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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8 15:47

<정보&라이프> 컴퓨터와 나 사이에 지난 50년간 무슨 일이?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스티븐 레비는 롤링스톤지를 거쳐서 뉴스위크의 기자로

있습니다. 컴퓨터가 나온지 50년이 되는 시대를 회고한 글을 올겨봅니다.
이 기사는 2007년 9월 26일자 뉴스위크 한글판에 나온 글로 예전의 책 <해커 >의
저자인 레비의 시각입니다.

기술을 통한 인간 정신의 확장을 꿈꾼 베이비붐 세대 덕분에 디지털 혁명이 일어났다

한때는 컴퓨터 하나가 사무실 하나 전체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제 호주머니 속에 들어간다. 베이비붐 세대는 기술에서 인간 정신의 확장을 이끌어냈다. 디지털 혁명을 전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어도 그 과정을 구체화한 공로는 매우 크다.…

지난여름 젊은 구글 직원 몇 명을 만났다. 어쩌다 보니 예전에는 문서를 어떻게 작성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바로 우리 베이비붐 세대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1951년생)는 20대인 젊은 친구들에게 타자기라는 기계로 글을 쓰던 시절을 얘기해줬다.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써야 했고, 혹시 나중에 계속 타자기로 원고를 이어 치려면 연필이나 펜으로 표시를 해둬야 했으며, 두어 문장이나 문단 전체를 고치고 싶으면 새 종이에 타자를 친 다음 가위로 오려서 원래 종이에 찍혀 있는 성에 안 차던 문장 위에 풀로 붙였다는 그런 얘기였다. “와!” 1980년대 출생인 한 구글 직원이 탄성을 질렀다. “’잘라내기-붙여넣기’가 거기서 나왔군요!”

베이비붐 세대가 성장했던 예전 세상과 디지털로 평정된 요즘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단적으로 포착한 순간이었다. 사실 전후 세대인 베이비부머들도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가 TV, 고속도로, 에어컨 없이 살았던 시절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때면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굉장히 지루해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 자신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기술적 간극을 메우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설립자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도 자동차, 라디오, TV 같은 커다란 기술 변화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이전 세대가 정지된 듯한 환경에서 살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최근 30년 사이의 변화가 그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물론 지금 세상이라고 자동차가 날아다니지 않고 로봇과 철학을 논하지도 않으며 생존에 필요한 모든 영양소를 담은 형형색색의 알약으로 식사를 대신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로봇이 바닥 청소를 대신해주고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체스 선수를 때려눕히는 기계는 존재한다.

거기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인스턴트 메시지, DVD, 아이팟, 블랙베리, 아마존, 이베이, 구글, 그리고 수퍼마켓 계산대에서 적외선을 이용해 껌 값을 치르는 신용카드도 있다. 이 시대의 화두는 ‘디지털’이다.

현실 세계에서 가능했던 수많은 일이 가상 공간에서도 가능해졌다. ‘잘라내기-붙여넣기’와 마찬가지로, 베이비붐 세대가 자라면서 했던 수많은 실제 행동이 이제는 각각 하나의 은유가 됐다.

사실 가장 잘 알려진 베이비붐 세대가 컴퓨터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처럼 일반 용도의 컴퓨터도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탄생했고, 제한이 많은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마치 덜 자란 어른처럼 어디로 튈지 몰랐다. 이제는 함께 성장해온 베이비붐 세대처럼 컴퓨터 역시 여전히 다루기 힘든 면도 있지만 여러 분야에서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됐다.

하지만 컴퓨터가 베이비붐 세대의 삶을 변화시켰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평가는 부당할지 모른다. 베이비붐 세대는 디지털 혁명의 전체적 방향까지는 아니어도 그 기술의 발전과정을 구체화했다는 공로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빌 게이츠는 현재 50대인 업계 선구자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수십 년 전에는 게이츠 같은 이들은 이전 세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를 포착해낸, 기술에 밝은 아이들이었다.

1950년대 컴퓨터는 뭐랄까, 그 시절 자체와 비슷했다. 당시 컴퓨터는 흰색 와이셔츠와 검은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돌봐주는 거대한 흑백의 기계였다.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회계, 암호 해독, 통계 같은 일들을 수행했다.

순응주의 시대의 상징에 불과하던 당시의 컴퓨터에 사적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설치에 필요한 거대한 공간도 그러려니와 값도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 사용하기가 어렵다기보다 이용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행여 다른 사람이 사용할까 우려해 사용을 제한하는 사제단 같은 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1970년대 초반 트랜지스터와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직후에도 IBM이나 디지털 이퀴프먼트 코퍼레이션 같은 회사의 경영진은 개인용 컴퓨터(PC)보다 더 터무니 없는 물건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도대체 누가 감히 컴퓨터를 개인 용도로 갖고 싶어 하느냐고? 그걸 갖고 뭘 하게?

1960년대와 70년대 초의 반문화주의자들은 컴퓨터와 그와 관련된 모두를 혐오했다. 컴퓨터는 미 국방부가 사용하는 ‘전쟁 기계’의 일부로 간주됐고 대중사회의 비인간화를 가속화하는 도구로 인식됐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 중 일부 수학에 심취한 사람들은 사용이 제한된 컴퓨터 이용 시간을 교묘한 방법으로 우회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런 사람들은 반문화주의의 반발에 개의치 않았다. 또 컴퓨터에 맞서는 정치적 반발이 통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방위산업과 반도체 산업의 본고장인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에선 컴퓨터가 대중에게 권력을 넘겨준다는 개념이 싹텄다. 이런 이상이 현실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두 가지 저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나는 테드 넬슨의 저서 ‘컴퓨터 자유(Computer Lib)’였다.

컴퓨터를 통한 계몽운동을 촉구하는 장황한 선언서다. 다른 하나는 잡지 ‘포퓰러 일렉트로닉스(Popular Electronics)’의 1975년 1월호였다. 세계 최초의 PC 앨테어 8800(Altaire: 조립식 키트로 판매됐고 자판이나 모니터가 없는 원시적인 컴퓨터)이 개발됐다는 소식이 이 잡지를 통해 처음 알려졌다.

앨테어가 대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자 정치행동주의자 프레드 무어는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 자가 제작 컴퓨터 동호회)’을 결성했다. 그들은 1975년 3월 처음 회합을 가졌다. 그 동호회를 모태로 애플 컴퓨터를 포함해 수많은 회사가 설립됐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베이비붐 세대를 PC 혁명의 선구자로 이끌었을까? 한마디로 가능성의 인식이었다. ‘겨울잠쥐가 한 말: 60년대의 반문화가 개인용 컴퓨터 산업을 형성한 과정(What the Dormouse Said: How the 60s Counterculture Shaped the Personal Computer Industry)’의 저자인 뉴욕타임스 기술 전문 기자 존 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신기술을 인간 정신의 한계를 넓히는 도구로 간주했다. 그들은 1950년대 대도시 근교의 답답한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PC도 그런 탐구 중 하나였다.”

스티브 잡스(1955년생)의 성공담이 그 대표적인 예다. 잡스는 1960년대 기술산업의 낙원인 실리콘 밸리의 교외 지역에서 성장했다. 이웃집 아저씨가 반도체 공장에서 마이크로칩을 장난감으로 가져다줬다.

잡스는 리드 칼리지에 입학했다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중퇴한 뒤 인도로 갔다. 인도에서 실리콘 밸리로 돌아오고 나서 고교 시절의 친구 스티브 워즈니액(1950년생)과 다시 만났다. 워즈니액은 반문화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받지 않은 전형적인 기술광이었다.

워즈니액은 자신이 집에서 개발 중이던 장치를 잡스에게 보여줬다. 홈브루 클럽 회원인 그가 동료들에게 자랑하려고 만든 컴퓨터였다. 그 장치를 본 잡스는 당장 그의 동업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워즈니액은 휼렛패커드에 다녔고 이미 결혼했다.

잡스는 ‘내키지 않는다고 고집하던’ 워즈니액을 구워삶아 회사를 그만두게 한 뒤 함께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다. ‘애플’은 잡스가 별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이름이었다.

당연하게도 베이비붐 세대의 가치관이 애플의 제품 설계(특히 대량생산된 최초의 PC 애플 II)와 회사 경영에 깊이 스며들었다. 잡스는 1984년 매킨토시 컴퓨터 출시를 지휘했다. 애플의 성공을 이끈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잡스는 매킨토시 컴퓨터를 내놓으면서 소비자들에게 PC를 하나의 제품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간주하라고 촉구했다. 그 주장은 베이비붐 세대를 지배하던 문화의 정곡을 찌르며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앞서 빌 게이츠(1955년생)가 있었다. 게이츠는 정치적 성향이 강하진 않았다. 고교 친구 폴 앨런(1953년생)의 도움으로 PC와 관련된 여러 사실을 파악한 그는 곧 대단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을 가졌다. 게이츠가 하버드대 2학년이던 1974년 말, 앨런은 게이츠에게 포퓰러 일렉트로닉스 잡지 1975년 1월호를 보여줬다.

“우리는 ‘야, 우리 모르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라고 입을 모았다”고 게이츠는 최근 돌이켰다. 두 사람은 곧바로 앨테어용 소프트웨어를 만들기로 했다. “1975년에 표어 하나를 만들었다. ‘모든 가정과 모든 책상에 컴퓨터 한 대씩’이라는 아주 수수한 말이었다. 당시 우리가 좀 튀었다.” 너무도 베이비붐 세대다운 발상이었다.

직접 컴퓨터 회사를 경영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 게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을까? “젊다는 사실이 큰 이점이었다”고 게이츠는 말했다.

“물리학의 경우와 흡사하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깨달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양자 역학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세대의 물리학자들이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도 구세대 학자로 밀려났다. 이런 격렬한 변화에는 그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다. 개인용 컴퓨터가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그리고 진정한 개인적인 도구로 발전하고, 소프트웨어가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대량생산이 가능한 산업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나.”

그러나 미치 케이퍼(1950년생)만큼 베이비붐 세대의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경우도 드물다. 케이퍼는 예일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면서도 교내 라디오 방송 제작에 몰두했다. 졸업 후에는 초월명상요법(Transcen- dental Meditation)의 강사가 됐다.

그러나 보스턴 하버드 스퀘어의 한 서점에서 테드 넬슨의 책 ‘컴퓨터 자유’를 본 뒤 컴퓨터, 특히 보통 사람이 힘을 갖게 해준다는 컴퓨터의 미래상에 매료됐다.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시작한 케이퍼는 IBM PC가 나올 때쯤 스프레드시트의 기능을 더욱 강화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 작품이 ‘로터스 1-2-3’이다. 케이퍼는 회사 설립 자금을 구하려고 모험 자본가 벤 로젠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그는 “내게는 수익만큼 중요한 다른 그 무엇이 있습니다”는 말로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회사라는 자신의 이상을 제시했다. 얼마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구글이 인도주의 경영철학을 담은 비공식적 표현 ‘나쁜 짓을 하지 말자(Don’t Be Evil)’를 사용하지만 내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구글은 비교적 최근에 성공한 첨단기술 회사로 우리의 관심과 상상력을 사로잡고 우리의 자유시간을 송두리째 차지한다. 그러나 그런 회사가 구글만이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 선구자들의 뒤를 잇는 여러 세대가 아마존, 이베이 같은 거대한 인터넷 기업을 세웠다.

이제 또 다른 하버드 중퇴자 마크 주커버그(1984년생)가 커뮤니티 사이트 ‘페이스북’을 만들어 실리콘 밸리의 새로운 총아로 등장했다. 그들 모두는 베이비붐 세대 선구자들의 ‘대박’ 전략을 채택했다.

이 모든 일은 기술 자체가 성숙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다.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고 그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가능해졌기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요인도 있다. 그 혁신가들이 속한 베이비붐 세대의 정신이었다.

그 두 요인이 어우러져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냈다. 베이비붐 세대의 초창기 이야기는 그들이 조상의 이야기를 듣고 희한하게 느꼈듯이 그들의 손자들에게도 신기하게만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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