대전으로 일단락됐다. 그 후로 현재까지 기계의 시대가 있은 후 컴퓨터의 시대가 찾아왔다. 

자본과 지식 
전쟁이 끝나면서 사이버네틱스의 아버지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는 사이버네틱스의 역할이 산업계를 넘어 기술 실업 시대를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폰 노이만과 위너는 초기의 자동 제어 기계 설계에 관여했다. 결국 위너는 단순히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일이라면 사람은 기계와 경쟁해야 하며 이것은 바보짓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의 책 『사이버네틱스와 사회(the cybernetics and society)』에서는 이러한 점을 우려했다. 앞으로 기술 발달로 인해 기술 실업 시대가 올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기술 실업의 위험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위너에게는 정말 절실한 걱정이었다. 

『사이버네틱스와 사회』의 부제는 「사람의 활용」이라는 주제로 되어 있다. 아직까지 어떠한 사회도 이러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러한 걱정은 일부 SF 소설에서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긴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우려들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읽힌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같은 책에서는 컴퓨터를 ‘플러그가 끼워진 종족, 실리콘 컬러의 노동자들이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써서 묘사했다. 만약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는다면 높아진 생산성으로 만든 제품도 사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산업 자체가 모순에 빠져 새로운 종류의 불황을 만들 수밖에 없다는 지적을 했다. 

IT 혁명의 생산성 향상의 그림자 뒤에는 임금 절감과 일자리 축소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는 것이다. 뛰어난 CEO가 영입되어 리엔지니어링이나 구조 조정을 통해 하나의 기업체를 살리긴 하겠지만 그것은 시스템적인 규모가 아닌 것이다. 무엇인가 획기적인 방법이 없이는 실업은 증가하기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저자의 걱정이었다. 

이러한 걱정이나 심사숙고도 사회의 거대한 변화에는 맥을 못 추기 십상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만든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여러 방안이 아일랜드의 ‘감자’처럼 신성시되어 왔다는 사실이 문제다. 이런 일을 우려하는 현자들의 아이디어와 목소리는 계속 무시됐다.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경제 성장은 일어나지만 고용은 증가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리프킨은 사회가 점차 자본 중심적이 되어가면서 사람의 노동력을 대처해 간다고 했지만 문제는 단순하지가 않았다. 이른바 고도로 지식 집약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더 복잡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리프킨이 말한 일자리 수가 줄어든다는 통계는 주로 일반적인 직장에 한하는 것이다. 

드러커는 인구 통계학적 근거를 들어 이른바 지식 노동자 계급을 정의했다. 『Next Society』에서 드러커는 특화된 전문 지식을 가진 집단이 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는 형태이긴 하지만 경제는 실물보다는 지식에 의존하게 되며 연령층도 더 다양해질 것으로 예측한다. 

드러커는 과거 제조업과 농업의 예를 들어 이러한 형태가 변할 것임을 예측했다. 희소한 자원이 자본에서 지식으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IT 회사들은 설비가 많다거나 공장이 큰 것이 아니라 개발자들의 지식에 의해, 아니면 지적 자산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실물 자산은 이런 회사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회사는 좋은 인적 자원을 유지해야 한다. 반대로 전문 인력은 자신이 속할 조직체가 필요하다. 조직에 있어 희소한 자원은 점차 자신의 시간을 들여 업무 능력을 개발해 온 지식 계급으로 바뀐다. 자신을 종업원(worker)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의 전문가(professional)로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직종이 점차 다수가 되기 때문에 과거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며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 즉 전문적인 지식이 가장 중요한 생산 요소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IT 종사자들은 어쩌면 이러한 변화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다. 현실은 아직 이러한 방향으로 바뀌는 중인지도 모르지만 기존의 자본 중심적 생각을 갖고 있는 회사의 중역이나 관리자도 많은 것이다. 

지식 사회의 한 단면은 이렇다. 회사의 중요한 개발자나 연구자가 이직을 하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 이 사람을 스카웃한 회사는 새로운 성장 엔진을 갖게 되는데 그 성장은 엔지니어나 연구자의 지식과 경험에 의존한다. 반면에 원래의 회사는 성장 동력을 잃게 되는데 이 연구자의 지식이 핵심 기술에 속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지식이 중요하긴 했으나 설비와 자본이 더 중요했다. 

특정한 설비 산업 분야가 아닌 업계에서는 이동이 어렵지만 않다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실제로 이런 일이 과거에도 많이 일어났다. 이를테면 브라우저 전쟁에서 시나리오의 개척자인 마크 앤드리슨은 과거에 자신이 개발했던 브라우저 코드를 사용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작성했다. 윈도우 NT 역시 DEC의 팀들이 VMS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코드를 몇 년 동안 새로 작성했다. 

필자가 보아온 바로는 컴퓨터 회사에서 개발자가 떠나고 난 책상에는 PC 한 대나 반납된 노트북만이 덜렁 남을 뿐이었다. 지식은 그의 머리 속에 든 채로 사라지는 것이다. 새로 이직한 개발자가 활동할 자금과 조직만 있으면 새로운 개념으로 만들어진 코드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다. 

원래의 조직에서 개발자가 무엇인가를 배우고 조직의 설비를 이용하여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 일이 조직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새로운 것을 공부하는 것은 본인의 노력과 시간을 과외로 투자한 것이기도 하며 그 사람의 정신의 일부다. 혹자는 이러한 이직 경향을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겠지만 자신의 발전을 위해, 또는 마음에 드는 비슷한 종류의 프로젝트나 사업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면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불행이 될 것이다. 

아직 명백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기술 유출 방지법(과거의 첨단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 같은 법안들이 발의되는 모습을 보면 회사들이 기술이라는 지식을 점차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이 내용은www.scieng.net에 자세하게 나온다). 

여기서 자본과 지식의 충돌이 일어난다. 이른바 지식 사업에서는 지식의 비중이 커지는 것이다. 물론 특정한 지식을 지키려는 회사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불법적이고 비양심적인 이동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막아야 한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공청회나 토론을 거쳐야 하는데 이러한 노력 없이 독소 조항이 많다고 생각되는 법을 급행으로 통과시키려는 시도도 있는 것 같다. 

scieng.net에서는 이러한 법률 통과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과연 이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서 하나의 커다란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말한 산업 혁명의 시기와 같이 노동자가 아무런 힘이 없던 시절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지식이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는 시기가 오고 있다면 산업에 투자한 자본가의 관점과 근로자의 의견이 너무 달라지면 소모적인 충돌은 더욱 심해질 수 있다(과거의 예에서 보면 정책 담당자들과 지주들이 판단을 그르친 예는 많았다). 드러커는 그의 책 『Next Society』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사회의 의식 구조(social mind-set)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철도가 등장한 뒤 산업 경제의 주도권이 장사꾼에서 기술자나 엔지니어로 근본적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정보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지식 혁명이다. … 핵심은 전자 공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지 과학이다. 즉 지금 막 등장하려는 경제 및 기술에 있어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과제는 십중팔구 지식 전문가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게 평가되는지, 그리고 그들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 근로자를 전통적 피고용자로 머무르게 하고 또한 그들을 계속 그렇게 취급하면 과거 영국이 기술자를 장사꾼으로 대법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십중팔구 비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정쩡하게 양다리를 걸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본이 주요 생산 요소이면서도 또 자본 공급자가 우두머리가 되는 전통적인 의식 구조를 유지하려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 근로자가 기꺼이 피고용자 신분으로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 보너스와 스톡옵션을 제공하고 있다. … 그리고 앞으로 단기적 목표인 주주 중심 가치를 일차적 목적으로, 그리고 존립 근거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방식이 될 것이다. 지식에 기초한 사업들의 성과는 지식 근로자가 매력을 느끼게 하고 그들을 머무르도록 하고 동기를 부여하면서 경영하는 조직에 달려있다. 

현실을 보면 아직 이런 세상은 한참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 자본과 지식의 싸움에서 지식이 우위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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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2 16:13

자금의 흐름과 고용사정 (퍼온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컬럼니스트의 한명인 하상주님의 글이다.
분명 요즘의 경제 시스템은 무엇인가가 그 뒤에 있다.

자금의 흐름과 고용 사정
2009.9.10
하상주
 
 
아래 몇 가지 중요한 그래프를 살펴보자.
 
먼저 정부의 총 부채가 얼마나 늘어나고 있는지 보자.
 
 
최근 일년 동안 연방정부의 총부채가 약 2조달러 정도 늘어났다.
 
 
 
이제 이를 민간 상업은행의 총신용과 비교해보자. 그 사이에 민간신용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약 4000억달러 정도가 줄어들었다. 이런식으로 민간상업은행의 신용이 줄어든 경우는 미국의 역사상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상업은행 신용이 줄어든 것과 정부 부채가 늘어난 것을 비교해 보면 정부 부채의 늘어난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상업은행의 신용이 줄어든 중에서 소비자 신용이 줄어든 금액은 1500억달러 정도 된다. 소비자 신용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소비자 신용이 줄어드는데 민간의 소비가 늘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민간 소비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민간 소비가 늘어나려면 고용이 늘어나야 한다. 그런데 여기 미국 전체 비농업고용자 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임시직의 고용 변동이 심한데, 이번 불황에서 약 100만명이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아직 회복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경기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하나 고용지표로는 여전히 그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더블 딥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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