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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때 오디오에 빠져 산적이 있었다. 많은 오디오들을 사고 바꾸고 만들기도 했다. 그중에는 한때 명기라고 부르는 것들도 있었다. 명기라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우선 명기라는 족보가 붙으면 기계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다. 대부분의 기계와 마찬가지로 오디오들의 운명은 거의 대부분 버려지는 것이다. 앰프나 CDP는 전자기계로 폐기되거나 스피커처럼 생활쓰레기로 파기되는 것이 운명이다.
일반적인 기계들에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명기라는 족보가 붙어버리면 수명은 아주 길어진다. 그리고 기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늘면 오랫동안 장터에서 소중하게 거래되기도 한다. 차량도 마찬가지지만 오디오는 종류와 범위가 더 다양하다. 평가의 잣대도 더 제멋대로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도 힘들다.
몇 주전부터인가 그동안 모았던 기계들은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사놓고 듣지를 않는다는 것이고(제일 많이 음악을 듣는 기계는 여전히 PC에 물려있는 싸구려 Britz 스피커다) 그 다음은 장소를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이고 그 다음의 이유는 DIY AUDIO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예전에 기계들을 다양하게 모았던 이유는 비교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모으기 시작한 이유는 누군가가 이 기계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 좋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누군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보고 구한 것보다는 인터넷의 평론을 참조한 것이 더 많았다. 오디오 잡지와 숍들이 고전하는 경우는 거래와 소개가 인터넷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들을 많이 닫고 말았다.
고생해서(사러 아주 멀리까지 간 적도 있고 무거운 스피커를 옮긴 적도 있다) 모았던 물건들을 체계적으로 처분해야 했기 때문에 거래는 하나씩 마지막으로 평가하고 버려야 했다. 그 중에 하나는 마샬전자의 M-124라는 스피커였는데 없애야 할 것인지를 놓고 한참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명기 리스트에는 올라와 있지 않은 스피커지만 이 싸구려 스피커가 내는 소리는 정말 특이했다. 국악과 가요를 듣고 있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내는 스피커였다. 고음은 약간 째째거리고 저음은 쿵쿵 울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급스피커와는 거리가 먼 소리를 내는 스피커라고 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 스피커의 가격은 정말 싸다. 다만 구하기가 어렵고 상태가 좋은 것은 더 그렇다.
내치기는 싫었지만 다른 스피커를 들을 시간과 공간도 만들어야 했고 무엇보다 모든 스피커와 앰프를 다 들을 수도 없다. 정말이지 하루에 느긋하게 오디오를 켜놓고 1∼2시간 음악을 들을 여유는 큰 사치에 속한다. 애들이 있으면 큰 소리로 들을 수도 없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M-124를 없앨 무렵에는 정말 기묘한 거래들을 많이 했다. 바로 전에는 MD-2200이라는 인켈의 파워앰프(저렴한 명기에 속하는 앰프)와 PRO-10이라는 스피커를 처분했다. 가격은 역시 착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든 몇 안 되는 걸작들이다. 이들도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보관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다른 사람이 이 골동품을 들을 기회도 주어야 한다. 아무튼 M-124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조여지는 소리를 낸다. 한국인의 정서에 맞추어 튜닝한 소리로 알려져 있었다.
이 스피커를 없애면서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가져가기만을 바랬다. 무엇보다도 잘 듣지 않지만 이 이상한 기계의 좋은 주인을 찾아주고 싶었다. 이 스피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꽤 있다.
가격은 거의 거저에 가까운 값으로 정했다. 설명은 일부러 약간 시큰둥하게 적었다. 그래야 아는 사람이 사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터에 올리자마자 멀리 아산에서 누군가 사겠다고 바로 연락이 왔다. 그 스피커를 잘 아는 사람인 듯 했다. 유닛은 완벽하지만 통은 약간의 수리를 요하며 잘 아는 사람이 구매했으면 좋겠다고 하자 바로 다음날 올라오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약간 열정이 지나친 편이다.
다음날이 되자 구매자는 아산에서 출발했다. 만나서 스피커를 보여주자 스피커의 콘지 재질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의 유저가 아닌 듯 했다. 이 작은 콘지는 세라믹이며 다른 기종 M-165는 파이오니어의 콘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스피커는 정말 꽉 조여지는 소리로 튜닝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그 구매자는 유명한 오디오 평론가였던 김종룡 님이었다. 정말 의외였다.
김종룡 님은 책도 몇 권 썼는데 최근의 유명한 오디오 책은 `HIFI 명기백선'이라는 책이다(책소개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1428575). 오디오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책이기도 하다. 책에 나오는 오디오들을 다 들어보고 나서 사진과 설명을 적었다. 회심의 역작이기도 하다. `카오디오 길라잡이'라는 책도 썼고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세기의 명차'라는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오디오 회사의 고문을 두루 거쳤다. 안 들어본 오디오도 별로 없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젊었을 때 개발팀으로 참여했던 스피커, 20년도 넘은 낡고 허름한 스피커 소리를 듣고 싶어 멀리서 달려온 것이었다. 희한한 인연으로 스피커는 정말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마샬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스피커 개발회사였고 경영상태가 좋았다면 지금은 명기에 준하는 스피커들을 만들고도 남을 회사였을 것이 분명하다.
다음은 대화의 일부다.
- 이 스피커는 어떻게 튜닝했는가? 왜 이 스피커를 명기라고 생각하는가?
-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한 개발의 노력이다. 콘지나 코일은 이런 특성을 내기 위해 다른 스피커의 유닛들을 분해해 보기도 하고 더 개선해 보려고 노력했다. 튜닝을 위한 특별한 기계는 없다. 사람의 귀가 최후의 판정을 내린다. 이번에 사려는 기계는 그 노력의 최고라인에 속하는 몇 개의 스피커 중의 하나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아무 것도 없던 것에서 무엇을 만들어내야 했던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일본이 유럽의 스피커들을 벤치마킹 했던 노력 이상으로 애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하이파이 시장은 성장을 거듭하는 중요한 시장이었다. 정말 필사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독자적인 소리를 만들었던 이 상황은 타고난 글재주를 가진 김종룡 님의 표현을 따르면 다음과 같이 변한다. 필자의 둔탁한 표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평론가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다.
“마샬의 스피커 사운드 기술력은 주로 외국산 유명 스피커와 스피커 시스템을 분석해 모방하면서 그 기술적 결과들이 쌓여져 만들어진 것이지만, 당시 마샬 내의 음향 엔지니어들의 뼈를 깍는 고통의 연구 개발 노력으로 진정한 한국적 감성의 사운드가 만들어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기분 좋은 탄력의 맛좋은 사운드, 우수한 고음의 감칠맛 나는 살랑거림과 두텁고 안정된 톤의 호소력 넘치는 중역감 그리고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끈적끈적한 찰기를 가지는 탄력적 저음의 매력, 바로 이러한 것들이 과거 마샬 사운드의 핵심이자 특징이었습니다. 이 때의 마샬 사운드는 분명 한국인의 가슴을 가장 잘 파고드는 한국적 감성의 한국의 스피커 사운드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마샬 하이파이 사운드의 최고의 정점은 모니터 시리즈의 완성작인 4웨이 스피커 시스템인 M165시스템에 모두 담겨져 이룩된 바 있으며, M124, M104의 4웨이 시스템 라인 업 역시 과거 한국 최고의 사운드라 하겠습니다…. 세계 유수의 브랜드가 난립되어 어지러운 하이파이 스피커 사운드의 세계에서 한국 스피커 사운드의 존재와 위상은 대단히 위축된 감이 많습니다만, 또한 신세대 새로운 한국의 스피커 브랜드들이 그저 유명 외산 고가 유닛을 무분별 수입하여 졸속의 하이엔드 스피커 사운드를 너무도 손쉽게 만들어내는 요즘의 세태이지만, 한 번쯤 진정 한국인의 숨결을 담고 한국인만의 끈끈한 질감을 담은 명실상부한 한국 스피커 사운드의 존재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잠시 동안의 청음을 같이하고 대화를 나눈 후 다시 떠나는 이 신비로운 구매자에게 짧은 기간이었지만 필자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많이 떠들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작업실로 찾아 더 배우고 싶노라고 인사를 한 후 잠시 생각을 했다. 좋다는 오디오를 다 들어본 평론가가 소장하고 싶어 바로 서울로 올라올 만한 스피커가 이런 저렴한 기종이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출력이나 수치는 그야말로 수치에 불과하다. 가격은 나중에 크게 올라갈지도 모른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그 이상한 스피커에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를 싫어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법에 가까운 소리를 들려준다. 듣고 싶어하는 소리는 분명 따로 존재한다. 약간 째째거리는 소리 속에 꽉 찬 느낌 그리고 강한 저음을 듣고 있노라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필자는 그 느낌이 두렵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좋은 오디오이고 어떻게 보면 나쁜 오디오다.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계측기조차 별로 쓸만한 것이 없던 시절 귀와 몸으로 튜닝했던 당시의 스피커들 가운데 몇 개는 감성이라는 것이 유일한 계측기라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강한 바이어스를 심어주는 평론가는 특별한 존재다. 평론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스피커를 판 것을 잠시 후회하기도 했을 정도다.
자동차에 대해서도 평론가들의 강한 입김이 존재한다. 이들의 설명을 듣고 역사를 듣고 있으면 그 일부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해 보이는 차에 대해서도 좋은 설명을 듣다보면 강한 바이어스가 되고 나중에는 고객 충성도로 변하며 일부는 평생 소장하고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중에는 정말 특별한 것들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 것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감성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