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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글씨 --봉은사판전
    카테고리 없음 2021. 4. 7. 00:09

     

    마지막글씨(최종)

    이글은 작고한 이흥우 시인의 글이다.  아주 오래된 글이고 이 글의 많은 부분은 이상하게도 소설 상도에서 많이 나타난다. 

    아무튼 종이가 스캔 불가능해지기 전에 OCR의 신세를 지는 편이 나을것 같다. 인식율도 높지 않다.

    새로쓰기는 특히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글은 천천히 복원될 것이다. 

    너무 잘 쓴 글이라 묻어 두기에는 아깝고 시간이 날때마다 스캔하고 교정하는 수 밖에 없다. 

    (혹시 이 글의 텍스트 화일이 있는 분이 있다면  작업량의 반이 넘기전에 보내 주시라  밥한끼 정도는 살 수 있다. )

     

    2.5 시작하다.

    2.11 조금씩 복원이 진행되어 1/2 정도 된 것 같다. 벌써 6 일이 지났는데 예상보다는 빨리 진행되긴 해도 아주 빠른 것은 불가능하다. 

    역시 나같이 게으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편이 더 나은 듯. 

    2.15 거의 복원이 끝나간다. 나는 글씨보다는 추사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구성한 최완수 선생님과 이흥우 시인의 상상력 그리고 이분들에게 상상과 고증의 불을 당기게 한 추사라는 놀라운 사람의 존재가 더 신비롭다.

     

    만약 이글을 읽지 않았으면 휙 지나갈 뻔한 널판지에 쓴 글씨였을지도 모른더. 그러나 알게된 인연은 이 편액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 역시 신기한 일이다.

     

    2.15 대략 완료되었다. 

    이제는 시간을 내어 조금씩 교정할 예정이다. 

    큰 틀은 변하지 않는다. 

     

     

     

     

     

    마지막글씨

     

    작가의 말 

     

    봉은사 판전 편액을 처음 사진으로 본 것은 1960년 께였다. 그리고 몇해후 어느 여름날 석양 때 ,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그곳을 찾아갔었고 , 바로 그 판전앞의 풀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감회에 젖은 일이 있었다. 뚝섬에서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서 다시 논밭과 산길을  한참 걸어갔었다. 그 이후 나는 몇해만에 한번씩 서너번이나 , 그곳을 찾아 봉은사 판전으 두 현판을 한참씩 보고 오곤 했다. 그리고 판전 현판을 소재로 서너편의 짧은 글들을 썼다.

     

    1960년대말 어느날 , 광화문의 아리스 다방에서 같이 차를 마시던 김수영(金洙英) 시인이 느닷없이 추사가 최고의 예술가야 피카소보다 더 좋아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때 그에게 “봉은사에 있는 추사의 판전 글씨를 한번 가 보라“라는  말을 했었다. 판전의 글씨를 보며 ,나는 그림이나 시를 포함한 조형예술의 세계의 한 궁극적인 도달점이라는 생각을 했다. 예술정신의 가장 집약된 , 추상형태로서의 글씨(書藝)가 도달한 하나의 궁극점을 말한다. 그것은 , 어른이 완성한 궁극의 어린이서이 다시 궁극적으로 집약된 조형작품과도 같은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어린이 ,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어린이 , 혹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으로서의 어린이 ... . 명유현의 추사방현기에는 이 글씨는 추사 자신도 괜찮게 여겼다는 뜻의 말이 있다.

     

    한 5년 전 조금 한가한 시기가 있어서 1백 70장을 써 놓았다가 , 금방 바빠져 , 그 후로는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읽고 여초 (如初 金膺顯) , 그리고 최완수형등의 조언도 받아가며 조금씩 손질을 거듭한 것이 이 글(拙作)이다. 소설이므로 좀 더 소설다운 형식을 취할 방법도 없지는 않았으나 , 더 자유롭게 쓰고 싶은 충동을 따라 이런 반(半)에세이의 형식이 되고 말았다. 

     

    셔먼호 사건 때 평안관찰사로도 유명한(우의정도 지낸) 박규수(연암 박지원의 손자)는 추사의 글씨의 특징을 몇마디로 잘 정리(환재집이라는 문집에) 했었다.

     

    완당의 글씨는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법이 여러번 변했다. 젊어서는 오로지 동기창에게 뜻을 두었고 , 중년에는 옹강방을 따라 힘을 기울였으며 ... 송의 소동파 ,미불 , 당의 이옹등으로 변화하며 , 더욱 싱싱하고 굳세어졌고 드디어 구양순의 가장 깊은 곳까지 궁구했다. 만년에 가서 여러 서가 (漢이전까지)의 장점을 종합해 하나의 법을 자신이 만들었으니 신령스러운 기운이 생동하며 , 바다와 조수  , 용이 올라가고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괴하고도 특이한 이른바 추사체를 완성했다.(대강의 뜻)

     

    또 이기복이라는 이의 추사선생의 붓은 신의경지 판전의 글씨는 볼수록 새로우며 얼마나 많은 서예가들이 이 글씨를 보고 붓을 던졌을까 하는 뜻의 시와 , 거기 덧붙인 이 판전 두 글자는 완당이 병중에 쓴 것으로 이것을 쓴 3일 후에는 돌아갔다는 말이 있다.  

     

    -1-

    1856년, 조선왕조 철종(哲)7년 병진(丙辰), 서울 뚝섬을 건넌 한강 남쪽,  수도산 봉은사(廣州郡 修道山 奉恩寺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주변에 가을이 깊었다. 

     

    봄에 새싹이 터서 여름내 한껏 무성하게 우거지던 상수리나무며 떡갈나무들의, 한동안 누르고 혹은 새빨갛게 물들었던  잎들이 차차 잿빛을 띤 갈색으로 마르며 앙상해진다. 가을 빛이 깊어지며 다시 겨울이 다가오는 빛이다. 겨울 날씨가 추워진 연후(歲寒然後)에야 비로소 흘로 시들지 않는 기상을 알 수 있는 소나무의 푸르른 기운이 잿빛 겨울을 향해서 조 금씩 조금씩 잦아들어간다.

     

    푸르른 솔잎의 숨결이 서리를 이고 머금으며 서릿발처럼 조금씩 조금씩 차갑게 잦아드는 것이다. 해마다 봄이면 온산의 온갖 활엽수들의 새의 혓바닥 같은 새눈이 어김없이 트여나오기 시작한다. 갓 깨어나은 어린 산새의 주둥이처럼 노랗던 나무들의 새눈이 새싹으로 자라며 점점 더 노란 연초록빛을 띠어간다. 그중에서도 조선의 산을 사철을 두고 고루 물들이며 조선의 산다운 풍경을 만들어 가는 것은 특히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이다. 

     

    봄의 햇살이 무르익으면서 마을의 밭두렁이나 울타릿가의 개나리,  뒤란의 살구꽃. 산속 어느 양지바른 비탈을 태울 듯하던 진달래 , 간간이 섞인 화사한 산벚꽃에 이어 이윽고 철쪽꽃들도 돌배나무꽃도 지기 시작한다. 잇따라 덕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새싹이 돋아난다. 어린 산새의 주둥이처럼 노란 나무의 새눈, 새순이 새의 혓바닥 같은 새싹으로 움트며 피어나고 더욱 시시각각으로 퍼지는 햇살을 따라 점점 더 새잎으로 자란다. 

     

    그리고 사나흘간을 두고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연초록 새잎들은 가장 눈부신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산을 물들이며 수놓는다. 막 새순이 나오기 직전, 아직 검은 겨울 빛에 바야흐 로 푸른 생기가 감돌기 시작하는 소나무잎들 사이로, 그리고 아직은 더러 성기고 가느다란 마른 가지의 우둠지가 잿빛 아지랑이처럼 어려 있는 사이로. 그 눈부신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신록은 더 한층 절묘한 색채의 대비를 이룬다. 한 사나흘간을 계속되며 그런 연초록빛이 물들이는 산의 빛깔은, 절묘한 산빛의 조화(調和)이며 또한 산빛의 조화(造化)이다. 늦은 봄은 곧 초여름으로 발길을 재촉하며 온갖 풀들의 새잎이 동시에 피어난다. 연초록으로 파르른 나무잎들과 꽃다운 푸른 풀잎들의 꽃보다도 더 아름다운 시절(緣陰芳草勝花時)이 열리는 것이다. 

     

    햇살이 조금씩 더 세어진다.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잎들이 햇빛에 이끌리듯, 조금씩 더 실해지면서 연초륵이 점점 더 초록으로 짙어진다. 그리고 꽃이 핀다.  더욱  떡갈나무의 아직 연초록 누른 빛을 띤 잎사이로는 황갈색의 꽃이 이삭처럼 늘어진다. 여름이 깊어지며 잎들은 차차 더검은 진초록으로 우거진다 자란 떡갈나무의 잎사귀는  한껏 무성하며 어른의 작은 손바닥만큼이나 커진다. 흔히 그냥 참나무라고 하는 상수리나무의 잎은 그 보다 작고 가늘어 어른의 손가락 같은 밤나무 잎만이나 하다. 반대로 열매는  상수리나무에 열리는 상수리가 더 크고 실한 편이다.

     

    상수리나무에 열리는 열매는 상수리이고 , 떡갈나무에 열리는 열매는「가도토리」라고도 하는 도토리이다. 상수리하고 도토리는 , 똑같이 녹말을 만들어 묵을 쑤는 원료가 된다. 청포묵 메밀묵과 더불어 시골이고 서울이고 옛날 큰일에는 으레  빠지지 않은 잔치음식중의 한가지였다. 상수리하고 도토리는 껍질이며 육질이며 성분이 그만큼 똑같은데 그 생김새는 약간 다르다. 상수리는 거의 공처럼 동그랗고 도토리는 타원형으로 걀쪽한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상수리가 도토리보다 더 알이 굵은 것이다. 

     

    여름에 한껏 우거진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녹음 속에서 초록빛으로 자라는 상수리나 도 토리의 열매는 물론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내 계절은 서서히 가을로 다가간다. 짙은 초록으로 우거진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잎들이 신선한 누른빛을 조금씩 띠기 시작한다. 그리고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잎들은 사나흘 동안 ,다시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빛으로 조선의 산을 물들이며 수놓는다. 소나무의 검은 초록으로 정정한 푸르름, 간혹 섞인 이른 단풍나무, 산벚꽃나무의 붉은 또는 새빨간 나뭋잎들. 혹은 어느 덤불 구석의 옻나무 잎도 붉은 기운을 띠기 시작한, 그런 나무 나무 , 나무들 사이, 산에 산에 연노란 빛으로 한층 빛나는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절묘한 빛깔의 교감이 연출되는 것이다. 봄의 연초록빛이 대체로 같은 색조를 띠는 데 비하면 가을의 연노랑빛은 아주 다양하며 더 많은 미묘한 변화를 연출한다. 그해의 비와 바람, 그 시절 , 그 고장의 땅의 습기의 변화를 따라, 하늘의 햇빛들의 차이에 따라 노란 빛들. 붉은빛들은 미묘한 시차들을 가지고 다양한 변화를 한다. 시시각각으로 고유한 빛깔들을 띈 아름다움으로 서로 어울리며 조선의 가을 산을 물들이고 또한 산빛의 절묘한 조화(調和)와 조화(造化)를 연출해내는 것이다. 가을이 더 깊어지면서 어떤 떡갈나무 잎은 아주 새빨갛게 물든다. 햇빛이 여리어지며 그 커다란 잎사귀에 응축된 것처럼 유감없는 새빨간 빛을 띤다. 

     

    그 동안 마을의 그루밭에서는 수수이삭이 익고 녹두와 팥이 튀고, 콩이며 들깨 참깨가 여문다. 텃밭에서는 배추 포기가 실팍하게 속이차고 고추가 붉게 익으며, 초록빛을 머리에 인 다 자란 무가 검은 흙 위로 고개를 치밀어 올린다. 들이나 골짜기의 논에서는 벼이삭이 누렇게 익어간다. 사람이 사는 마을의 경영, 그리고 마을의 자연 , 초목과 오곡과 과실과 채소가 두루 익으며 자라는 들의 자연. 들의 경영이 그처럼 영위된다. 

     가을이 차츰 깊어간다.

    『탁. 철썩』봉은사 주변의 들에서 , 마을에서 가을 추수가 시작된다. 새벽부터 마을이나 들판의 타작마당마다 장정들이 휘감아 쥔  볏단을 들러메어 , 눕히거나 혹은 엎어놓은 절구통에 태질을 치는 소리가 들린다 .

    『탁. 철썩』

     

    그것은  사람들이 울리는 사람의 소리이고 . 또한 사람의 생활이 베푸는 마을의 소리.들의 소리이다. 가을이 더 깊어간다.

     

    『쿠웅. 쿠웅』

     

    어느덧. 수도산 곳곳에서는 간간이 산의 소리가 들린다. 떡메나 돌공이나 혹은 돌덩어리로 나무를 쳐서 울리는 나무의 소리 , 산의 소리이다. 커다란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의 줄기를 쳐 울려 토실토실하게 여문 열매를 따는 소리이다. 그것은 산의 소리이며 또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람의 소리이다.  가까이는 절의 동승들이. 더 멀리는 인근 마을의 아녀자들이 산을 찾아 상수리와 도토리들을 그렇게 따는 것이다. 따 모은 도토리와 상수리들은 햇볓에 말려서. 절구에 빻아가지고 껍질을 까불어댄 다음 물에 담가 울리어내어 가라앉혀 가지고 녹말을 만드는 것이다. 묵의 원료이다.

     

    이윽고 나무의 모든 기운이 뿌리로 돌아가며 겨울이 깊어진다. 

    따다 남은 도토리와 상수들은 가을이 늦도록까지 나무에 매달리다가 눈바람에 따라, 혹은 거센 눈발에 따라서도 저절로 떨어진다. 저절로 떨어져 저절 로 다람쥐의 먹이도 되고 토 끼의 양식도 된다. 더 부지런한 다람쥐들은 열심히 나무에 올라가서 상수리하고 도토리들을 따다가 구석구석에 갈무리한다. 그것은  산에서 절로 절로 이루어지는 경영이며 순환하면서 무한히 이루어지는 산의 자연이다.

     

    그동안 상수리 나무 잎은 자꾸 물기가 마르며 , 갈색으로 변하고 , 나날이 더 하얀 갈색으 로 메마르면서 바삭바삭 초겨울에 바람을 받아 떨어진다.

     

    눈이 오는 날이면 내리는 눈송이가 마른 잎에 닿으며 눈이 오는 눈의 소리가 난다. 그 것은 겨울의, 그리고 그냥 하늘과 땅의 소리와도 같은 유현(幽玄)한 눈의 소리이고 또 산의소리이다. 겨울이 깊어가며 상수리나무 잎들은 거의 모두 떨어진다. 다만 모진 겨울바람에도 즘처럼 지지 않는 강인한 마른 잎들도 더러는 있다.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오며 날씨가 차갑게 변하면서 새빨개졌던 떡갈나무 잎들까지도 상수리나무의 가랑잎 같은 메마른 갈색이 된다.  바람이 매서워지며 떡갈나무 잎도 하나 둘 진다. 그러나 많은 건강한 떡갈나무 잎들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이듬해 봄까지 나무에서 바티는 것이다. 끝까지 나무에 매달려 있다가 , 봄에 새잎의 박이 돋아나면서 묵은 떡갈나무 잎들은 대를 물리어 주듯 비로소 떨어진다. 낙엽이 되고 거름이 된다. 떡갈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은 그런 자연의 영위를 거듭하며 자연의 섭리를 따라 줄기와 가지가 실팍하고 단단하게 자란다.  그리고 자연의 조화에 따라 생긴 대로의 나무의  모습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수도산 , 봉은사근처 , 어느 잘 늙은 소나무의 당당한 모습도 그런 것이다. 그런 자연의 조화를 따라 그처럼 이루어지는 것이다.

     

    -2-

     

    그해 , 1856년 6월3일(음력),추사(秋史)는 일흔한 살의 생일을 보냈었다.  그러나 칠십을 넘은 몸의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남으로 제주도의 위리안치 8년. 북으로 북청의 귀양살이 1년. 극지에서 겪은 심신의 갖은 신산이. 몸속 깊은 마디마디에 배어든 것도 같았다.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서 병상(病狀)은 여전히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바로 방 앞에 있는 마당을 거닐기도 힘에 겨울 지경이었다. 고작 방안의 책상머리를 무료히 왔다 갔다 하며 서성거릴 뿐이었다. 

     

    그래도 간간이 감흥이 이는 대로 글씨를 썼다. 붓을 잡고 글씨를 쓰 기 시작하면. 감흥은 한순간 붓끝에서 새로운 기운으로 집중되며 곧 다시 전신을 감돌았다. 붓끝에서 손가락으로 손가락에서 팔뚝으로 팔뚝에서 어깨로, 동시에 좌우전신으로 몸안 깊은 곳으로부터 그 어떠한 새로운 기운처럼 감돌아 솟는 생기가 ,저절로 한 자루의 붓으로 집중되는 것이었다.

     

    그 해 초여름 어느 날은  “춘풍대아능용물 추수문장불염진(春風大雅能用物 秋水文章不染塵 :봄바람의 맑고 큰 아름다움은 넉넉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 가을물 같은 좋은 문장은 더러운 티끌에 물들지 아니한다 )이라는 행서 등 서너 짝의  칠언대련(七言對聯)을 썼다. 늦여름의 어느 날에는 다시 감흥이 이는 대로 행농(杏農) 유기환(兪麒煥)에게 줄  예서 칠언대련(隸書七言對聯)을 썼다 . 그런 대로 마음에 들 만한 글씨였다.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 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 兒女孫 :제일 좋은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제일 가는 모임은 내외와 아들 딸 손자들이라 」그것은 어딘가 전서(篆)의 취의가 있는 옛 예서(古?)의 글씨획의 군데군데에 약간의 물결 (波?)이 깃들인 글씨였다 예서는 크게 전한( 前漢) 의 예서인  서경례와 후한의 예서인 동경례로 나누어지는데, 전한의 옛 예서는 그 이전의 글자인 전서를 금방 빨리 쓴 것처럼 전서의 맛이 있으며 전서처럼 물결 같은 파세가 없었다.  BC 56년에 돌에 새겨진 「오봉2년각석(五鳳二年刻石)과 같은 전한시대의 그런 글씨가 있다. 그리고 후한시대로 오면서 동경례에는 차차 파세가 생기는데 보통 이런 글씨체를팔분( 八分)이라고도 말한다.  글씨의 변화는 대체로 전서에서 예서 로 ,  다시 초서, 해서. 행서 등으로 이어진다. 추사의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아녀손」의 예서에는 전한의 옛 예서의 뜻이 깊으면서도 , 얼마간 팔분과 같은 파세의 기미가 깃들여 있었다. 다시 추사는「해서는 행서와 초서의 뜻을 쓰 (用)고 행서는 해서의 법을 쓴다」는 옛 이론을 말하며, 해서에는 붓의 방향을 전환하고 돌리는 사전(使轉)을. 행서에는 툴을 끌어가는 견사(牽絲)를 많이 쓰는데. 견사는 모양과 자국이 없는 사전이고. 사전은 모양과 자국이 없는 견사라고 하며. 그 두 가지가 잘 융화되어야만 비로소 법에 맞는 글씨가 된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추사의 「대팽두부. 」의 대련의 예서는 , 옛 예서와 팔분의 뜻만이 아니라 행서와 초서의 요소까지가 깃들여진 글씨와도 같았다. 바로 글씨의 여러 요소를 궁극적인 한 예서로 종합해서 열넉 자 두 폭의 대련 속에 집약해 담아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 열넉자 중의 두 번째 글자인 삶을 팽(烹)자의 위쪽 부분의 형통할 형(亨)자의 형태에 가로획을 질러 누릴 향(享)자의 모양을 만들었다.  그런 글씨의 모양은 추사가 독단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 옛날에 그처럼 쓴 예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추사는 특히 예서를 서법의 근본으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예서에서 평생 마음을 두고 본받아 공부해야 하는 것이 서경과 동경의 옛 예서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일찍이 서자인 아들 상우 (商佑) 에세 , 글씨에 대한 가르침을 몸소 써주면서 예서의 중요을 손을 잡고 일러주듯이 자상하게 말했었다. 『예서는 서법의 근본이매 만약 서도 (書道)에 마음을 두려고 한다면 , 불가불 예서를 알아야 한다. 예서의 법은 반드시 반듯하고 굳세면서도 예스럽고 못생기고 어수룩한 듯한 (方勁古拙) 이 가장 좋은 것인데 , 그 못생기고 어수룩한 그것이 또 얻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란다』 그리고 중국 한나라 시대의 예서(漢隸)를 예로 들어가며 말 했다. 『한나라 예서의 오묘함은 오로지 못생기고 어수룩한듯 한 곳에 있는 것인데 , 사신비(史晨碑)가  참으로 좋으며 그밖에 예기 , 공화 , 공주(禮器.孔和. 孔宙) 등의 여러 비가  있단다』

    중국 산동성 곡부의 공자묘(孔子廓)에 있는 사신. 예기 ,공화 , 공주 등의 여러 비석 글씨는 동경의 예서 , 곧 후한시대 의 교과서적인 뛰어난 예서들이며 , 좀 더 세련된 파책이 있는 팔분체 예서의 걸작들이다. 그런데 추사는 다시 같은 후한의 글씨라도 그 이전의  더 고졸(古拙)한 예서의 특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예서는 그런 예스러움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촉지방의 여러 돌벼랑에 새겨진 글씨(蜀道諸刻)들은 매우 예스러워서 반드시 여기서부터 따라 들어가야만 한단다. 그래야만 속되어 지지 않는 것이란다. 

     

    촉도의 각석으로 유명한 개통포야도각석이라는 마애비(摩崖碑)가 있다. 중국 옛 왕조의 중심지인 관중(關中)에서 촉으로 가자면 포야도라는 험한 길을  따라 가야만 했다. 후한의 명제(明帝)는 조서를 내.려 그 험로를 다시 고쳐 닦도륵 했다. 한중( 漢中) 의 태수)  축군(?君)이 조서를 받들어  새로운 개통공사를 했는데 , 노역에 동원된 것은 2천6백 90명의 죄수들이었다. 명제의 영평(永平) 6년(AD63년) 마침내 공사가 끝나고 길이 개통되었으며. 그 완공을 기념해서 그곳 돌문(石門)암벽에 글씨를 새겨 길의 내력 (漢中太守部君開褒斜道)을 기록한 것이다. 후한의 비이지만 , 가로획의 물결(波法)이 거의 없으며 해묵은 돌처럼 고졸한 예스러움을 지닌 글씨이다.

     

    추사가 촉도의 두드러진 비석 글씨인 「개통포야도비」의 탑본을 처음 본 것은 1810년 정월 29일 , 연경 (燕京)  옹방강(翁方綱)의 서재인 석목서루(石墨書樓)에서 였다. 

     

     

    1809년, 24세의 추사는 생원시(生員試)에 입격을 하고.그해 9월 ,생부 유당 김노경( 酉堂 金魯敬)은 호조 참판에 임명된다. 10 월 28일, 김노경은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연경으로 가는데 , 추사는 아버지의 수행비서격인 자제군관( 子弟軍官)이 되어 따라가게 된다.

     

     추사는 그 동안 15세 때 박제가(朴齋家)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런데 박제가는 이듬해 1801년 2월, 사은사를 따라 네 번째 연경에 갔다가 돌아온 다음 , 9월 동남성문(東南城門)의 흉서(凶書)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 2년여에 겉친  함경도 종성( 鍾城)에 유배를 당한다. 그리고 1805 년에 세상을 떠난다. 

     

    그 박제가에게 , 그리고 백부인 노영(魯永)에게서 . 익히 이야기를 들어온 추사는 진작부터 연경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한편, 연경에서는 그동안 박제가등을 통해서 추사의 성가를 들은 바 있는 조강(曺江)이 , 사신행차에 수행원으로 오게 된 추사의 소식을 듣고 널리 그 곳 학자들에게 그의 성가를 소개했다. 

     

    추사가 연경에서 만난 특히 중요한사람이 완원(阮元)과 옹방강이었다. 그 때 마침. 완원은,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표창을 받기 위해. 임지인 항주(杭州 . 浙江學政 벼슬)에서잠시 연경에 돌아와 처가인 연성공저에 있는 자신의 서재 태화쌍비지관(泰和雙碑之館)에 머물러 있었다. 47세의 완원은 추사를 대하며. 21년 전에 만난 박제가를 생각했다. 박제가는 그 보다 14년이 손위였고 . 추사는 완원 보다 22년이 손아래였다. 추사는 거기서 먼 훗날까지 그 풍미를 잊지 않는 용단 승설차(龍團勝雪茶)의 대접을 받았다. 훗날 그 는 승설노인(勝雪老人)이라는 아호를 쓰기도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학문, 예술, 금석고증에 대한 대화가 그 칠 줄 모르고 이어졌다. 완원은 귀중한 서적과 글씨, 금석문의 탑본 등을 보여주며, 태산 , 화산(泰山. 華山)비의탑본과 「십삼경주소 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 2백45권)등 자신의 저

    서들을 선물로 준다. 그들은 곧 사제의 의를 맺었고 추사는 완당(阮堂)이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아호를 가지게 되었다.

     

    담계(覃溪) 옹방강은 그때 87세 ,연경의 학계 , 문화 예술계의  노대가로 좀처럼 사람을 만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추사의 평판과 박제가와의 인연 등에 따라 특히 만나기를 허락했으 며, 정월 29일 새벽 묘시(5~7 시)에 찾아오라는 서찰을 문인(門人) 이임송(李林松)을 통해서 전해 주었었다. 

     

    그 의 서재 석목서루에는 금석자료 8만권이 수장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 의 서루에는  ,가득찬 책이며 자료들이 구슬갈이 꽃혀있다고 했으며, 그 안에 들어가면 꼭만 가지의 꽃들이 만발한 골짜기에 들어간 것과 같아 정신을 차릴 수도 없다는 말들을 했었다. 

     

    훗날 추사는 『담계 노인의 해서는 구양순(歐陽詢)에게서 그 원숙함을얻고. 저수량에게서 그 예서의 뜻을 얻었는데 8만권의 금석의 기운(氣)이 팔뚝 아래로 쏟아져 내려서 우뚝하게 서가의 최고의 경지(書家龍象)를 이룬다』는 말을 했다.

     

    그 날. 1810년 1월29일 새벽 , 추사를 처음 만난 옹방강은 한참 필담을 나누고 나자 이 25세의 청년에게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 )」이라는 즉석 휘호를 해주었다. 그 리 고 역시 사제의 의를 맺는다. 추사는 그 석목서루에서 옹방강 비장의 수많은 금석 , 서화자료들을 보게 된다. 그 중에 「개통포야도비」도 있었고. 후한 때에 석실벽면에 부조된 그림과 글씨가 있는 「무량사당화상석(武梁祠堂畵像石)」의 합본. 구양순해서의 걸작인 화도사비. 구성궁예천명(化道寺碑. 九成宮醴泉銘)의 탑본도 있었고. 당나라 때 임해서 쓴 왕희지 등 진시대의 서첩(唐臨晉精) 도있었고 . 소동파(蘇東坡)의 글씨며 초상도 있었다. 그것은 왕성하도록 목이 마른 천재에게 주어지는 학문적이며 예술적인 갖은 영양으로 가득찬 감로 (甘露)와도 같은 것이었다. 

     

    1815년. 옹방강은 다시 편지로 섭지선(葉志詵)을 소개해 역시 편지로 서로 사귀게 되는데,  섭지선으로부터 추사는 여러 해를 두고 수많은 전적, 서화자료 , 문방구 들을 사신행차편을 통해서 받는다. 추사는 1816년 7월에 서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巡狩碑)를 발견하고 이듬해 4월에도 조인영( 趙寅永)등과 거듭 찾아가서 글자를 판독하는데 , 섭지선은 1818년부터 거의 매해 정월마다 예기비. 공주비 , 공진비 , 공포비 , 형방비며. 춘추시대의 옛 전서인 석고문 ,무량사당화상석 등을 포함한 수많은 탑본들과 전적 , 서화 , 문방구들을 보냈다. 

     

    개통포야도비의 탑본은 같은 촉지방의 돌에 새겨진 글씨인 석문제자발자(石門題字拔字). 서협송( 西狹頌)등과 함께 1823 년 정월에 받았다.

     

    추사가 아들 상우에게 써 준 글에는 예서의 고졸스러운 묘미에 대한 말이 거듭된다. 『예서는 무릇 번드레한 시정(市井)의 속된 기색을 가려내야 한단다. 또한 예서는 가슴속의 맑고 높고 예스러이 그윽하며 깨끗한 눈이 없으면 씌어질 수 없는 것이란다. 그런데 가슴속에 맑고 높고 예스러이 그윽하며 깨끗한 뜻을 지니려면 , 또 가슴속에 학문의 향기와 책들의 기운 , 곧 문자향과 서권기 (文字香 書卷氣) 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팔뚝 아래 손가락 끝에서 좋은 예서다 나타나 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를 쓰는 가장 기본이 되고 비결이 되는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했다.

     

    또한 예서를 쓰는데 뿐 아니라 ,  먹으로 난의 그림을 그리는 것도 또한 예서와 가까으므로 반드시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어야만 한다고 , 제주도 유배지에서 상우에게 준 편지에서도 말했었다. 상우는 그때 종이를 많이 보내며 아버지께 난의 그림을 소청했었다. 

     

    그런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지니려면 그만한 공부를 해야만 한다. 만권의 책을 읽고 , 만 리 길을 가고 , 모든 속된 것들 , 가슴속에 낀 먼지와 잡된 것들을  가려내어 떨어없애는 , 그만한 공부를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추사는 진진외가(조부의 외가)쪽으로 8촌격이 되는 홍선대원군 석파(石坡)의 저서인 난화(蘭話)에 붙이는 글에서 가슴속에 5천권의 책을 지닌 것처럼 된다면 팔뚝 아래로 (모든 속된 것 , 잡귀신과 같은 것들을 물리칠)  금강신(金剛神)이 따라 들어올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난초를 그리는 일은 한갓 작은 재주이기는 하지만 그마음을 오로지 모아 공부를 하면 유학(儒學)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먹으로 난초를 그리는 일도 예서를 쓰는 일도 결국은 사람이 가슴에 맑고 높고 그윽하며 깨끗한 뜻을 지니는데서 궁극의 귀결점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가장 가치있게 사는 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 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 兒女孫 :제일 좋은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제일 가는 모임은 내외와 아들 딸 손자들이라 」

     

    이 칠언대련을 쓴 다음 추사는 칠연의 예서 오른쪽 거의 머리부분에서 시작해 34자의 덧붙이는 글을 행서로 쓰기 시작했다.

     

    이는 시골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중의 즐거움인 것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만큼 큼 황금의 인(官印)을 차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고 , 앞에 사방 열자나 되는 밥상에 음식이 가득하고 , 시중드는 여인 수백을 거느린다고 하더라도 , 능히 이런 맛을 누린이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첫연 예서의 왼쪽 새앙강(薑)자위까지 온 “..기인(幾人)”의 사람인자에 바로 붙여서  행농을 위해서 쓴다. (爲 杏農書)는 지어(識語)를 내리썼다. 그리고 둘째 연의 예서의 왼쪽 아래로 내려와 , 처(妻)자와 아(兒)자 사이에서 시작해 칠십일과(七十一果)라고 썼다. 71세의 과천사는 노인이라는 정도의 뜻이었다. 추사는 완당이외에도 수많은 아호들을 그때 그때 썼는데 , 그중에 노과 , 과파 , 과산 (老課 , 果波 , 果山)등 과천에 연유한 아호들이 있었다.봉은사에서 남서쪽으로 8킬로 미터 정도인 그곳 과천에는 그의 생부 유당의 묘소가 있었으며 , 그 아래 과지초당(瓜地草堂)이 또한 추사 만년의 거처가 되었었다. 

     

    「제일 좋은 반찬은 오이와 새앙과 나물이며. 제일 가는 모임은 내외와 아들 딸 손자들이라 」- 그것은 바로 시골사는 착실한 보통 늙은이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산다는 것의 제일 가는 행복이었다.  나물먹고 물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만족하랴는 창부타령의 노래와도 같은 여느 시골 농민의 행복이었다. 그것은 또 잘 쓸지도 않은 현미와 같은 거칠은 곡식의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고 한 공자의 말씀과도 같은 떳떳한 행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골 농촌의 들의 경영 , 자연의 경영과 같은 생활의 행복이었다. 마을의 그루밭에서 익는 수수이삭의 , 노긋이 일고 열매가 튀어 알이 차고 여물며 튀는 녹두와 팥의 , 콩이며 들깨 참외의 , 텃밭 , 김장밭에서 실팍하게 속이 차는 배추의 , 붉게 익는 고추의 , 싱싱한 초록빛 잎을 이고 검은 흙위로 고개를 치밀어 올리는 단단한 조선무의 , 들이나 골짜기의 논에서 누렇게 익으며 고개를 숙이는 벼이삭의 , 사철의 베품 , 사철의 경영 , 마을의 자연 , 초목과 오곡과 과실과 채소가 두루 익고 자라는 들의 자연 , 들의 경영 , 들의 영위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 사람의 경영 , 그런 사람의 영위 , 그런 사람의 베품인 것이었다.

     

    두부와 새앙과 오이와 나물을 반찬으로 , 아내며 아들 딸 , 손자들이랑 화목하게 사는 여느 시골 늙은이의 제일가는 상락은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말되박만한 황금의 관인을 찬 벼슬아치나 , 산해진미가 그득히 차려진 커다란 밥상에 ,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린 권력이나 돈으로 누리는 , 휘황찬란한 전등불빛과도 같은 생활과는 전혀 다른 , 순전한 햇살과 같은 건강한 생활이었다. 추사는 그렇게 사는 여느 시골 늙은이의 알맞게 그을은 얼굴을 생각했다. 그처럼 단단한 정강이를 생각했다. 

     

    그것은 조선낫이나 조선쟁기날 같은 단단한 정강이였다. 혹은 잘생긴 떡갈나무나 상수리나무의 가지처럼 단단한 정강이였다. 그것은 또 봉은사 숲속의 잘생긴 늙은 소나무나 상수리나무나 떡갈나무의 , 그리고 모든 풀과 나무의 피고지는 사철과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 , 추사는 자신이 붓을 막 놓은 예서 대련의 획을 생각했다. 

     

    「대팽두부과강채 고회부처 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 兒女孫  」

     

    -3-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1786년(조선 正祖 10년 병인) 6월 3일. 유당 김노경(酉堂 金魯敬)의 장자로 태어났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에서 오른쪽으로 통의동 왼쪽으로 체부동을 끼고 통인 동 창성동 사이를 거쳐, 자하문 세검정으로 넘어가는 도로의 이름이 추사로(秋史路)이다. 언젠가 서울시가 시내의 여러 도로에 그처럼 길이름들을 붙였던 것이다.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추사로의 오른쪽 출구를 나가, 인도로 한참을 가면 길 오른쪽에 붙어 「토속촌」이라는 꽤 오래된 삼계탕 전문집이 있다. 그 토속촌 바로 못미처, 인도 위에 차도에 붙여서 「김정희 선생 나신 곳」이라는 작은 표석(標石)을 박아놓았다 . 1987년 11월께 , 서울시 관광문화국 문화재과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음각된 표석의 설명은 다시「골목 안 약 50M 지점 백송이 있는 창의궁 터는 추사(秋史) 김정희( 1786 ~1856) 선생이 태어난 집터」라고 이어진다. 백송은 바로 천연기념물 제4호 통의동 백송(白松)이다. 1990년 7월 , 폭풍으로 쓰러진 천연기넘물 제4호인 백송의 현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35번지5이다. 

     

    창의궁(彰義宮)은 영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잠저(潛邸) 로서 그곳은 원래 서울 순화방(順化坊) 북부였다. 그리고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月城尉)의 집인 「월성위궁」은 그보다 남쪽,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적선방 장동(積善坊 .壯洞)남쪽에 있었다. 그곳이 바로 추사의 서울 집이었던 것이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 金漢藎)은 영의정 김흥경(金興慶 )의 제4자(막내) 로서 , 영조의 제 2녀인 화순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를 들어 월성위가 되었다. 추사가 탄생했을 때의 월성위궁의 주인은 월성위의 아들 , 곧 추사의 조부인 이주 (월성위 큰형의 제3자로 자식 없이 죽은 월성위의 양자로 뒤를 이음)였다.  우참찬을 지낸 이주는  장자 노영(魯永) 아래로 노성, 노명(魯成,魯明), 노경의 네 아들을 두었다.  그리고 추사는 백부인 노 영에게로 출계(出系 : 入養)를 해서 월성위가의 가계를 잇게 된다. 

     

    화순옹주는 영조의 제 2녀였는데 , 제1녀의 조졸(早卒)로 실질적인 장녀였으며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영조는 어진 아내 좋은 며느리로서 , 능히 왕녀의 귀감이 될만한 화순옹주를 어여삐 여겨 월성위가에 충청도 예산 용구이(龍宮里) 일대의 땅을 별사전(別賜田)으로 특별히 내려 주었다. 그리고 충청도의 53개 고을(郡縣)에서 한간씩을 부담해 53간의 집을 용궁일에 지었다.  곧 월성위가의 향저인 것이다. 월성위는 1758년 39세로 죽었는데 ,화순옹주는 그 뒤를 따라서 14일을 굶은 끝에 순사를 해서 , 다시 열녀의 정문이 내려졌다.   그리고 월성위 부부는 그곳 용궁리의 산에 묻힌 것이다. 

     

    통의동 백송이 있는 골목 어귀의 표석대로라면 추사의 탄생지는 그의 서울 집인 월성위구이 된다.  그러나 그의 향저 (그리고 「월성위의 墓幕과 ,또 지금은 그의 묘소)가 있는 용궁리에는 추사 탄생의 연유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것은 진작부터 추사 연구에 힘을 기울인 미술사가 최완수(崔完秀)의 몇개의 저작(著作: 이 글을 쓰는데 많은 참고가 됨)에서 이미 밝혀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추사의 어머니는 기계 유씨(杞溪兪氏)인데. 그 어머니가 잉태를 한지 24개월이 지나서 추사는 태어났다. 그 런 일을 더 상식적으 로 생각하면. 유씨가 혹은 상상임신을 한 지 14개월이 지나서 정말로 잉태를 한 것이라는 접근방식으로 헤아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더 중요한 뜻은 우선 어머니 유씨가 그런 사실을 오로지 믿었으며 당시를 산 여러 사랑들이 또한 누구도 그 일을 믿으며 ,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다는 데에 있다. 의심을 하지 않고 믿으며 말함으로써, 그 것은 각각 그들에게서 당연한 현실이 된다. 다만 추사는 그런 자신의 특별한 출생의 내력에 각별한 의미를 두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 가 태어나기 전, 한때 용궁리 집 뒤의 우물물이 마르 고. 뒷산 팔봉산(八峰山)의 나무들이 모두 시들었다가 , 아기의 첫울음소리와 함께 다시 물이 솟아오르며 , 나무들이 살아났다고 도 한다. 음력 유월이면 한여름이고 , 가물고 땡볕이 나면 나무나 우물에 한때 희한하게 그 런 현상이 생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사람들은 그날 , 그 마을의 신생아가 산과 물의 정기를 빼앗듯 한껏 더 타고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고 , 그렇게 말했었다.

     

    특이한 출생의 내력을 증명하는 듯한 특성은 일찍부터 나타낫다. 돌이 지나면서 말뿐 아니라 글을 알아내기 시작했고 세 살 때는 붓을 쥐고 글씨를 쓰는 흉내를 냈다 . 하도 봇을 야무지게 잡아서 하루는 아버지가 몰래 등뒤에서 별안간 붓을 잡아채 보았다. 붓을 놓치지 않은 채로 아이의 몸이 딸려 올라왔다. 여섯 살 , 일곱 살 때. 서울 집인  적선방.장동의 월성위궁 대문에 써붙인 입춘 글씨를 보고 그의 그런 천품과 재능을 일찍이 알아본 것은 박제가와 체제공이었다.

     

    1791년 월성위궁에 써붙인 입춘 글씨를 보고 놀란 박제가는 장차 그 아이를 맡아 가르칠 것을 자청했다. 다음해 봄, 체제공은 그때 시임좌의정(1793년에 영의정)인  64세의 재상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노론인 월성위 집안과는 서로 피하며 멀리하는 남인이었다. 그 가 월성위궁앞을 지나다가 입춘글씨를 보고 자비를 멈추어 그 집 문앞응 두드렸다. 27세의  김노경에게서 입춘방이 여섯 살 난 아들이  쓴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말했다. 

     

    『이 아이는 반드시 명필로 일세에 이름을 드날릴 것 같으이 그러나 글씨를 잘 쓰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것 같군.  그러므로 절대로 붓을 잡지말도륵 하는 것이 좋겠네. 만약 문장으 로 세상에 떨치게 되면 반드시 크게 귀해질 것일세』

     

    결국 추사는 명필과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으로 이름을 드날리면서 ,  남과 북의 극지  10년의 귀양살이를 하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또 하나의 기적 이야기는 제주도 귀양길에서 생겼다. 추사가 정쟁의 제물로 사형에서 일등이 감해져 제주도로 위리안치를 당하게 된 것은 1840년 9월2일 이었다. 20여일간의 육로를 거쳐 , 해남에서 배에 오른것은 그달 스무이렛날이었다.  배가 바다에 나가니 늦가을 해가 벌써 떠올랐었다. 동풍이 순조로와 바다의 거의 3분의 1까지는 뱃길이 아주 잘 나아갔다. 그러나 오후가 되며 바람이 사뭇 맹렬하고 날카로와졌다. 압송관인 금부도사 이하 배에 탄 사랑들이 모두 어지러워 얼굴빛이 변했다.  추사의 문인이며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낸 민규호 (關奎鎬)의 「완당선생소전(小傳)」에는 그 때의 상황이 더  극적으로 적혀 있다. 

     

    원래 제주도 뱃길은 바람과 날씨에 따라 열흘에서 한 달을 잡았었다. 그날 , 배가 바다로 나갔는데 비바람에 파도가 일며 뇌성벽력이 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점점 사나와지고 배에 탄 사람들은 생사를 예측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겁에 질려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는데 도사공조차도 다리를 벌벌 떨며 어쩔 줄을 물랐다. 그런데 추사는 뱃머리에 꼿꼿이 앉아 시를 지어 높이 읊고 있었다. 그의 목청이 바람과 파도소리 사이를 뚫고 낭랑히 울려퍼졌다. 시를 다 읊고 난 추사는 곧 손을 들어 한쪽을 멀리 가l리키며 도사공에게 일렀다.「도사공아, 힘껏 키를 잡고 이쪽으로 가라」도사공이 겨우 키를 잡았다. 배는 강풍을 타고 살같이 날았다. 아침에 육지를 떠난 배가 저녁에 제주도 에 닿았다. 제주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날아서 건너왔다」고 모두들 말했다. 『어뜨 낭 영 재기 옵디강 (어떻게 그처럼 빨리 왔소)」그러나 추사 자신은 바로 아래 아우인 명희(山泉 金明喜)에게 보낸 편지에서 더 담담히 그 사길을 전했었다. 「그런데 나는 다행히 멀미의 증세도 없이 종일 뱃머리에 있으며 혼자서 밥을 먹고 키잡이며 사공들과 더불어 쓴일 단일을 함께 하면서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나갈 뜻이라도 있는 듯이 했네.」

     

     

     어떻든 배는 그 날 저녁놀이 질무렵 , 제주도 화북진(禾北鎭)에 닿았다. 또 한 번의 기 ~H 적은 어느 눈 내린 겨울 달밤의 한라산에서 있었다. 그해 초겨울 음력 10월 20일께 , 심한 큰눈이 내려 한라산이 온통 백옥같이되었다. 동병상련하며 매양 서로 같이 만나던 제주도 의 예닐곱 귀양객들이 눈이 내린 일을 계기로 의논들을 했다. 『요새 달빛이 매우 좋으니 , 오늘밤 함께 한라산에 오르기로 하지요. 비록 정상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 석조를 보고 돌아오면 떻겠소』모두들 동의해서 여섯 귀양객과 세 본바닥 사람이 어울려 , 술 한 병에 종이 한 축을 가지고 산으로 갔다. 음력 스무날께여서 달은 즘 늦어서야 떠올랐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달빛과 눈빛으로 산은 낮처럼 밝았다. 십여리를 가서 , 산등마루에 올랐다. 바다와 하늘의 찬기운이 뼈를 에이는 듯 살을 찔렀다. 입과 코가 숨을 쉴 수도 없도록 얼어들었고 손도 다리도 얼어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우묵한 바위틈을 더듬어 의지하며. 낙엽과 , 나뭇가지들을 서로 주워 모으고 부시를 쳐서 모닥불을 놓았다. 거기 광대싸리를 펴고 둘러앉아 술을 뜨겁게 데워 마시며 , 얼어드는 추위를 녹였다. 

     

    너무 추워 더 오를 수 없으니. 일찍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말도 나왔으나 ,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시 한수라도 짓고 가는 것이 옳겠다는 쪽으로 뜻이 모여 운(韻)자를 내고 부(賦)와 시들을 짓기로 했다 . 불에 단 뜨거운 돌에 눈을 움켜다 놓고 먹을 갈았다. 그러나 붓에 먹을 찍어 글씨를 쓰려 하면 붓끝이 금랄 얼어붙어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다시 붓과 종이를 불에 쬔 다음 , 간신히 한 자를 써놓아도 글자가 얼어 떨어지며 종이에는 먹자국도 남지 않았다.  모두들 붓을 던지고 말았다. 그때 추사가 비로소 일어나며 말했다.「나 도 한번 시험해보지요」 

     

    그 는 붓에 먹을 적셔 종이에 대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붓도 먹도 얼지 않고 글씨가 보통 때처럼 잘 써졌다. 그 는 여러 장의 시를 그렇게 썼다. 그 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지전 이신규는 훗날  이런 이야기를 하며 「원춘( 元春 : 추사의 字)의 붓은 신령이 내려서 붙었다』고 말했다. 

     

    지전 이신규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신자인 이승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다산 정약용의 누이이다. 그 는 1839년 천주교의 기해(己亥) 박해 이후로 경향 각지를 숨어다니며 , 천주 교의 순교자 사료수집등을 했는데, 그동안에도 한 번 체포당했다가 석방이 되었으며. 1868년에 다시 잡혀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 했다. 이신규는 숨어다니던 길의 제주도에서 추사를 만났던 것이다.  다만 추사가 위리안치된 제주도의 대정(大靜)에서 한라산은 초입까지도  20여킬로미터가 좋이 되므로 하루 저녁 길로는 멀다 . 출발지가 대정이었다면 낮부터 일찍 길을 떠났을 것이다.  또한 가시돋힌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 주거를 제한한 위리안치의 형을 받은 당시 추사에게 그만한 정도의 행동의 자유는 허용되었던 것도 같다. 

     

    어떤 경우 , 추사의 글씨에서는 밤에 무지개와 같은 빛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글씨를 가진 집에서 상서롭지 못하다는 말을 해 가지고 오라고 해서 붓으로 개칠을 함으로써 빛을 없했다는 이야기이다. 

     

     

    함경도 유배에서 돌아와 서울에 머무를 때 , 누가  그일에 대해서 물었으나 , 추사는 미소를 지으며 그런 일의 유무를 말하지 않았다. 어떻든 그는 자신이 겪은 기적과 비슷한 일을별로 의식하려 하지 않았다.  제주도 뱃길이 무사했던 이유도 임금과 하늘의 은혜라고 또한 아우 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었다.『이 죄 많은 사람을 돌아봄에 ,어찌 감히 스스로 올차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임금의 신령하신 힘이 멀리 미쳤으며 , 하늘이 또한 가엾이 여기시어 내려주신 것인 듯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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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의 생애에서의 몇가지 기적 같은 일에 비해서 그가 겪은 기구한 시련은 한층 가혹한 것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는 백부 노영에게로 양자를 들어가 월성위궁을 잇게 되었는데 열두 살 때 , 양부에 이어 , 월성위궁의 어른인 조부마저 잃는다. 열여섯 살 때에는 생어머니 기계 유씨가 서른넷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그 뿐 아니라. 그 동안에도 많은 당내의 육친들과 사별한다. 

     

    1839년 5월 , 추사는 형조참판에 , 다시 1840 년 6월에는 동지부사( 冬至副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0 년 만에 재연된 정쟁의(곧 尹尙道의 獄事) 모함으로 7월12일에는 형제(아우 命喜)가 다 벼슬을 깎인다. 생전에 예조 .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평안감사 등을 역임하고 10년전 정적의 부당한 탄핵을 받고 고금도로 유배까지 당했다가 이미 3년 전에 죽은 생부 노경 또한 그해 7월 12일자로 추삭(追削)을 당한다. 추사는 예산에 내려와 있다가 , 8월20일 잡혀 들어가서 10여 일간에 욕되고 참담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위리안치된 제주도의 대정현( 大靜縣)은 기온은 따뜻하고 사람들은 친절했지만 , 때로 바람이 심하여 어떤 겨울은 육지보다 더 추위가  호되었으며 여름이면 습기가 차고 덥고 파리떼에 , 모 기 , 벼룩 등 물것이 들끓었다. 1842년에 이재 권돈인에게 한 편지에서는 반자나 되는 지네 , 손바닥만한 거미가 방안에 까지 횡행하며.. 그믐께는 큰비바람이 일어,  돌덩이들이  날고 커다란 나무들의 뿌리가 뽑히며 바닷물이 시꺼멓게 치솟고 벼락이 치는」 제주도의 유별난 날씨와 귀양살이 주거환경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라산의 영이와 음력 정월말에서 2월 초에 피기 시작해 3월 내내 산과 들 도처에 흐드러진 수선화의 천하대관 같은 제주도 자연의 아름다운 장관을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박한 유배지의 기후를 견디며 추사의 몸의 고통 , 마음의 고생은 끊일 날이 없었다. 

     

    추사가 처음 대정현에 위리안치된 곳은 송계순의 집이었으며 및해 후에 다시 지방유생 강도순(姜道淳)의 집으로 옮겨졌다. 1984년.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安城里) 1181번지의 1에 , 강 도순의 집이던 적거터(謫居址)의 초가가 복원되고 , 내용은 딱하기 짝이 없지만. 콘크리트의 추사적거지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1984년.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安城里) 1181번지의 1에 , 강 도순의 집이던 적거터(謫居址)의 초가가 복원되고 , 내용은 딱하기 짝이 없지만. 콘크리트의 추사적거지 기념관까지 세워졌다.

     

    당시의 강도순의 초가를 그 대로 복원했다기보다도. 대개 비슷한 제주도남부의 일반적인 그런 규모의 집을 만들어 꾸며 놓은 것이다. 초가는 3채(세 거리 집)인데 마당을 사이에 두고 ㄷ자형으로 안채와 바깥채 , 그리고 곁채가 배치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작은 곁채가 추사가 머무르던 곳이다. 기거하던 방은 60센티 너비의 반침턱이 있는 1미터 80센티 (6자) 사방의 옹색한 온돌방이고 ,그 옆으로 두어간 통의 우물마루에이어 1미터 20센티 정도 헛간 같은 공간이 이어지는 삼간집이다. 작은 경상(經床) 모양의 서안 (晝案)과 등잔거리가 놓인 방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참혹할 만한 주거환경이다. 1844년 , 그런 참혹한 심신의 환경에서 그려졌을 문인화의 하나의 극치인 세한도(歲寒圖)는 얼마든지 극악한 환경에서 얼마든지 지고 (至高)한 인간의 행위가 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궁극적인 문화예술 행위의 한 표징(表徵)이다.

     

    1845년 , 명희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사는「코병이 나고 입속에는 풍기와 화기가 치밀어 이가 모두. 흔들리므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는 사연을 말했다. 또 눈병이 심해서 글씨를 쓰는데 매우 힘들었다는 말이 같은 해에 작은아우 상희에게 한 편지에는 있다.

     

    이미 대여섯 달이나 혓바늘이 돋고 코가 막히는 고통을 겪는다는 말은 「세한도」를 그린 1844년 정월의 편지에서도  나왔는데 , 그해 추사는 이달 들어서면서부터 때없이 슬퍼지지만. 마음을 크게해서 참는다」 고도 했었다. 정월 초하루, 사당에 드리는 차례에 대한 생각도 간절했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그날이 「문득 지나니 , 아득히 멀리에서 사당참배에 빠진 슬픔을 무엇이라 돌려 형용해 비유할 수도 없다」고도 했다. 귀양살이 7년이 되는 1846년의 편지에는 담과 해수가 더욱 심해져 기침이 급하고 코로 피가 나올 때 도 있다고 했으며 , 그동안에 위도 상하고 다시 이태 후인 1848년에는 새해를 맞으면서 병세는 고질이 되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형편이라고 했었다. 거듭 , 눈이 더욱 침침하고 먹은 것이 내리지 않으며 밥상을 대하면 문득 구토가 난다는 병세를 전하기 도 했다. 그 처럼 「습하고 독기서린」 남쪽 땅에서 8년여를 두고 새해마다 추사는 더하는 슬픔과 두려움을 겪으며, 겨울을 지내고나면 모습은 마른 나무와 같고 마을은 찬재와 같은 쓸쓸한 고통을 느꼈다.

     

    그 불모의 유배지에서 추사는 진작 귀양살이 2년여 만에 또한 가장 인간스러운 슬픔을 되새기게 된다. 1842년 11월13일 , 월성위와 화순옹주의 산소가 있는 예산 용궁리의 시골집에서의 부인 예안 이씨(禮安 李氏)의 죽음이었다. 제주도 대정에서 추사는 그 소식을 한 달이 더 지난 섣달 보름날 저녁에야 듣는다. 살아서 헤어진 채로 이태를 더 지내다가죽음으 로 아주 갈라진 부인의 일을 추사는 끝없이 슬퍼했다. 그는 『길이 떠나서 간 길을 쫓아가지 못함에 사무쳐서 몇 줄의 글을 엮어 집으로 보낸다」 고 하며 「부인 예안 이씨 애서문(哀逝文)을 지어 보내면서 , 글이 도착되면 상식(上食)을 올릴 때에 영전에 고하라고 했다.

     

    아아. 나는 옥에 잡혀서 고초를 치르고, 바다를 건너 귀양까지 왔으나 , 아직 내 마음이 흔들린 일은 없었다. 이제 한날 아내의 죽음에 놀라 가슴이 무너지며 ,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 어인 일인가. 아아 무릇 사람은 다 죽는 것이므로 홀로 부인만이 죽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수 없는데 죽었으므로 ,  죽어서 더 끝없는 슬픔을 품었을 것이다.

    기막힌 원한은 장차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 맺히면 우박이라도 될 것이다』

     

     

    추사는 이미 스물 한 살 때 , 12세에 결혼한 초취부인 한산 이씨를 잃었었다. 그 때에 당한 일도 슬픔은 같았지만 층층이 돌보아 줄 안어른들이 있었다.  그러나 스물 셋에 결혼해 거의 40년을 함께 지낸 예안이씨는 이제 조상의 제사며 집안일을  총괄하는 큰집의 주부였다. 그런 일에 대한 걱정이 아내의 죽음을 서러워하는 마음보다 더 유배지의 추사를 아프게 했다. 추사는 그 슬픔과 아픔을 견디며 사촌형 교희에게 보낸 편지 답장에서 말했었다.「자세히 타이르시며 위로하시는 말씀을 힘써 지켜 다잡지 못하고 구차히 정신을 상하게 하고 있으니 , 역시 장자(莊子)의 달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두고 장자는 술항아리 장단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문상을 온 혜자가 그 이유를 물었다. 장자는 대답했다. 

     

    『난들 처음에 어이 슬프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가만히 처음부터 생각해보면 본래 생이 없었네. 그저 생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아내라는) 모습(形)도 없었네. 그저 모습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운(氣) 도 없었네. 끝없는 혼돈 속에 섞이고 변해 기운이 생기네. 기운이 변해 모습이 생기네. 모습이 변해 생이 생기네. 이제 또 변해 죽은 것이야. 이는 마치 춘하추동이 가는 것과 같은 것일세. 이제 내 아내는 커다란 천지 흔돈의 공간에 본래 그대로 잠들고자 하네. 그런데 내가 운다면 그러한 천지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나 같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리 천지의 이치가 그렇더라도 당장 당한 인간의 슬픔은 슬프고 아픔은 아팠다. 그 런 것이 인간다운 그 때 추사의 심경이었다. 

     

    모든 현상이 본래적으로는 무상(無常)한 것처럼. 특히 혹독한 시련 앞에서 한 사람의 힘은 아주 미약한 것이다.  추사 자신 도 10석일간이나 당한 바 있는 무도한 고문이나 ,야만적인 살인 ,우둔하고 난폭한 정치의 소용돌이 , 잡다하게 몰려가는  군중의 물결 속에 끼이면 , 사람이 지닌 가슴속의 「문자향 서권기」는어쩌면 무의미하고도 무력한 것이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고 가슴속에 낀 먼지와 잡된 것을 가려내고 떨어 없앤」공력도 별 수  없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좀더 생각하면 무도한 고문 , 야만적인 살인 , 우둔하고 난폭한 정치의 소용돌이 , 폭력적인 군중의 물결들이 또한 본래적으로 는 형체도 기운도 없이 무상한 것이다.  문자향 서권기는 무상하고 살 맛이 없는 그런 덧없는 곳에서 새로운 살맛을 빚어져 나오게도 한다.  그것은 독기를 씻는 맑고 그윽한 바람처럼 , 무도한 고문을 씻고 , 야만적인 샅인을 씻고 . 우둔하고 난폭한 정치의 소용돌이를 씻어 정치 자체를 조금  현명하고 바르게 할 수도 있다 덮어놓고 몰려가는 잡다한 군중의 소리를  씻고 거르고 가려서 조금은 더 슬기로운 천심의 소리가 될 수 있게도 하는 것이다. 

     

    유배지에서 , 추사는 몸은 마른 나무 , 마음은 찬재가 되도록 ,미약하고 무상한 한 인간으로서의 몸의 병과 마음의 슬픔을 사람답게 끊임없이 앓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독기 서린 땅의 귀양살이에서도 항상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며 ,가슴의 먼지와 때를 떨쳐 내려는 일을 계속했다.  그것은 곧 가슴속의 문자향과 서권기를 기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의 문자향 서권기가 당장 무도한 고문이나 우둔한 정치를 슬기롭게 치유하는 효용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추사가 그런 목적을 가지고 책을 읽으며 , 마음의 길을 닦아간 것은 아니었다. 깜박이는 등불과 누렇게 해묵은 책들이 가기에 있으며 , 자신이 해야할 행위가 오직 거기에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의 학문적인 탁견이며 , 그 시대를 그렇게 산 그의 어떤 글씨나 그림이 , 같은 시대에 정쟁을 일으킨 당당한 세도의 위세보다 더 오랜 가치를 두고두고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문자향과 서권기로써 던져 주는 것은 그가 이미 없는, 또한 문자향 서권기를 기르는 그의 행위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더욱 뒷날의 일이었다. 

     

    제주도의 유배지에서 , 해를 더하는 슬픔과 두려움에 조금이라도 위안이되는 것은 육지에서. 그것도 날씨나 여정이 순조로와 빨리 오는 편지였다. 뱃길에 따라 인편으로 오면서 몇달도 마다않고 걸리는 소식이 어떤 때는 10여일 만에 닿는 일이 있었다. 그런 최근의 소식을 접하는 추사는 마치 학문이나 예술에서 어떤 이치를 하루아침에 터득해 깨우친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추사는 그렇게 왕래하는 집의 하인이나 다른 인편을 통해서 많은 서책이며 서화. 금석학 자료 들을 가져다가  읽고 보았다. 그 리고 요청에 따라 , 또는 흥이 이는 대로 글씨를 썼다. 쉰 다섯 살의 9월에서 예순세살(1848년)의 섣달에 이르는 9년. 만 8년 3개월여의 그런 제주도 유배생활에서 널리 일컬어지는 그 의 글씨 추사체-곧 추사의 글씨가 마침내 점점 무르익어간 것이다. 그것은 수천년에  걸친  돌에 새겨진 글씨 , 쇠에 파거나 부어진 글씨( 鐘鼎 등의 金文) . 흙으로 구워진 글씨 (瓦當. 封泥). 그리고 붓으로 쓴 여러 글씨들의 요소 가 , 한 사람 추사자신의 사람다운 슬픔과 아픔들과  함께 붉은 쇳물처럼 끊고 삭으며, 독자적인 양식으로 걸러 새겨낸 글씨의 모양이있다. 그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더 신령한 기운이 생동하며 바다와 같고 조수와 같고 용이 올라가고 , 호랑이가 뛰는 듯한 기괴하고 특이한 글씨의 모양(書風)이었다. 날수로 3만 일을 혜아리는 제주도 생활에서 추사는 두 가지 맛에 대한, 독특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치와 양주(洋酒 )에 대한 것이었다. 유배 5년이 되는 1844년의 세선(歲船)편에 부쳐온 김치항아리를 받아 그는 몇해 사이에 처음 김치맛을보고 입맛이 개운해지며 귀양을 사는 입에 스스로 과람한 듯한 미각을 되새겼다. 참으로 오래간만의 김치가 모처럼 입맛을 돋우어 밥을 많이 먹을 수 있었다. 양주는 본래 서양배의 것으로. 그곳 제주도 사람이 바닷가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주워온 콜크 마개 병안에 남은 것이었다. 추사는 일찌기 청나,라 연경에 갔을 때에 여러 명사들과 함께 그런 양주를 맛본 일이 있었다. 병에 남은 술의 향기롭고 독한 맛이 그 때에 연경에서 맛본 서양술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 척박한 추사의 제주도 생활에 한가닥 더 그윽한 향기를 던져준 것은 초의(艸衣)선사가 보내는 차였다. 초의는 추사와 동갑이었고 서른 살 때 우연히 만나 서로 사귀었는데. 그 때 해남 대둔사( 지금의 大興寺) 일지암(一枝庵)에 머무르며 제주도 대정 유배지의  추사와 편지를 교환하고, 손수 이겨 만든 떡차며. 향과 초를 소치(小痴 許維)편 등으로 보냈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 바다를 건너 아내를 잃은 추사를 위로하기도 했었다. 허소치는 초 의 천거로 서울의 추사를 찾아 그림과 글씨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었다. 1840년 8월20일밤중, 추사가 예산 용궁 마을에서 잡혀갈 때에, 마침 그날 스승을 찾아뵈온 소치는 ,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며 그 현장을 목격했었다.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된 추사를 ,소치는 세 차례 바다를 건너서 찾는다. 1841년 2월 , 33세의 허소치는 대둔사를 거쳐 제주도에 들어가 추사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으며 글씨 연습을 하다가 5월8일 ,둘째 아버지(仲父)의 부음을 받고 진도(珍島) 로 돌아간다. 다음 1843년 7월 , 대둔사에 있던 허소치는 새로 부임하는 제주목사 이용현(李容鉉)을 따라 제주도로 들어가 그 막하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정포(靜浦 : 大靜) 추사의 적소 (謫所) 를 찾았으며 ,이듬해 봄에 섬을 나왔다. 그리고 추사가 방면되던 전해인 1847년 봄에 다시 세 번째로 추사의 적소를 찾았다. 

     

    그런 소치의 내왕편에 초의는 차를 보내었고 추사는 그 차의 맛과 선(禪)의 향기를 함께 새기며 즐겼다. 소치가 세 번째 찾아간 그 해 여름  유두절에 초의에게 쓴 편지에는 「먼저 보 내주신 떡차를 이미 다 마셨는데 물리지 않고 더욱 바라게 된다」는 말을 했고 , 또 다른 편지에는  「이가 욱신거려 괴로왔는데」 「차가 없어서난병이며 , 이제 또 차를 받고 병이 나으니 웃을만한 일」이라고  썼다. 

     

    1845년 이재 권돈인에게 쓴 편지에서는 일찌기 연경의 「쌍비관에서 맛본 승설(勝雪)의 향기」 만큼  좋은 우리 차를 40년 만에 맛보았는데 「영남 사람이 지리산 중에게서 얻은 것」이라는 뜻이 적혀 있다. 

     

    초의뿐 아니라 이재 , 석파 , 우선등 여러 문인 학자들과 잇따라 주고 받는 편지와  더불어 좋은 차는 추사의 적소의 #.4 포출을및어 주는 담박한 풍미며 그윽한한 향기였다. 1848년 섣달 초엿샛날 , 제주도에서 방면된 추사는 이듬해 초에 서울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에 맞는 서울의 봄, 강바람은 퍽 시원하고 물맛도 좋았다.  집안이 단란하고 친척들간의 정다운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예순 네 살의 추사는 10년간 쌓인 회포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추사의 평온한 생활은 1년 반만에 다시 깨어졌다. 1851년 7월22일 ,추사는 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당한다. 예순 여섯의 나이에 유배된 북청의 거산(居山)에서 추사는 더위에 눈병이 더쳐 고새을 했다. 그러나 북청은 제주도처럼 바다를 끼지 않아, 소식을 주고 받는데 비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기별이 제때에 닿았다.

     

    북청 유배 한 해에 추사의 글씨는 남쪽 8년의 비바람과 북쪽 한 해의 설한풍이 소용돌이치며 휘몰아가면서 부대끼고 난 뒤처럼 한층 기이하고 예스러워(奇古)진다. 북청에서 쓴 행서에서는 흉한 듯 험하고 겁을 주는듯한 팔분이며 , 가로세로 빽빽하게 죽죽 뻗은 옛 예서의 풍모가  더 풍기는 것이다. 혹은 더위에 더친 눈병을 무릅쓰고 쓴 반흘림 글씨(行書)가 그 의 조형예술적인 뼈대를 타고 엉성한 듯 기이한 그런 풍모로 나타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추사는 일찍이 구양순의 글씨를 가리켜 마치 『기이한 꽃망울이부풀며 펴어나기 직전과 같다』 고 하며 특히 『화도사의 옹선사사리탑명(化度寺邕禪師舍利塔銘 : 化度寺碑)은 그 신비로운 변화를 사람으로서는 풀어낼 수 없다』 는 뜻을 말했었다. 추사 자신의 가장 시범적으로 두드러진 해서인 「감어첩(甘於帖」의 글씨에는 바야흐로 부풀어 터질 듯한 꽃망울 같은 기운이 넘친다. 갖가지 점과 획들이며 삐침과 파임들 로 짜여 어울린 반듯반듯한 글자들과 그런 글자들의 어울림이 잘 당겨진 활시위 같은 힘을 안 고 있는 것이다. 그 것은 아름다운 꽃처럼 반듯한 것이 안고 있는 기이한 힘이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대지를 치받으며 뚫고 돋아나오는 새싹의 어린 듯 끈질기고 매서운 , 그리고 준절한 힘과도 같은 것이다.

     

     추사의 그런 해서는 엄격하고  준엄한 의식(儀式)과 도 같은 글씨였다. 그리고 북청의 유배지에 쓴 그의 기고한 행서는 옛 춤(古舞 )와도 같은 글씨이다. 그것은 엄격한 의식으로 단련된 늙은 명무(名舞)의 몸에서 잘 풀려나오는, 기고 (奇古)하고 질박한 춤이다. 사람과 더불어 춤도 그렇게 늙고 글씨도 그렇게 늙는 것이다. 좋은 산 , 잘생긴 돌처럼 , 해묵은 나무이듯 그렇게 늙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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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소치가 찾아뵈었다.  그동안 추사는 때때로 봉은사를 찾아 묵다가 아주 절 안에 한 거처를 마련했다.  절을 들어서서 동쪽으로 큰방의 남쪽 아래에 나무로 임시의  한 간 집을 지었다. 

     

    그 해 , 1856년 병신년 봄에서 여름을 추사는 거기서 지냈다. 한 간의 방에는 창문이 없었으며. 앞쪽으로 휘장이 드리워졌는데 날씨에 따라 휘장은 반둬 올려려졌었다. 방바닥에는 화문석을 깔고 그 위로다시 꽃담요를 폈다. 담요 앞에 커다란 책상을 놓았는데 방안에는 희미한 향기로운 연기가 감돌았다. 책상 위에 발이 높은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의 연기였다. 책상위에는 커다란 벼루와 또 뚜껑이 있는 벼루 , 푸른유리로 만든 필세(筆洗), 크고 작은두 개의 필통들이 각각 놓였다. 큰 필통은 진사백자의 붉은 빛으로 항상 서너개의 큰 붓 이 담겨  있고 , 하얀 백자의 작은 필통에는 여덟 아홉개의 작은 붓들이 꽃혀 있었다. 그사이로 백옥제의 백옥제의 연주함과 청옥제의 서진(書鎭)이 각각 한 개씩 있었다 . 큰 벼루에는 갈아놓은 먹이 오목한 벼루못에 차 있고 그 왼쪽에는 목반에 수십 덩이의 크고 작은 갖가지 모양의 도장들이 있었다. 책상 오른쪽에 자죽(紫竹)으로 만든 작은 탁자를 놓고 시렁에 글씨를 쓸 깁이며 생초, 각종 종이들을 잔뜩 꽂아 놓았다. 

     

    일흔 한 살의 추사는 그 방안 꽃담요 위에서 지냈다. 글씨를 쓰고 , 때로는 쓴 글씨폭의 젖은 .먹을 볕에 쪼여 말리며 , 벽에 걸어놓고 거듭 바라보기도 했다. 그 몸매는 큰편이 아니었다. 기우(氣宇)는 퍽 맑고 부드러우며 성품은 차분하고 온화했다. 말소리가 나긋나긋해 얘기를 듣는 사람이 모두 즐거워했다. 그러나  때로 옳은 이치를 따질 때에는 , 그말이 벼락 같고 칼끝 같아 사람들은 모두 춥지 않아도 떨었다. 

     

    1856년 초여름 , 그해 열세 살의 상유현(明橋 尙有鉉)이 ,『 어른을 따라 봉은사의 그 방에서 추사를 보고 뒷날 그 때의 생생한 인상을 기록했었다. 

     

    「가운데 한 노인이 앉았는데 키와 몸매가 작고 수염은 눈처럼 희며 ,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밝게 빛나고 머리 숱은 없으며 ,중들이 쓰는 대로 짠(竹) 둥근 모자를 썼다. 푸른 모시의 소매 넓은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얼굴에 붉고 젊은 기운이 가득했다. 팔은 약해보이고 손가락이 가늘어서 섬세하기가 여자와 같았는데 , 손에 염주 하나를 쥐고 만지며 굴리고 있었다. 」

     

    그러나 일흔 한 살의 추사는 그 해 여름에서 가을에 걸쳐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저 드물게 심기가 밝아지면 일어나 글씨를 썼다.  그날  ,1856년 10월 7일 ,추사는 한참 만에 심기가 밝아지며 모처럼의 감흥이 일었다. 절에서 소청을 한 판전( 板殿)의 편액을 써야할 과제도 있었다. 봉은사에서 마침 화엄경 경판을 보존하기 위한 판전을 법당 서쪽으로 한참 떨어진 숲속 언덕에 새로 지었다. 세로 삼간 가로 다섯간의 맞배지붕 기와집이었다. 그 판전에 걸 편액을 진작에 쓰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판전의 편액글씨는 쉽게 써지지 않았다. 병든 몸이어서 더욱 그랬다 . 병든 팔을 움직이기 어려워 예서를 쓰기도, 병든 눈을 억지로 움직일 수 없어 해서를 쓰기도 어려운 , 그런 날들이 많았다. 원래 몸이 건강해도 글씨를 쓰는데는 감흥이이는 흥회( 興會)가 있어야 했다. 문득 글씨를 쓰고 싶은 때에 써야 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東晋)의 왕휘지( 王徽之: 王義之의 5男)는 내리던 눈이 마침내 멎은 달밤에 멀리 사는 친구 대규를 만나고 싶은 감흥이 문득 , 일어 밤새 배를 저어 그를 찾아갔다 . 아침에 대규의 집의 문앞까지 갔는데 동안에 만나고 싶은 감흥이 다해 버렀다. 그냥 뱃길을 돌린 왕휘지는 말했었다.

     

    『흥이 일어서 왔고 흥이 다하니 돌아가는 것이다. 어찌 꼭 안도 (安道 대규의 字)를 만나야만 하는가』 그것은 그림이나 글씨가 같았다. 추사에게는 일찍부터 한꺼번에 많은 종이를 보내며 글씨나 난(蘭)의 그 림을 그려달라는 청들이 있었지만. 난의 그림 또한 난이 싹을 토하듯 정신의 기운이 잘 모이고 , 그 분위기가 무르익어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글씨를 쓰고 싶다는 그런 흥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날, 추사는 병든 몸에서 그러한 감흥이 문득 일었던 것이다. 

     

    어제 저녁을 간단히 마친 후에도 추사는 오 른 팔에 자화참회(刺火懺悔) 를 했다. 연비, 혹은 수계(受戒)라고도 하며 가는 심지로 팔뚝을 지지는 일이다.  승려가 되기 위해 , 처음 계를 받을(受戒)때 , 초를 먹인 작은 심지 같은 베올을 젖힌. 팔뚝위에 곧추세우고 불을 댕긴 다. 불침을 놓은 듯 타들어가며 베올의 심지 끝이 팔뚝의 살을 지진다. 불은 생리적인 반응을 가져오지만 , 수계과정에서의 연비는 생리적인 반을을 초월한 엄숙한 의식이었다 . 그것은 전생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모든 깨끗하지 못한 업장(業障)을 깨끗이 씻어내고 밝은 것으 로 돌아가는(歸依淸淨) 절차였다. 전생에서 이생에 이르는 온 마음과 온 몸의 더러움을 사 르는 불의 참회였다. 봉은사에서 지내며 추사는 그렇게 팔뚝을 지지는 붙의 참회를 했다. 뽀죽하게 살을 태우는 자화참회는 병든 몸이며 마음을  때때로, 그의 밤을 밝히는 양초의 불꽃처럼 밝게 했었다. 이당 조면호가 보낸 양초가 추사의 밤을 더러 그처럼 밝게 비쳐 주었었다.

     

    추사는 일찍이 볼설사십이장경(佛說四十二章經)을 읽고 자신이 자라난 유교와 그리고 불교가 시초는 같다는생각을 했었다.   불교 또한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하고 , 악한 짓을 하지 않도록 징계하는 것 이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천당과 지옥을 믿지 않았다. 그것은 비유해 보여주며 이끌어 가르치기 위한 것이며, 진실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지옥과 천당을 믿지 않았으므로 전생을 또한 생각하지 않았다. 자화참회는 그러므로 전생 보다는 , 통시적인 이생 전체보다도 ,그때그때의 업장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그때의 업장을 거듭 씻어가면 혹은 한 생애의 업장이 씻어진다.  몸의 업장을 씻으면 혹은 몸이 정토가 되고 ,마음의 업장이 씻어지면  혹은 마음이 정토가 된다. 찰나의 업장도 그렇고 일생의 업장도 그렇다.  극락도 그렇고 지옥도 또한 그렇다. 

     

    선영이 있는  예산 용궁마을 오석산의 화암사는 추사의 증조 월성위가 중건을 한 절이었다. 추사의 불교에 대한 인연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그 후 많은 불교의 전적을 읽었고 선리(禪理)도 두루 생각했다.  불교나 선의 이론뿐 아니라 그 서지학적인 쪽도 여러 모로 헤아려 알았다. 착하게 살고 악한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나 유교 성현의 가르침이 다 같았다.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누구나 다 알지만 누구든지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실행하는 첫 번째 길은 사람이 태어날 때 그 대로의 착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이 풍진 세상을 살며 태어날 때의 착한 마음을 그 대로 지닌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길은, 그런 마음이 되어지도록 공부를 하는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 부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이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가며 가슴 속에 문자향과 서권기를 간직하는 글씨공부와 그 림공부와 시의공부며 행위가 하나이듯이(詩書一致) . 시와 선이 하나이듯이(詩禪一致) , 그 렇게 공부를 행위하는 것이다. 추사는 책과 서화 , 금석의 자료들을 보고 궁리를 하고  사색을 하고 글씨를 쓰고 시를 짓고 , 때로 그림을 그리며 그런 공부를 행위했다. 거듭 반야심경의 사경을 하고 팔뚝를 지지는 자화참회를 했다. 추사는 글씨 ,예서를 쓰는 마음은 가슴에 맑고 높고 그윽하며 고운 뜻이 간직되어야 하고, 예서를 쓰는 팔뚝은 3백9개의 비석글씨를 그 밑에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국 남송(南宋) 사람 누기(婁機)가 엮은 「 한례자원(漢隸字源)에는 한나라 석글씨 3백9개와 위와 진(魏 , 晉)의 비석글씨 31개의 자료가 수록되어 있었다 .  3백9비란 결국 모든 한나라의 예서자료를 뜻한다.  그것을 또 8만권 금석의 기운(八萬券金石之氣)이라고도 말했었다. 그런 맑은 마음과 그런 금석의 기운은 역시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는 행위를 따라 길러진다. 그것은 성현 ,부처의 길 , 선(禪)이 가리키는 궁극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일흔 한 살에 이르기 까지 글씨며 그림 , 시며 학문 ,그리고 사색과 수행을 따라서 추사가 거기에 이르른 글씨의 경지, 그림의 도달점은 더 철저히 다져진 이론과 더 완벽한 99 .9 퍼센트가 아닌 100 퍼센트의 행위를 일치시킬킨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이르른  사람의 경지는 기상천외의 유별난 것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두부와 새앙과 오이와 나물을 반찬으로 아내며 아들 딸, 손자들이랑 사는  여느 시골늙은이의 일상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낫이나 조선쟁기날 , 혹은 잘 생긴 떡갈나무의 가지처럼 , 단단한 정강이가 질 늙은 시골 늙은이의 평범한 생활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또 봉은사 숲속의 잘 생긴 늙은 소나무나 상수리나무나 떡갈나무의 그리고 모든 풀과 나무의 피고 지는 사철과도 같은 것이었다.

     

    추사는 향을 새로 피우며 먹을 갈도록 하고 커다란 책상 앞에 섰다 너비 두어 자 길이 예자의 종이를 가로 폈다. 붉은 큰 필통에서 굵은 붓을 골라 들었다. 원래의 약한 팔과 가는 손가락이 그 동안에 더 수척해보였는데 온화한 얼굴에는 문득 아련한 화색이 돌았다. 손에 잡은 붓은 이미 50여년 전에 고인이 된 뛰어난 서가 유석암( 1719- 1804)이 만든 청애당붓(淸愛當筆)이었다.  금석학으로 친히 사귄 석암의 종손(從孫) 연정 유희해(燕庭 劉喜海)가 그 서너 자루의 굵고 가는 붓을 보냈었다, 강하고 부드러운 맛이 손에 잘 익어 그 동안 예서와 해서를 그 굵은 붓으로만 썼다. 한 자루로 20년을 썼는데도 붓은 상태가 좋았다.

     

    -6-

     

    추사는 붓에 먹을 묻히며 붓끝을 골랐다. 그리고 가로폭 해서로 「대웅전(大雄殿)」의 석자를 썼다.  그것은 획이 굵지 않은 , 못난 듯 투박한 것을 밝고 준수하고 굳센 것으로 다시 걸러낸 듯한 글씨였다. 「대팽두부... 」의 예서의 정기가 그렇게 해서로 풀리며 한폭 안에 응집된 것 같았다. 붓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던 추사는 글씨폭을 거두어 놓게 하고 다시 새 종이를 댔다. 드디어 판전의 편액을 쓰기 위해서이다.

     

    추사는 먹을 넉넉히 찍어 판(板)자부터 쓰기 시작했다. 널판자(板)왼쪽의 나무 목(木)변의 가로획을 쓰기 위해 붓을 종이에 댄다. 붓대를 꼿꼿이 자칫 왼쪽 뒤로 비스듬히 세우고 종이 위에 오른쪽 아래로 댄 붓끝이 붓털에 고루 감싸여 왼쪽 위로 해서 아래로 내려와 갈구 리 같은 둥근 세모를 그리며 돌아 오른쪽으로 가로획을 그어간다. 그때 붓끝은 글씨획의 중심을 앞서서 나가며  붓털은 그런 붓끝을 고루 감싸아 나아간다. 그래야만 획의 뼈대가 산다. 붓끝을 그렇게 대고 중봉(中峰)으로 쓰는 운필법은 그 무렵 청나라 연경에서 남송(南宋) 이전의 옛 법을 연구해 새로이 확립한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추사는 스물 네 살 때 동지 무렵에 , 동지겸 사은사 행차의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가서 이듬해 정월까지 머무르면서 여러 이름난 그곳 선비들에게 붓을 잡고 손가락을 쓰며 붓을 움직이고 먹을 쓰고 점을 찍고 삐치며 뒤채고 맞추고 글자를 배열하는 새로운 이론을 배웠었다. 붓대에는 바깥쪽으로 높이  집게손가락의 가운데 마디를 대며 , 엄지는 붓대 안쪽에서 집게와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 마주해 지문쪽을 붓대에 대고 눌러 거위의 머리가 높이 치켜져서 굽은 것처럼 구부린다.붓대에 배를 댄 가운데 손가락은 안으로 구부리고 새끼손가락은 붓대에 등을 댄 무명지에 붙여 마치 거위가 두 날개로 물을 밀듯이 붓을 움직여가야 한다. 그렇게 엄지와 집게 , 가운데 손가락으로 붓대를 잡고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로 힘을 받치는 집필법이 , 추사가 연경에서 새로 배운 발등법(發鐙法)이었다. 그 때 붓을 움직이는 힘은 큰손가락에 집중되며 손바닥 안은 달걀을 쥔 듯이 비어야 한다. 그래야만 붓을 민첩하게 궁굴려 움직이게 된다. 붓을 왼쪽으로 궁굴려 움직일 때는 집게손가락의 뼈를 가로로 밀어내고 , 오른쪽으로 궁굴려 움직일 때는 엄지의 뼈를 밖으로 튕겨낸다. 그러면 붓털이 모두 획의 중심을 가는 붓끝을 감싸면서 고루 움직여간다. 그리고 붓을 쥔 손가락의 힘은 결국 온몸으로 연결되어 붓털을 움직여간다.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는데, 붓은 손가락에서, 손가락은 손목 , 손목은 팔뚝 , 팔쪽은 어깨에서 , 그 손가락손목 , 팔뚝, 어깨는 모두 오른쪽 몸뚱이에서 움직여진다. 오른쪽 몸뚱이의 힘은 다시 왼쪽 몸뚱이와 연결되고 그 상반신은 다시 하반신의 다리로 이어진다. 두 다리의 두 끝은 발끝과 발뒤꿈치다.

     

    발끝과 뒤꿈치가 땅을 마주 걸어당기듯 꽉 디디면 나막신굽이 땅에 박히듯 , 땅을 디딘 두 다리 , 곧 하반신이 충실해진다. 그 충실한 힘에 상반신은 의지하는데 그 때 상반신의 왼쪽은 꽉 차게 하고 , 오른쪽은 텅 빈듯이 한다. 꽉차도록 충실히 하기 위해 왼쪽 몸은 엉겨붙듯이 책상에 기대어 하반신의 두 다리와 유기적으로 상응하며 그처럼 상하로 충실한 세 몸뚱이가 팅 빈듯한 오른쪽 글 몸등이를 움직이게 한다. 그 때에 오른쪽 상반신은 비로소 꽉찬 상태에서 움직이게 된다. 꽉찬 오른쪽 어깨가 가 팔뚝을 , 팔뚝이 손목을 , 손목이 손가락을 , 각각 지극히 꽉찬  정기(精)로써 지극히 텅빈 그 형태(形)를 움직여가는 것이다. 추사는 꽉찬 정기를 세 몸(三體 : 좌우 상반신과 두 다리)의 꽉찬 것이 지극히 텅 빈 중에서 무르녹아 맺힌 것이라는 서결(書訣)의 뜻을 거듭 생각했다. 꽉차도록 충실하기 때문에 글씨의 점획이 종이를 뚫고 , 텅 비었기 때문에 정기가 종이에 밴다. 어느 해 겨울 달밤 , 혹한의 한라산에서 추사가 종이에 쓴 글씨만이 얼어붙지 않은 연유가 , 혹은 중봉을 쓰는 그의 새롭고 수련된 이런 집필, 운필법에 있었던 것이다.

     

    추사는 나무목변의 첫 가로획을 영자팔법(永字八法)의 늑(勒) 처럼 세번쯤 숨을 고르며 오 른쪽으로  천천히 그어가다가 붓끝을 처음과는 대조되게 외로 한 바귀 돌리듯 , 아래쪽으 로 감싸 끌어 멈추며 꾹 눌렀다.  영자팔법의 짧으며 자칫 오른쪽으로 치켜지는 듯한 가로획인 책(策)의 뜻이 조금 있었다. 다음은 나무목자의 곧게 내리긋는 긴획 노(努)이다. 힘을 끌며 버티는 활의 노(弩)와도 같은 뜻이다. 여기서 내리긋는 획은 곧기만 해서도 안된다. 오히려 힘을 잃는다. 특히 이번에 내리긋는 획은 중간쯤에서서 좀 위로 휘는 듯하다가 다시 곧은 획으로 숨쉬는 통나무줄기처럼 내려가 멎었다. 나무 목자의 세번째 획인 왼쪽으로 내리 삐치는 약(掠)은 원래 붓끝이 왼쪽으로 빠지면서 날카로와야 했다. 추사는 조금 빠른 기세로 삐쳐내리던 붓끝을 멈추고 외로 가볍게 튕기면서 떼었다. 그때 붓을 튕겨내는 묘리는 붓대에 댄 가운데 손가락 지문 부분의 힘과 부드러움 사이에 있다.  나무목변의 오른쪽 점은 측(側)이다. 붓을 곁으로 내리대며 비스듬히 쓸리게 찍는 점인데 점에서 먹빛이 짙게 모 인다. 소동파나 유석암(劉石庵)은 특히 먹을 잘 써서 그처럼 먹을 모은 곳에서는 먹자국이 맺혀 좁쌀알같이 오톨도톨 돋아 올랐다. 추사는 붓뿐 아니라 또한 먹쓰는 법을 옛사람들을 따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붓글씨를 쓰는 사람은 먹을 제일로 삼는다고도 했다. 글씨는 붓으로 쓰는 것이지만 ,결국 붓으로 먹을 칠하는 것일 뿐이다.

     

    힘을 쓰는 붓끝은 글자의 힘줄이고 먹은 글자의 피와 살이다. 좋은 벼루는 먹을 아름다운 여러 빛깔 로 피어나게 하고 , 알맞는 종이는 그런 먹빛을 머금어서 나타나 빛나게 한다. 팔꿈치를 들고(懸腕) 쓰는 추사의 붓발에서 먹이 한 점에 모이며 붓자국이 위로 쳐들리듯 떼어졌다. 점의 위쪽으로 드문드문 너덧 줄의 굵고 가는 가시랭이처림 비백(飛白)이 생겼다.

     

    곧 나무목자의 오른쪽으로 반(反)자의 긴 가로획을 쓴다. 늑(勒)이다. 특히 이 긴 가로획에서는 붓대를 세우고 붓끝이 획의 중심을 앞서 나가야 하는 데 그 보다 먼저 못을 처음 대는 자리가 중요하다. 추사는 일적이 연경에 머무르면서 붓을 잡는 발등과 아울러 글씨를 구성하는 포백(布白)의 새로운 법칙을 또한. 배웠었다. 하얀 지면공간에 먹으로 쓰는 획과 획이, 글자와 글자끼리가 , 글줄과 글줄 사이가 잘 맞고 어울리게 하는 것이 포백이다. 포백도 처음 배울 때는 고르고 바르게 어울리도록 해야한다.  그것을 잘 익히면 비뚤어지고  바로 서 고 성기고 빽빽한 글자며 글줄의 구성을 더 자유롭게 한다.  그러면서도 근본의 원칙은 원칙대로 또한 있다. 사이를 잡고 구성을 맺는(間架結構) 80여개의 법칙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 글자의 오른쪽이 짧으면 아래를 가지런히 , 왼쪽이 짧으면 위를 가지런히 한다는 원칙이 있다.  널판자(板)의 양쪽 길이는 비슷하지만 나무목변보다 오른쪽 돌이킬 반(反)자의 질량이 큰 것으로 보아 , 여기서 추사는 위를 가지런히 했다. 가로획의 늑은 가운데를 자칫 높이듯 , 오른쪽으로 세번쯤 힘을 주며 가로 밀어 가는데 , 획을 가로 밀어가는 것은 손목 아닌 손가락 , 손가락중에서도 무명지의 손톱과 살 사이의 힘이다. 

     

    다음 길게 왼손으로 내리 삐치는(掠) 돌이킬 반자의 한 획은 나무목변보다 좀더 길며 그만큼 변화를 주며 굽는 듯 휘게 삐쳤다. 그 안으로 치키는 가로획(策)과 왼쪽으로 내리삐치는  획(掠)으로 합치는 돌이킬 반자 중의 또 우(又)의 갈쿠리( r형의부분 )를 가볍게 대서 둥글게 치키는 형세로 긋고 성긴 듯 빽빽하게 꺾어 삐쳤다. 널판자의 마지막획은 세로의 형태 로 오른쪽을 향해  삐쳐지는 파임이며 영자팔법에서의 물결치는 파임인 책(磔)이 된다. 이 렇게 선 파임(從波)과 가로파임(橫波)이 있는데 파임은 다섯 번을 멎는 듯 하면서 그어가야 한다. 선파임은 시작하는 머리에서 한 번 , 중간에서 세 번 , 꼬리에서 한 번을 , 누운파임은 머리에서 한 번과 중간 두번 , 꼬리에서 두 번을 한다. 중간에서 세 번을 숨쉬며 널판자의 마지막 획인  선파임의 꼬리가 천천히 끌리다가 획이 떼어졌다. 판전 두자중의 첫 한자를 그렇게 다 썼다.

     

    대궐전자는 그렇게 오른쪽이 짧은 듯한 글자이므로 아래를 가지런히 해야 하는데 첫 글자인 판(板)자와 형태며 기세가 저절로 어울려야 한다.  따라서 널판자를 쓴 호흡과 형세를 이으며 나란히 간격을 잡는다. 왼쪽의 주검시변(尸)을 육중한 집의 구조처럼 크게 하면서 왼쪽으로 삐쳐내는 획(掠)을 , 곧게 내리긋는 획(努)에 가깝게 썼다. 육중한 지붕을 받치는 실팍한 황장목의 기둥과도 같았다.

     

    글자 중에 두 개의 곧은 획이 있으면 왼쪽을 곱게 오른쪽을 거칠게 하라고 했다. 주검시 안의 한가지공자(共)의 첫 가로획을 쓰고 추사는 곧은 두 획을 쓰며 오른쪽 획을 조금 높여서 내리 그었다.

     

    대궐전자를 쓰면서 추사는 세 군데 각각 다른 점을 찍었다. 주검시변 안의 한가지공자(共)아래의 양쪽 점과 오른쪽의 갖은등글월문(殳 : 「칠수」자와 같은 형태) 중의 윗 부분 , 안석궤자(几)의 변형으로 오른쪽이 획이 잘리며 생긴 아래의 점이다. 같은 점이라도 한가지공자의 왼쪽 점은 영자팔만법의 탁(啄)처럼 붓을 뉘는 듯하며 급히 후린다. 추사는 붓끝을 뉘어,  위로 꾹 누르면서 급히 왼쪽으로 후렸다. 짧으면서도 형세가 급한 듯한 왼쪽점이 그 렇게 찍혔다. 붓글씨에서 점을 찍는데 또한 거두어 채는 기량을 중시했다. 팽팽하면서도 무거운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한가지공의 오른쪽 점은 역시 측이다.  그런데 점이라고 하지 않고 측(側 )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다. 비스듬히 쏠린 점의 형세이기 때문이다. 먼저 널판자 나무목변의 측에서는 붓발을 위로 드는 듯 거두어 비백을 남겼으나 이번의 측은 아래로 누르는 듯 붓을 떼었다. 점은 점이지만 갓머리의 윗점은 측이 아니다.  붓을 세워 붓끝을 돌리며 머리를 누르고 중봉을 끌어 아래로 내치 거두는 점이다. 점은 둥글넓적하기보다는 베를 짜는 북의 모서리(凌角)처럼 생겨야 한다고 했지만 여기 안석궤의 변형으로 생긴 오른쪽의 아랫 점은  측과는 달리 넓적한 점의 머리가 그 위에 삐쳐친 두 뾰죽한 글씨발들의 꼬리와 딱 어울린다.

     

     

     대궐전자의 오른쪽 부분 , 변형된 갖은등글월문에는 짧고(啄) , 길게(掠) 왼쪽으로 삐쳐진 글씨발이 세 개 있다. 첫 획은 짧은 약(掠)자처럼 삐치고 둘째 획은 점처럼 쓰며 짧은 삐침을 갈쿠리처럼 후렀다. 맨 아래의 긴 왼즉 삐침은 상대적으로 형세의 여유를 주었다. 대궐전자의 마지막 획도 세로의 선 파임이다. 처음 한 번 중간에서 세 번 꼬리에서 한번을 또 쉬고 끌어 붓을 떼었다. 마침내 판전(板殿)의 두 글자를 다 썼다. 글씨체로 보아 그 것은 해서였다.

     

    그러나 두자의 글씨는 두루 두루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로 이루어진 글씨였다. 절로 이루어진 행위였다.  두 글자 , 무릇  스물 두번의 획을 써간 추사의 마음과 온 몸과손과 몸의 움직임은 -두루 그의 숨결처럼 절로 그렇게 이루어진 행위였다. 절로 절로 이루어진 글씨였다.

     

    추사는 다시 붓끝을 모아 대궐전자의 왼쪽으로 「칠십일과병중작( 七十一果病中作)이라는  관지(款識)를 종이폭의 아래위가 거의 다 차도록 했다. 가는 획에 행서의 기운이 있는 해서였다.

     

     

    관저 끝의 작(作)과 중(中)자의 중간높이쯤 왼쪽으로 자리를 잡아 치닷분 사방의 도장을 찍었다. 백문의 완당(阮堂) 인(印)이었다.

     

    추사는 글씨폭을 벽에 걸게 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아주 온화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단 두자의 글씨 , 판전의 두 글자는 그 때까지 유례가 없는 최초의 글씨, 그리고 최후의 글씨였다.

     

    그 때 , 추사의 팔뚝과 온몸에는 꼭 쥔 붓을 놓치지 않고 매달린 세 살 때의 야무진 힘과 여섯 살 때의 입춘글씨를 쓰던 싹과 , 3백9개의 비석이며 8만권의 금석의 기운( 金石之氣)과 발등 포백의 모든 법칙과 그리고 60여년을 쓴 그의 갖은 글씨들 , 함경도에서 쓰던 행서의 기운과 더욱 얼마 전에 쓴 대팽두부. . .의 예서의 요소와 바로 조금 전에 쓴 대웅전(大雄殿)의 해서의 뜻이 절로 모여 있었다. 넓은 벌판에 잘 익은 벼이삭의 물결처럼 절로 여물고 두루 다 익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추사의 정신은 그런 모든 것을 떠나 있었다. 붓에서도 글씨에서도 다 떠나 있었다.  끝내 다 떠나 있었다. 글씨도 공부도 세상 일도 다 떠나 있었다. 사람의 일이라는 아무런 짐도 아직 안지고 그저 노는 70년 전의 어린애처럼 다시 돌아가서 다 떠나 있었다.

     

    거의 타들어간 향의 연기가 글씨를 다 쓴 방안을 문자향 서귄기의 여운인 듯 가늘게 감돌며 방 밖으로 흘러나갔고 아득히 피어올랐다.

     

    봉은사 숲속의 아주 잘  늙은 소나무의 높은 가지 사이를 한줄기 바람이 멀리 불었다. 바람이 어느 천지의 숨결처럼 멀리 밀리 불어 지나갔다.

     

    사흘 후 추사는 과천의 고지초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해 10월  10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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